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다행이구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말이야.]
“오라버니들이 아주 잘해주세요! 맛있는 음식도 엄청 많이 있어서 과식해 버렸지 뭐예요!”
생전 처음으로 갖게 된 넓고 푹신한 침대에 엎어진 채 팔을 괸 히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투명한 수정구가 말을 할 때마다 밝은 빛을 띠며 대화를 전달해 주었다. 카신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네가 없어서 많이 쓸쓸하다만, 너는 신이 난 모양이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히나는 입을 다물었다. 카신이 쓸쓸해한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제가 없어서 쓸쓸하세요?”
[왜 묻는 거지? 내 말이 믿기지 않니?]
“……카신 님은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차도 하루 세 번 외에는 드시지 않고, 따로 누굴 부르는 일이 없잖아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너와 함께 있는 건 좋아한단다.]
바로 앞에 카신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히나는 화르륵 붉어진 뺨을 식히기 위해 양손을 갖다 댔다.
혹시 또 사랑의 묘약 때문에 이러는 건가?
히나는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벌이라고 했다. 해독약을 달라고 하고 싶지만, 염치가 없어서 말도 못 꺼내겠다.
[그보다도 가족들이 잘해주어서 다행이구나. 그다지 살가운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다.]
“아, 아버지 말고 또 누구를 아시나요?”
아직 입에 익숙지 않은 단어를 꺼내며 히나는 뺨을 긁적였다.
새 가족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아까 전에 확실히 알았다. 다시 생각하니 괜히 또 울적해졌다.
[리베리아 후작의 장남이라면 멀리서 몇 번 본 적이 있지.]
“정말요? 베…… 라미 오라버니를요?”
오라버니라고 앞에서 부른다면 혼이 나지 않을까?
베라미는 얼굴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도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옆에 있는 리베리아 후작에게.
쌀쌀맞았던 베라미를 떠올리며 히나는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앞에 카신이 있었다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해 거짓말하는 것을 진작 들켰으리라.
[황궁 마법사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라고 인사를 받은 기억이 있군. 능력도 출중하니 차후에 리베리아 후작의 뒤를 이어 황궁 마법사단을 맡겠지.]
가문만큼이나 실력도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히나는 가족이 생긴 것을 축하해 줬던 카신에게 오로지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거짓말이 나쁜 건 알고 있지만, 더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와아, 잘 아시나 봐요. 혹시…… 뭘 좋아하는지도 아세요?”
새로운 가족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라버니였다. 오기 전부터 꿈꿨던 이상적인 남매지간을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단에 있는 마법사들과는 교류가 없어서 개개인의 취향까지는 모른단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나.]
“미, 미안하다니요! 아니에요, 카신 님!”
괜한 질문을 한 게 아닐까.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는 히나의 얼굴이 부쩍 어두웠다.
“그럼…… 둘째 오라버니에 대해서도 모르시죠?”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요! 오라버니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특히 둘째 오라버니랑은 같이 세인트에 다녀야 하거든요. 지, 지금도 친절하게 대해주시지만, 그래도 더 많은 걸 알고 싶어서…….”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아는 척하지 말라는 루터가 떠올랐다. 같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만큼 가장 친해져야 하는 인물이었지만, 루터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차남은 아직 세인트에 다닌다지? 정보는 받아보았다만…….]
“정보요? 무슨 정보요?”
[……이런,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어서 자야지.]
“카신 님? 카신 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에 수정구에서 빛이 사라졌다. 허무하게 끊겨진 수정구술을 멍하니 보던 히나는 곧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여태 누운 침대 중에서 가장 편하고, 또 넓으며 포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가시방석에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아직 안 친해져서 그런 걸까?”
꿈꾸던 가족과는 아주 멀었다. 처음엔 그저 아버지가 생긴다는 기쁜 마음 하나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리베리아 후작도 그녀를 딸로 보고 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환영받지 못한 곳에 있는 건 항상 불편했다.
“나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었겠지?”
눈이 점차 감겨왔다. 아침부터 이곳에 온다는 기대로 일찍 일어나 준비를 했더니 부쩍 피곤이 몰려왔다.
“어딘가에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
만약 세상에 살아 있지 않는다면 꿈에서라도 진짜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부모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하며 히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 * *
“그게 정말인가요? 대마법사께서 정말 세인트의 교수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니까?”
루이스는 결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카신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럼 세인트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벌떡 일어나는 헬렌의 허리를 잡고 도로 눕힌 루이스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부군을 앞에 두고 어딜 간다고?”
간지러운지 헬렌이 몸을 살며시 비틀었다. 루이스는 그녀의 몸에 끈덕지게 입술을 비볐다.
“폐하, 간지러워요.”
“어서 후계를 낳으라고 요즘 대신들이 얼마나 성화인 줄 아나?”
헬렌은 루이스의 유혹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요즘 화제에 오른 대마법사의 소식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도대체 대마법사께서는 그 시녀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그리 소중히 여기는 걸까요?”
