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우아한 자태로 인사를 올린 세이나를 보며 루이스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로군. 아, 얘기는 들었겠지? 저녁 만찬에 대마법사인 카신 K 로티우스가 함께하게 됐다네. 그래도 제국의 가장 큰 두 세력인데, 이참에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겠나.”
“대신녀님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루이스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카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세이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분명 카신이 맞았다.
황태자 시절부터 매해 대신녀가 올 때마다 그토록 불렀지만, 카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궁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겠거니 했는데, 어쩐 일인지 카신이 먼저 그를 찾아왔다.
“대신녀께서는 어디에 머물죠? 같이 식사를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처음에 루이스는 자신의 귀가 이상해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묻고, 또 들어도 카신은 대신녀와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저야말로 대마법사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카신만큼이나 감정의 고조가 없는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는 세이나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오랜 여정에 지쳤을 텐데, 맛있게 들게나.”
“감사합니다, 폐하.”
카신은 다소곳이 인사를 하며 식사를 하는 세이나를 관찰했다. 처음 보는 분위기의 여자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기도 했다.
식사 내내 대부분 루이스가 신전의 안부와 순례에 대해 물었고, 세이나는 조용히 대답하기만 했다.
루이스가 묻는 말에도 짤막하게 답하며 그저 가만히 세이나만 응시하고 있던 카신은 식사가 끝나고 티타임이 시작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혹시…… 저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 한 번 없었던 세이나의 입매 끝이 살짝 올라갔다.
“하하. 카신, 자네 혹시 관심이 있는 건가? 하지만 세이나는 대신녀네. 혼인을 할 수 없는 몸이지 않아?”
희미한 미소만 보일 뿐, 말을 아끼고 있는 세이나 대신 루이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관심이라면 있습니다.”
소리 내어 웃던 루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카신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절대 사람을 피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피했다면 그 이유는 무조건적으로 귀찮아서였다.
하지만 카신은 유일하게 대신전 사람들과의 자리를 피했다. 특히나 순례 때는 별궁에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몇 겹의 보호막을 치고 식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신전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다.
“자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카신은 대신전 얘기만 나와도 질색을 했다. 과거에는 대신전의 순례 때마다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황실 기록에 의하면 대마법사는 최근 백 년 동안 신전의 그 누구와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히나에게 보이던 호감이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루이스는 카신의 기분이 최악을 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걸 귀찮아하지만, 그래도 카신은 싫다는 이유로 분위기를 망치거나 자리를 파하게 만들진 않았다.
그는 오래된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부드러움으로 은근슬쩍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그런 그가 노골적으로 세이나를 경계하는 모습이 루이스는 의아했다.
“그건…… 오늘 행렬에서 눈이 마주친 일을 말하시는 건가요?”
탁.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세이나가 물었다. 인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 마주치지 않았던 세이나의 서늘한 시선이 카신에게 닿았다.
“대마법사님께서는 듣던 것과 달리 꽤 짓궂으시더군요. 이리 식사 자리를 함께할 거라면 굳이 그때 제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신력이 강하면 머리카락 색이 연하게 변한다고 했던가.
연붉은 빛깔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마치 예쁘게 잘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신녀 고유의 신성한 기운은 소문처럼 여태 만난 대신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아무리 스쳐 지나갔다고 한들 이렇게 인상이 강한 여자를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대신녀 세이나와의 대면은 분명 처음이었다. 한데 어째서 낯이 익은 걸까. 아무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행렬에서의 제 무례에 대해선 사과드리지요. 잠시 다른 사람과 착각을 했습니다.”
루이스는 삭막해진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절대 싸움과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이런 분위기를 내니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려웠다.
“그보다도 오늘은 대신녀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말씀하세요.”
냉랭해도 너무 냉랭했다. 루이스는 필요할 땐 절대 나오지 않다가 괜히 나타나서 이런 분위기를 만든 카신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늘 카신은 여태 본 모습 중에 제일 그답지 않았다.
“괜찮다면 대신녀님의 신력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싶습니다.”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루이스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카신을 나무랐다. 세이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의에 놀란 눈치였다.
“신력을 직접 보고 싶다니……!”
필요에 의해 남발하는 마력과 달리 신력은 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었다. 신을 대신하여 생명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힘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보여달라고 해서 마구 보여줄 순 없는 거였다.
상대는 다른 신녀도 아닌 세이나였다. 신전에서는 신이 만든 신력 인형이라고도 불리는 세이나는 공과 사에 철저했다. 그녀는 남을 도우며 평생을 살았으나, 개인적인 일에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허 참, 자네 도대체 오늘 왜 이러는 건가? 변명이라도 좀 해보게.”
