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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29화 (29/128)

#29.

루터는 그 누구보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히나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카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히나 때문일 것이다. 정작 히나도 몰랐던 것 같긴 하지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 만나길 싫어하고, 별궁 밖으로 나오는 건 더 기피하는 대마법사가 세인트까지 교수로 친히 올 리가 없었다.

“저, 저요!”

카신의 말 한마디가 몰고 온 정적 사이로 용기 있는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하게.”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대답에 성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손을 든 학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정말 대마법사님이 맞으신 건가요?”

본인을 앞에 두고 하는 터무니없는 질문이었지만, 교실에 있는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심지어 세인트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있었던 에단도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

압도적인 위압감이나 분위기는 대마법사가 확실했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건 세상에 대마법사 하나뿐이리라.

하지만 눈으로 확인했어도 본인에게 직접 답을 듣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였다.

“믿지 못하겠다면?”

“네, 네?”

“자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나가도 좋네.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꽤 귀찮거든.”

성의 없지만, 멋있다.

그 어떤 대답을 했어도 학생들은 수긍을 한 채 눈을 반짝였을 것이다. 어제의 충격을 그나마 다스리고 온 루터는 눈에서 빛이 나는 학생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정말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까?’

루터는 걱정스런 얼굴로 아직도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자그마한 뒤통수를 응시했다.

앞날이 까마득했다.

“그럼 난 그만 가보겠네. 조금 이따 수업 시간에 보지.”

카신은 간단한 소개를 마치자마자 누가 잡을 새도 없이 교실을 나갔다. 담당 교수인 에단보다도 더 먼저.

당황한 에단이 평소 진중한 모습을 버린 채 카신의 뒤를 쫓아간 것도 학생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마법사 카신이 왔다 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너…… 나 좀 봐.”

어제 충격을 한 번 받아서인지 그나마 루터는 멀쩡할 수 있었다. 루터는 다른 학생들이 멍하니 카신이 나간 자리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히나에게 다가갔다.

다른 학생들처럼 살며시 입을 벌리며 문을 보고 있던 히나가 루터를 보자마자 뒤늦게 입술을 재깍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처량했다.

“네, 오라버…….”

“그렇게 부르지 마!”

“하지만 그럼 따로 부를 호칭이 없는걸요.”

“그냥 모른 척하라고! 밖에서도 그리 부를 셈이야?”

루터의 머릿속에 어제 히나와 나눴던 대화가 지나갔다. 그는 호기심에 따갑게 몰리기 시작하는 몇몇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히나를 재촉했다.

“어서.”

“아…… 네.”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뒤에서 얼떨결에 끌려오는 히나가 느껴졌지만, 그는 오히려 빠르게 걸었다.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루터는 지금 아주 급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괜히 이상한 구설에 오르는 건 질색이었다.

달칵.

“이,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아파요.”

“아, 미안!”

빈 교실에 들어와 문까지 걸어 잠그고 나서야 루터는 뒤돌아 히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픈지 살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히나를 보고 다급히 손목을 놓아주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괘, 괜찮아요.”

빨갛게 부어오르는 손목이 보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더 당황한 채 괜찮다고 말하는 히나를 보니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히나의 존재 자체가 싫었지만, 그건 갑자기 생긴 가족에 대한 반발일 뿐이었다.

특히나 죽어라 노력해도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세인트에, 그것도 상급반에 특혜를 받고 바로 들어온 것이 싫었다.

딱히 히나에 대한 악감정이라기보단 그녀가 갑자기 끼어든 것에 화가 난 거였다. 불만을 표출하긴 했지만 함부로 상처를 주거나 못살게 괴롭히려던 건 아니었다.

“그, 그런데 여기서 아는 체하지 말라고…….”

“그건 취소야, 취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치는 루터를 보며 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너! 아버지가 어깨 당당히 펴라고 했잖아!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셈이야?”

“그건…….”

“그, 그리고!”

루터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얼핏 본 귓가가 붉었다.

“나한테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좋아.”

“정말요?”

울적했던 히나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루터는 그 사소한 한마디에도 눈을 반짝이는 히나에게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비겁했다. 대마법사가 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마음이 이리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스스로에 대한 비겁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 그래! 그리고…….”

