#25.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카신이 사는 별궁을 제집처럼 찾았다. 그의 눈에도 대마법사는 신비롭고 기이한 존재였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다.
덕분에 역대 황제 중에 루이스는 대마법사와 가장 긴밀한 교류를 한다는 평을 받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살아온 카신이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가장 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카신에게 항상 알지 못하는 벽을 느꼈다. 그건 그가 범접할 수 없는, 결코 섞이지 않는 존재여서였다.
세간에선 카신을 유희하러 나온 드래곤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외모는 이십대의 훤칠한 청년인 주제에 이미 오래전에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었다. 거기다 세상을 통달한 시야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니 그런 오해는 당연했다.
루이스는 처음으로 카신이 외모의 나이대로 이십대의 젊은 청년처럼 보였다. 삐친 기색이 역력한, 아주 불만스런 표정을 보자니 그 또래의 젊은이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저도 세인트로 들어가겠습니다.”
“쿨럭!”
말을 쉽사리 꺼내지 않은 카신을 기다리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던 루이스는 체통도 잊은 채 도로 뱉어냈다.
“자네가 세인트로? 그래주면 아주 고마운 일이지!”
세간과 엮이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카신이 제 발로 학교에 들어가 준다면 그거야말로 루이스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카신이 교수라는 직위를 갖게 된다면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교수가 해야 하는 일이라며 떠맡길 수 있었다.
“자네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있겠지.”
“학생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까?”
쨍그랑!
당황스러움에도 손에 끝까지 들려 있던 값비싼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찻잔을 신경 쓰지도 못했다. 이렇게 그를 연달아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은 카신밖에 없으리라.
“자네, 미쳤나?”
나이를 떠나서 실력이 있는데, 학생이라니!
하지만 카신은 기가 막혀 하는 루이스를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었다.
“학생은 절대 안 되네! 절대! 누가 자네가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려고 하겠나?”
“모습은 완벽하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안 돼!”
세인트 학생들은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였다. 카신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뭘 배우든 간에 유능한 귀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카신이 학생으로 들어간다면 그 기회가 전부 사라진다.
“자네는 도대체 그 긴 세월 동안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가!”
그걸 떠나서 카신이 학생이라니. 말이 안 되는 걸 떠나 절대 그렇게 허락할 수 없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카신은 누군가의 아래에서 무엇을 배울 인물이 되지 못했다.
“히나 양, 아니 지금쯤 레이디 리베리아가 됐겠군. 레이디 리베리아가 들을 만한 수업의 교수로는 다 집어넣어 주겠네.”
아주 뽕을 뽑을 생각이로군.
불만이 튀어나왔지만 카신은 황제의 제의를 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히나와 만날 기회는 현저히 적어진다.
“세 개 이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수업은 소수 정예가 될 거고요.”
“히나가 포함된 상급반은 인원이 적으니, 되도록 그 반 수업만 가르칠 수 있게 노력해 보겠네.”
제대로 된 대답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됐다고 말했다가 저 능구렁이가 강하게 나오면 더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여기서 아쉬운 건 황제가 아니었다.
“레이디 리베리아는 다음 주부터 세인트에 보낼 생각이다만…….”
“그럼 저도 다음 주부터 들어가도록 하죠.”
카신은 성급히 말했다.
“하하, 원래라면 수업 중간에 교수가 바뀌는 건 안 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그때 같이 들어가게. 대마법사가 세인트로 간다는데 뭔들 못 해줄꼬.”
귀찮은 인간에게 제대로 약점이 잡혔다.
카신은 피곤해질 미래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황제를 보고 깊은 고민을 해야 했다. 죽일지, 말지를.
* * *
“오늘부터 리베리아 가에 들어오게 된 히나다. 이제 한 가족이 됐으니 잘 지내도록 하거라.”
“안녕하세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아무리 둔해도 그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가족들이 전부 모여 밥을 먹는 식사 자리였다. 밝은 모습으로 예쁘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싸늘한 시선에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히나라고 합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에 히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은 이제부터 네 어머니가 될 사라, 그리고 장남인 베라미와 차남인 루터란다. 네 오라비들이지.”
탁.
소개가 끝나자마자 베라미는 포크를 강하게 내려놓았다.
“세인트에 들어간다면 기숙사 생활을 하겠군요. 다시는 집에서 얼굴 볼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불쾌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며 베라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을 확인하며 히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뭐? 세인트에 온다고? 하! 너, 나 아는 척할 생각도 하지 마라?”
뒤이어 루터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고아 출신의 여자아이가 동생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같은 학교에 들어간다는 것까지 몰랐던 그는 다소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당신 때문에 분위기가 이게 뭔가요.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고 해도 이런 건 제대로 거절을 했어야죠. 신분도 천한 아이를 양녀로 받다니, 이건 가문의 수치라고요.”
사라의 매서운 시선이 히나에게 닿았다. 칼날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따가웠다.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집 안 분위기가 냉랭했다. 테이블 위에 준비된 식사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저, 저는 이만 올라가볼게요!”
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 배가 불러서요! 잘 먹었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도망가다시피 방으로 가버린 히나를 보며 리베리아 후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보는 자리에서 예의도 없이 먼저 자리를 뜨다니. 저런 것을 정말 양녀로 들여야 하나요?”
“베라미가 더 먼저 나가지 않았소?”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죠! 저 아이는 지금 첫인사를 온 거잖아요!”
리베리아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발이 심할 것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물릴 수 없는 일이었다.
리베리아 후작은 얼마 전 황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후작, 이번 일에 대마법사의 시녀가 엮여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이중 첩자 말입니까?”
“아아, 맞아. 이중 첩자인 시녀 말일세.”
