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27화 (27/128)

#27.

“어째서 이런 거랑 마차를 타고 함께 가야 하는 거야!”

“루터!”

차남인 루터는 심하게 제멋대로였다. 리베리아 후작은 성질을 있는 대로 내고 있는 아들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렸을 적에 일찌감치 철이 든 장남 베라미와 다르게 루터는 나이가 들어도 성숙하지 못했다. 모두 자신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탓이었다.

“세인트까지 걸어갈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거라. 물론 용돈도 없을 줄 알고 말이다.”

루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사라가 못마땅해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틀 내내 설득을 한 탓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히나, 이미 세인트에 말을 해놓았으니 가면 사람이 나와 있을 게다.”

“네, 아…… 버지.”

아버지라 했다고 혼나지 않을까?

히나는 말을 해놓고도 불안해서 치맛자락을 몇 번이고 매만졌다. 리베리아 후작이 이상적인 아버지는커녕 가족들에게도 따뜻한 사람이 아니란 걸 이틀 동안 충분히 깨달은 탓이었다.

“편하게 불러도 된다, 히나.”

처음에도 눈치를 본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심했다. 리베리아 후작은 식사 때만 내려와 아무런 말도 없이 밥만 먹고 제 방으로 올라가 버리는 히나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어.’

히나가 들어온 날까지만 해도 입적만 하면 그의 역할은 그걸로 끝이라 여겼다. 그녀는 곧 기숙사로 들어갈 거고, 졸업할 때까지 볼 일은 없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가 죽은 채 눈치만 보고 있는 히나를 볼 때마다 후작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처음 양녀로 맞이한다고 했을 때 눈물을 보이며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라 더 신경이 쓰이는 것도 있었다.

“딸아이는 처음 대하는 거라 내가 많이 신경 쓰지 못했다. 계속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영악하기라도 하면 미안한 마음도 없으련만. 안타깝게도 히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정치적 도구로 이곳에 온 거였다.

‘역시 가족이란 이름은 빌려줄 만큼 가벼운 게 아니지.’

히나가 온 날, 바로 베라미는 황궁 마법사단의 기숙사로 바로 들어가 버렸고, 루터는 식사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그럴 때마다 후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데려온 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차라리 속내를 감추며 웃는 얼굴로 뒤통수를 치는 정치판이 편했다.

하지만 이미 히나를 받아들였다. 리베리아 후작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꺼내며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너도 이제 리베리아다. 그러니 세인트에서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거라.”

묵묵히 말을 듣고만 있던 히나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올렸다. 계속 같이 식사를 했지만, 히나와 이렇게 마주 본 것은 처음이었다.

후작은 맑은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묘한 설렘과 기쁨을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아비한테 도움을 청하렴.”

아직까지 히나가 딸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하지만 후작은 며칠을 한집에 살며 히나가 같은 리베리아가 됐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같은 소속감을 갖는 것, 가족이 된다는 것은 역시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과정이 어떻든 그녀는 어엿한 리베리아였다.

“네, 아버지!”

히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딸에게 해줄 만한 말을 들으며 환하게 웃었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저리도 좋을까. 고작 이런 말 한마디에 기뻐할 줄 알았다면 더 해줄 것을.

리베리아 후작은 기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타는 히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마차를 탄 히나는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날 때까지 입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루터와 달리.

“너! 세인트에 들어가면 절대 아는 척하지 마. 알겠어?”

리베리아 후작의 말 한마디에 계속 들떠 있던 히나에게 루터는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방긋방긋 웃고 있던 히나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네, 오라버…….”

“그렇게 부르지 마!”

“하지만 그럼 따로 부를 호칭이 없는걸요.”

“그냥 모른 척하라고! 밖에서도 그리 부를 셈이야?”

조그만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내가 조금만 마력이 강했어도 벌써 졸업하고 형처럼 황궁 마법사단에 들어가는 거였는데…….”

어릴 때 여동생을 바라긴 했지만, 원한 건 부모님을 통해 얻은 진짜 여동생이었다. 어디서 주워 온 여동생이 아니었다.