하필이면 정말 대마법사가…….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한 리베리아에서 루터는 너무 평범했다.

그나마 장자인 베라미가 그 이상을 해주고 있으니, 리베리아 후작 부부도 차남인 루터를 딱히 나무라진 않았다. 오히려 실망한 티를 감추며 위안을 해주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해줬다. 하지만 루터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강한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채우고자 인내했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세상엔 노력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닫고 좌절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마력이 부족하고 마법 재능이 없다면 지식이라도 익힐 셈으로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마법사에 대한 공부도 했다.

‘그분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평생에 나올까 말까 하는 재능과 마력, 육체를 가지신 분이야.’

과거의 재앙이나 전쟁이 기록된 역사서에 대마법사는 항상 언급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 어느 일이든 믿을 수 없는 마법으로 아주 쉽게, 순식간에 해결했다.

루터에게 대마법사는 순식간에 동경의 대상이 됐다. 대마법사에 대한 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역사책을 다 찾아보았다. 황궁 마법사단에 있는 형이나 아버지한테 여러 번 물어보기도 했다.

“……대마법사께서도 알아?”

우상이었다. 별궁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 긴 세월 동안 살아온 것에 비해 업적은 아주 적었지만, 하나하나가 대단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코 늙지 않았고, 다른 마법사들은 생각지도 못한 기적과도 같은 마법만 부렸다.

마법이 간절한 루터에게 절대적인 대마법사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존재였다. 우상에게 결코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힐난하고 질책해도 카신에게만큼은 잘 보이고 싶었다.

“뭘 말이에요?”

“내, 내가 너한테 했던 짓……. 그러니까 난 갑자기 동생이 생긴다니까 짜증도 나고 해서……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대답을 찾고 있는지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모습이 답답했다.

“마, 막 내가 식사할 때 했던 말이나 날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던 거! 그런 거 말했냐고!”

“아! 카신 님께는…… 가족들이 아주 잘해주셨다고 했어요.”

히나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카신 님이 걱정하는 건 싫어서……. 제게 가족이 생겼다고 같이 기뻐해 주셨거든요.”

작은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루터는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 이건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죄책감에 숨이 막힌 거였다.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면서, 혼날까 봐 눈치를 보는 히나를 보니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

“너…… 정말 가족이 되려고 우리 집에 온 거야?”

황제와 어쩌다가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귀족 신분을 갖고 싶어 적당한 집안에 양녀가 되게 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한 줄 알았다. 목적을 갖고 온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싫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거 아니냐고.”

“어떤 목적이요?”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또다시 답변을 찾기 위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루터는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맑고 순한 눈동자는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았다. 히나에게 윽박지르고 소리치는 자신의 모습이 여간 한심한 게 아니었다.

“지위랑 권력을 이용해서 세인트를 졸업하고 싶다거나 무슨 힘을 갖고 싶어서 온 게 아니냐고 묻는 거야.”

말을 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역시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당황한 히나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아니에요! 가족이 없어서 슬퍼하는 절 가엽게 여기신 폐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제게 가족을 만들어주신 것뿐이에요!”

어쩌면 많은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아직도 갑작스럽게 생긴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루터는 생각보다도 히나에게 큰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알겠어. 그럼…….”

지금도 갑자기 생긴 동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동생이 됐다. 앞으로도 그녀는 리베리아란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무조건 피하고 거부하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조금은 노력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갑자기 네 오라버니 역할을 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노력해 볼게.”

히나는 루터가 내민 손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야! 안 잡아? 그, 그러니까, 내 말은 가족이 없어서 슬프다며. 내가 가족 비슷한 게 되도록 노력해 볼게.”

움찔 놀라는 히나를 보며 루터는 민망함에 다른 손으로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저, 정말인가요?”

“그, 그래!”

어쩌면 조금은 귀여울지도.

맞닿는 작은 손이 꽤 따뜻했다.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대신 대마법사님께 나에 대해서 잘 말해야 돼! 알겠어?”

“네, 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누는 온기에 히나는 기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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