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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28화 (28/128)

#28.

“오늘 온다는 말을 듣고 마중을 나왔단다. 잘 지냈니?”

당장에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나 품위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루터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믿기지 않은 인물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얼빠진 표정만 하고 있었다.

“그, 그보다 오…….”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한 히나가 입술을 달싹이며 루터를 쳐다보았다. 카신의 시선도 히나를 따라 움직였다.

히나가 반갑게 환대해 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의 예상과 달리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반응이었다. 이 녀석 때문에.

카신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닥에 얼빠지게 앉아 있는 루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나가 걱정하지 않느냐. 어서 일어나 괜찮다고 말해야지.”

“저, 전 괜찮습니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무언의 압박에 루터가 카신의 손을 어정쩡하게 잡으며 일어났다. 리베리아 후작 앞에서도 보이지 않은 각이 잡힌 모습이었다.

“그, 그런데 대마법사님께서 어찌 이런 곳에…….”

목소리조차 떨려서 쉬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인 대마법사였다. 루터의 목소리에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라면, 특히 위대한 마법사가 나오는 가문에서 자랐다면 카신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모든 마법사들의 칭송을 받는 카신이 눈앞에 있었다. 평생 가까이서 보기 힘들다는 그 대마법사가!

“히나, 숙소를 배정받아야지? 어서 내리렴.”

루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카신은 히나가 나오기 쉽게 손을 내밀었다. 치맛자락을 잡고 내리는 히나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모습이 보고 싶어서 만류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온 거였다. 카신은 마중 나오길 잘했다며 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카신 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고 있는지 보러 왔단다. 이제 막 보게 된 가족들하고 헤어져서 아쉽진 않았니?”

카신의 시선은 오로지 히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루터는 그제야 위대한 대마법사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알았지만 인정하지 못했던 사실을 겨우 인정했다.

‘정말이야? 진짜?’

리베리아 후작이 대마법사와 히나가 특별한 관계라고 했지만 루터는 절대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가 찾아가도 잘 만나주지 않는 것이 카신이었다.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인 리베리아 후작도 그를 거의 알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믿기진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루터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쉬웠지만, 아버지께서 어깨 펴고 당당하게 잘 지내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네 오라비와 같이 온 걸 보면 그래도 가족들과 많이 친해진 모양이야.”

카신의 시선이 잠시 루터에게 닿았다.

“네? 네, 네!”

히나의 어색한 대답 소리에 카신의 눈썹이 비스듬히 휘었다. 루터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도, 동생이 신세 졌다고 들었습니다!”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이었지만, 지금으로썬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히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루터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사실은 당신과 특별한 관계이자 동생이 된 히나를 괴롭혔고, 방금 전에는 절대 아는 체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어요.’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고 그냥 혼이 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동물적인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네? 아, 네!”

카신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쩍 대답을 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히나를 잘 부탁하마.”

히나와 어떻게 연락을 취했는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 궁금해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 루터가 가장 궁금한 건 카신이 이리 말하는 의도였다.

‘설마 내가 괴롭혔단 걸 알고 비꼬아서 말한 건가? 아니면 저것이 다들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거짓말을 한 건가?’

머릿속에서 히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한꺼번에 지나가고 있었다.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방금 히나가 리베리아 후작에 대해 말한 모습을 떠올리면 후자일 수도 있었다.

“기숙사로 안내해 주마.”

“안내해 줄 분이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내가 기숙사까지 안내해 주기로 했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신은 루터를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리베리아의 차남은 이만 남자 기숙사로 가는 게 좋겠군.”

“네…….”

카신은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있는 루터를 본척만척하고는 히나의 등을 감싸며 발을 움직였다.

루터가 신경 쓰이는지 히나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는 결코 돌아볼 빈틈을 만들지 않았다.

“어서 가야지. 기숙사 방을 배정받고 정리를 하려면 서둘러야 한단다.”

“네, 카신 님.”

아직 정식 마법사도 되지 않은 애송이한테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을 루터에게서 기숙사로 완전히 바꾼 그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걸음을 조금씩 늦췄다. 지금 이 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히나와 함께 갈 수 있는 범위는 여자 기숙사 본관 입구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이것도 깐깐한 기숙사 사감과 몇 번이고 싸운 끝에 얻어낸 쾌거였다.