풀토 공작과 함께 그 폭발이 있던 장소의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당시 풀토 공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떤 마법에 당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발견했을 때에는 도망은커녕 겁에 질린 채 말도 제대로 못 한 상태였다.
군데군데 나가떨어진 살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데미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듣기론 대마법사께서 그 시녀를 꽤 귀하게 여긴다죠?”
황궁 마법사 출신의 앨버트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몰골로 잡혀 들어왔다. 그나마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던 건 앨버트의 품에 갖고 있었던 마법사단의 신분증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사실상 바로 심문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그리고 그의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 여쭤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잡아들인 대부분이 그 시녀가 한패라고 끝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일은 황궁 마법사들도 꽤 연류되어 있었다. 리베리아 후작은 로티스 공작과 그곳에 있는 모두를 심문하여 의심 가는 이들을 전부 잡아들이고 있었다. 뿌리째 뽑기 위해서였다.
중요한 단서부터 쓸데없는 단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사했다. 그리고 히나가 공범이라는 증거를 너무 많이 잡았다.
“조사를 해봤지만, 아무리 봐도 이중첩자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녀도 잡아들여 조사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후작은 그들을 고문할 때 동일하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루이스의 말대로 그냥 두기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히나는 황제와 대마법사의 사사로운 대화까지도 밀고했고, 온몸으로 수상쩍은 빛을 내기도 했다. 반역죄가 아니라고 해도 잡아들여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
“리베리아 후작. 자네가 그 시녀를 데려고 가야겠어.”
“예, 당장 잡아들이겠습니다.”
“아니, 잡아들이란 게 아니라 양녀로 데려가란 말일세.”
순간 리베리아 후작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자식이, 그것도 능력 있는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후계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아이도 아닌 여자아이를 양녀로 들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는 대마법사와 아주 특별한 관계지. 대대로 마법사 집안인 자네가 가장 적합해. 그 아이를 자네가 양녀로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궁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걸세.”
그때만 해도 믿기지 않았다. 루이스에게 카신이 그 시녀 덕에 파티까지 나왔다는 소리를 듣긴 했다.
하지만 리베리아 후작은 대마법사가 별궁에서 나온 이유가 달리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시녀를 식사 자리에 부르면 카신까지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도 리베리아 후작은 감히 황제인 루이스의 말을 의심했었다.
카신이 무슨 변화를 보였던 간에 워낙 변덕스런 사람이니, 갑자기 기분이 내켜 그리 행동했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일리 있었다.
리베리아 후작은 처음으로 함께한 카신과의 저녁 식사를 잊을 수 없었다. 물론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카신은 자리를 떴지만, 짧은 시간 동안 큰 인상을 남기고 갔다.
후작이 알고 있는 대마법사 카신은 황제의 말에도 콧방귀를 뀌며 제멋대로 굴고 은둔 생활을 즐기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힘 덕에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이었고, 제국의 자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의 카신은 후작이 알고 있던 대마법사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정말 방금 왔던 분이 대마법사입니까?”
시녀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던 카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카신이 가고 나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보고 루이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잘 봤겠지? 후작은 그 아이를 양녀로 입적만 시키면 되는 걸세. 장차 자네의 집안에도 아주 큰 힘이 되겠지.”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폐하.”
카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단 명령이니 히나를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승낙했지만, 은근히 후회하고 있던 리베리아 후작은 그날 아주 큰 안심을 했다. 미리 들었던 것처럼 히나는 대마법사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가족들의 강경한 반대에도 리베리아 후작은 오늘 당당하게 히나를 데려왔다. 마법사로서 그는 대마법사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히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직접 확인했다.
데리고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마법사 집안이 아닌 그에게 와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대마법사님께서 저런 애를 신경 쓴다고요? 내가 볼 때는 영 아닌데.”
의심스런 눈으로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 루터처럼 리베리아 후작 또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루터, 기숙사로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거라. 동생이니, 잘 챙겨줘야 한다.”
“네? 제가요?”
루터의 표정이 심히 구겨졌다. 힘없고 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들어온 동생에게 잘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안하긴 했지만, 제 발로 나가게 하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세인트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가족인 걸 숨기기라도 할 셈이었다.
“싫어요. 절대 싫다고요. 저런 걸 데리고 다니라니. 세인트도 다 죽었네, 죽었어.”
히나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싫은지 루터는 질색하며 반대했다.
“혹시라도 세인트 안에서 절 아는 척하면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아버지의 양녀한테 잘 말해주세요. 저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밥맛이 떨어져서.”
“루터!”
최근에 오냐오냐 키운 티를 부쩍 내는 루터를 붙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리베리아 후작은 예상보다도 심한 가족들의 반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저 아이가 대마법사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냥 억측이 아니고요?”
사라의 못마땅한 목소리도 이어졌다. 후작은 지금 조사 중인 극비사항까지 다 말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현재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직접 보기 전까지 의심했던 그처럼 앞으로 가족들을 이해시키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어차피 상관없으려나.’
절차상 양녀가 됐을 뿐, 히나가 이 집에서 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세인트는 기숙학교였고, 방학 때도 수업을 신청해서 들을 수 있었다. 주말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졸업만 하면 바로 떠날 테니.’
원한다면 졸업을 할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후작은 굳이 오지 않으려는 그녀를 불러다가 사교계에 데려가거나 가문을 위해 일을 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아는 것 같으니, 반기지 않은 집안에 기어이 오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 자신을 애지중지 여기는 대마법사에게 돌아가리라.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거요. 저 아이는 분명 우리 집안에 아주 큰 힘을 줄 거요.”
별궁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는 카신이 시녀 하나가 걱정이 되어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다른 이유가 섞인 것도 아닌 시녀 하나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관계인 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