위아래로 히나를 훑어본 루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로 생긴 여동생은 절세미인도 아니었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아기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만스러운 루터의 눈에는 좋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애가…… 말도 안 돼.”

세인트에 들어올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일찍이 황궁 마법사단에 들어간 베라미도 대마법사와 가까이서 한 인사는 딱 한 번이 전부라고 했다. 몇 번 더 봤지만, 인사조차도 힘들 정도로 먼 거리에서 본 게 다였다.

대마법사와 친분이 있다고 하기에 히나는 너무 심하게 평범했다. 아버지가 미친 것 외에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히나를 데려온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 세인트에서 봐도 인사를 하지 말까요? 그래도 가족인데…….”

기가 죽은 모습은 절대 귀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루터는 그 모습이 더 불만이었다.

세인트에 귀족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법이나 검술에 재능이 있다면 시험을 통해 평민도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신분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작은 차별 기류는 있다. 루터는 같은 리베리아인 히나로 인해 자신까지 하류층 계급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나만…….’

촉망받는 젊은 마법사인 베라미와 달리 루터는 마법적인 재능이 많이 떨어졌다.

노력으로 어느 정도까지 올라올 수 있는 검술이면 몰라도 유전적인 요인을 많이 받는 마법반의 상급반은 대부분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연히 하급, 중급반에는 유전적으로 불리한 평민들도 꽤 있는 편이었다.

이번에 겨우 상급반에 턱걸이로 들어갔다. 졸업까지 미루며 중급반에 오래 있었던 루터는 동급생인 평민들과의 교류도 꽤 하는 편이었다.

평민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짜증 났다.

‘아버지나 형처럼 조금이라도 능력이 더 출중했으면…….’

리베리아 가문에서는 항상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해 냈다. 특출 난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치고 루터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세인트황실학교에도 몇 번의 시험을 통해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죽어라 노력한 결과가 상급반에 턱걸이로 올라간 거였다.

그런데 생뚱맞게 생긴 시녀 출신의 여동생은 아무런 재능도 갖고 있지 않아 보이는데도 특례 입학, 그것도 같은 상급반으로 올라왔다.

신비한 잠재 능력이 발견됐다고는 설명을 들었으나, 아무리 봐도 납득할 수 있는 힘은 보이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마. 절대!”

“……네에.”

너무 심했나?

이미 예민해질 때로 예민해진 루터는 움츠러드는 작은 어깨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과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주쳐도 나 쳐다보지 말라고!”

한쪽 팔로도 둘러질 것 같은 작은 어깨가 떨렸다. 맑은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한껏 움츠러든 작은 체구의 히나를 보자 누가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죄책감 갖지 마! 저런 거랑 같이 다닐 순 없는 거잖아!’

평민들이 능력 없는 리베리아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귀족이라고 당연히 더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평민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저거랑 같이 다니면 나를 포함해서 우리 가문까지 평범하다고 평판이 내려갈지도 몰라.’

히나로 인해 더 큰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사양이었다. 최대한 그녀와 떨어져서 아무 사이가 아닌 것처럼 다니고 싶었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루터는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누가 보기 전에 히나와 어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어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하얀 제복에 루터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앞을 멍하니 쳐다봤다.

문 앞에 있는 황궁 마법사단의 제복이 어딘가 이상했다. 아버지가 입는 것과도, 형의 제복과도 많이 달랐다.

“카신 님!”

“으아악!”

마차의 작은 창문에서 더 작은 머리가 톡 튀어나왔다.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히나로 인해 마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문을 가로막고 있었던 루터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휘청거렸다.

철퍼덕.

바닥에 아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누가 절대 보면 안 될 정도로 흉한 꼴이었다.

“아! 괜찮으세요, 오라…….”

깜짝 놀란 히나가 말을 하다 다급히 제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또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히나의 목소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 리베리아 후작의 차남이로군.”

아무런 감정 없는 샛노란 눈동자가 루터에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자신을 보고 말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감흥 없는 얼굴로 루터를 지나쳤다.

‘카, 카신이라면…….’

히나가 부른 호칭은 루터가 알고 있는 한 한 사람밖에 없었다. 거기다 황궁 마법사단의 제복 중에서도 저렇게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도 단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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