아직도 이번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귀족들이 잡혀 들어오는 중이었다. 모반 세력의 중심에는 제국의 중심 세력 중 한 명인 풀토 공작이 있었다.
풀토 공작뿐만 아니었다. 리처드 백작부터 시작해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귀족들을 계속해서 잡아들이고 있었다.
현재까지 알아본 바로는 루이스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행방불명된 제이스가 황권을 노리고 있다.
웃으며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큰 문제였다. 역모를 꾀한 자들의 세력이 너무 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목이 날아가고 있었다.
“정말 그 시녀가 폐하의 이중 첩자가 맞기는 한 건가요?”
“헬렌, 때로는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다소 진지해진 루이스의 어조에 헬렌은 샐쭉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알고 싶긴 했지만, 루이스의 말대로 때론 알지 못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루이스는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히나에 대해 죄는커녕 작은 조사도 단호하게 금했다. 이 사건을 파헤치던 로티스 공작과 리베리아 후작이 처음에 반발하고 나섰지만, 루이스의 뜻을 굽힐 순 없었다.
“히나…… 아, 이제 레이디 리베리아라고 불러야겠군. 레이디 리베리아는 대마법사를 세상으로 나오게 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해줄 거야.”
“지금보다도 더요?”
“그럼. 먼저 내게 와서 세인트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만 봐도 모르겠나?”
헬렌은 파티장에서 잠깐 본 히나를 떠올렸다. 작고 귀여운, 그리고 밝은 기운이 넘치던 소녀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됐는지, 아니면 되는 중인지 앳된 티가 나는 통통한 볼은 만져 보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하지만 그 외에 딱히 특별해 보인다거나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도대체 대마법사께서는 그 시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최근 터무니없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대마법사의 시녀가 스스로 겁을 먹고 연달아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소문이 나기 전에도 시녀들은 자주 바뀌었다. 이유는 수려한 외모에 엄청난 마력을 가진 대마법사를 유혹하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거였다.
겉보기론 신비로운 매력이 넘치고 지위도 높은 그를 꾀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들어간 시녀들의 수는 엄청났다.
하지만 바위를 유혹해도 그만큼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리라. 시선조차 주지 않은 카신의 행동에 시녀들은 혼자 민망해하며 물러났다.
시녀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마법사를 차지하겠다며 매일같이 싸움이 났었다.
정작 카신은 싸움이 끝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시녀들은 죽자고 싸워 결국엔 같이 그만두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카신이 시끄러운 것을 참지 못하고 시녀를 한 명으로 줄이기 전까지만 해도 대마법사의 별궁에는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최근에 이상한 소문이 나서 시녀가 겁을 먹고 그만두는 건 얌전한 이유에 속했다.
“애초에 정말 누구에게 관심을 주긴 하나요?”
“그게 궁금해서 몇 번 찾아가 봤는데…….”
카신은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딱히 소중히 하는 물건도 없었다. 심지어 루이스를 따라 별궁에 카신을 보러 간 황비인 그녀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헬렌도 그러려니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 카신의 무례함을 들먹이며 극도로 싫어하기도 했다.
곱게 자라 황태자비가 되고, 황비가 된 그녀가 카신의 무례함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애완동물로 보지 않나 싶군.”
“애완동물이요?”
“왜 그 있잖나. 작고 귀여운 토끼? 아니, 새끼 사슴이 더 어울리겠군.”
“……원래 대마법사께선 동물을 좋아했나요?”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하기야 그렇게까지 감정을 보이지 않은 카신이 시녀를 작은 애완동물 취급하며 소중히 대한다는 것이 믿겨질 리가 없었다.
“신비로운 빛도 낸다지 않아? 사슴같이 생긴 것이 반딧불이처럼 예쁜 빛도 내니 더 끌리는 거겠지.”
터무니없는 이유란 걸 알았지만,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런…… 건가요? 반딧불이라니, 그 사람도 감수성이란 게 있긴 있었군요.”
루이스는 히나와 어울리는 동물을 하나 더 발견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람쥐를 닮기도 했더군. 그 통통한 볼에 얼마나 음식이 들어갈지 궁금해하며 예뻐해 줄지도 모르지.”
“그렇…… 네요. 어쩌면 그 시녀의 입에 음식을 계속 넣어보며 호기심을 풀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분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겐 절대 이런 비유를 하지 않겠지만, 카신은 이리 생각해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부부는 카신과 히나의 관계를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나면 음식을 입에 넣어준 적이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나도 그게 궁금하군.”
다른 건 모르겠지만, 카신은 히나를 보호하고 감추기 바빴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걸 충분히 이용하여 카신을 밖으로 더 나오게 할 셈이었다. 가장 큰 이득은 자신이 보겠지만, 카신에게도 아주 많은 도움이 되리라.
“그럼 이제 다른 남자가 아닌 우리 얘기를 하지.”
잠깐의 대화로 갈 곳을 잃었던 손이 다시금 헬렌의 허리를 감쌌다. 가끔은 대신들의 말도 들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