수고에 비해 시간이 너무 적었지만, 그래도 반가워하는 히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히, 히나 피안 리베리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히나가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열세 쌍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그녀에게 몰렸다.

전설에 가까운 성적으로 6년 전 졸업했던 베라미도 관례에 따라 기초반의 수업을 듣고, 하급반으로 올라와 순차적으로 중급반을 지나 상급반을 거친 후 졸업했다.

들어왔을 때부터 교수들의 극찬이 이어질 만큼 유명했지만, 최소 기한인 5년을 채우고 졸업했다.

최소 한두 번은 떨어진다는 진급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베라미는 전설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히나는 그 세인트에 대놓고 특례 입학을 한 것도 모자라 처음부터 누구나가 동경하고 올라가고 싶어 하는 상급반에 들어왔다.

“루터, 리베리아라고 하는데? 네 친척이야?”

“꽤 귀엽게 생겼네.”

“근데 갑자기 특례 입학이라니. 그럼 네 형보다 능력이 더 뛰어나단 거야?”

“혹시 그건가? 갑자기 마력이 크게 발동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잖아!”

마법사 집안으로 유명한 리베리아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거기다 특례 입학까지 했으니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추측들이 오가고 있었다. 루터는 수줍은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는 히나를 보며 인상을 팍 썼다.

“귀엽기는 무슨! 그리고 친척 아니야!”

“왜 성질이야, 성질은.”

그래도 리베리안데! 어깨 펴고 다니라고 어제 아버지께 들어놓고는.

여러 추측성 질문을 무시한 채 루터는 턱을 괴고 히나를 응시했다. 이목이 집중될수록 좁아지는 어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러니 대마법사님과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못 믿은 거지.’

애초에 히나가 당당하게 행동했어도 믿지 않았을 루터는 모든 걸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자자, 조용! 오늘은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다.”

담당 교수인 에단이 교탁을 두드렸지만, 히나에게 쏠린 관심은 멈추지 않았다.

히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더 움츠렸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루터를 제외한 열두 쌍의 시선이 뒤통수에 닿고 있었다. 대부분이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급작스럽지만 오늘부터 제국의 대마법사 카신 K 로티우스 님께서 이곳 세인트의 교수님으로 오시게 됐다.”

히나에게 몰렸던 관심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잠깐의 정적이 교실 안을 맴돌았다.

그 안에서 가장 놀란 건 히나였다.

‘교수님이라고? 어제는 그런 말 없으셨는데…….’

어제 카신은 그녀를 기숙사까지만 데려다주고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갔다.

당연히 그가 안부차 온 거라 생각했다. 먼 거리까지 직접 행차한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설마 교수로 세인트에 왔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대마법사님이라니? 말도 안 돼.”

“에이, 장난이라면 이쯤 하세요, 교수님.”

“진짜로 오셨으면 내가 내 손에 장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던 야유가 멈췄다.

뚜벅뚜벅.

장신의 훤칠한 남자가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궁 마법사 옷을 입은 그는 무거운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모든 이목이 쏠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야, 너 대마법사님 본 적 있냐?”

“정말이야?”

“맞긴 맞는 거야?”

그가 입은 제복은 익숙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저렇게 화려한 황궁 마법사의 제복은 단 하나였다.

“그럼 설마 가짜겠냐?”

“가짜라는 게 더 믿기겠다.”

감히 황실학교인 세인트에서 제국의 마법사를 대놓고 사칭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하지만 차라리 그 말이 더 믿겨졌다. 황궁의 정식적인 요청에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카신이 교수로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교탁 앞에 온 카신이 학생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가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압도적인 분위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될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굳이 마법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카신은 분위기만으로 자신이 대마법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름은 카신 K 로티우스.”

느긋하면서도 거만한 목소리에 주변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아니더라도 평온하면서도 위험스러운 카신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학생들은 찰나의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마법사였다.

“편하게 로티우스 교수라고 부르면 되네. 궁금한 점은?”

참으로 가벼운 어투로 쉽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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