답답한 루이스와 달리 카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답을 구하듯 물끄러미 세이나를 보고 있었다.
“저와 대마법사님은 상성에 맞지 않는 걸로 압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이나는 티도 나지 않는 마법을 눈치챌 만큼 감이 좋았다.
그의 힘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진 않았다. 하지만 세이나는 그의 힘의 본질을 너무 빨리 알아차렸다. 그가 제대로 마법을 쓰는 건 보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전혀 예상에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보여달라는 겁니다.”
“기분이 꽤 나쁘실 텐데요.”
언제부터 알았지? 그녀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끝까지 본심을 감출 수 있는 자는 드물었다. 카신은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은 세이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을 만났다.
“좋습니다.”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루이스의 생각과는 달리 고저 없는 목소리는 긍정의 답변을 꺼냈다.
“폭우가 내릴 때, 대마법사님께 신세를 졌습니다. 단순히 힘을 보여주는 정도라면 충분히 들어드리죠.”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드높은 대신녀를 상대로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이나는 너무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카신은 한쪽 눈썹을 휘며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폐하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섭니다. 제 신력은 그때 처음 써야 하는 게 맞겠지요. 급하신 게 아니라면 그 후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신녀님.”
“별말씀을요.”
그 후로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 카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이나가 물러갈 때까지.
“자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세이나가 나가자마자 루이스는 참았던 화를 쏟아냈다.
“대신전이 어떤 곳인지는 모를 리도 없고, 어쩌자고 그런 부탁을 한 건가? 내가 아는 카신이 맞기는 하나?”
“알아볼 것이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루이스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지만, 속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이 올라왔다.
“도대체 알아볼 게 뭐길래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 카신은 꽉 막힌 대신들보다도 더했다.
“나쁘게 끝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만 화를 푸시죠, 폐하.”
“어떻게 자네는 그리도 태연할 수 있지?”
“만약 이번 일로 싸움이 일어나도 전 폐하의 편에 설 것이니, 걱정하진 마십시오.”
“하.”
기가 찬 얼굴을 한 루이스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때에 들었으면 이런 말을 한 카신에게 고맙다며 든든해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망설이지 않고 카신을 선택하겠지만, 그렇다고 대신전을 적으로 돌릴 순 없었다.
“그보다 폐하께서는 방금 나간 대신녀를 오래 봐오셨겠죠.”
“정말 대신녀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관찰해 보았지만, 카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식사 때부터 끈덕지게 세이나를 쳐다보던 시선부터가 이상했다. 낮에 행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신은 확실히 세이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세이나가 대신녀인 건 알고 있는 게지?”
설마.
그렇게 되면 정말 대신전을 적으로 돌려야 했다. 거기다 카신까지 잃을 수도 있다. 그리되면 제국은 건국 이후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물어보는 거라면 전혀 없습니다.”
“하아.”
최악의 결말까지 생각했던 루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리쉬었다.
“그래,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세이나는 절대 안 되지.”
“저 신녀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소문도 못 들어봤나?”
신전과의 교류 자체를 피해온 카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세이나의 신력은 열일곱에 나타났네. 그리고 정확히 일 년 후, 신성 의식이 끝나고 대신녀의 자리에 올랐지.”
시골에 있는 한 소녀에게서 갑자기 흘러나온 신력은 위대했다. 이제 막 탄생한 일개 신녀를 위해 당시의 가장 높은 대신녀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
마법과 달리 유전적인 요인을 전혀 받지 않는 신력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신관과 신녀들이 여러 장소를 순례하는 이유는 신력을 가진 이들을 찾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대신녀 자리는 꽤 긴 수련과 기도를 통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신녀가 되기 위한 신성 의식은 일 년이 아니라 6개월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신녀가 되려면 그간 살아오면서 몸에 묻은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야 했다. 그 의미로 이제 막 신녀가 된 자들은 6개월간 신성 의식을 지낸다.
“듣기론 세이나는 신녀가 되는 6개월 동안의 신성 의식에서 한 번 도망갔다고 하더군.”
지겹고도 긴 신성 의식에서 도망가는 신녀는 많았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신력을 완벽하게 다스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나 처음 발현되는 엄청난 신력은 절대 감출 수 없는 힘이었다.
제아무리 잘 도망간들 마구잡이로 방출되는 신력 때문에 금방 잡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들은 도망이 소용없다는 걸 몸소 깨달으며 포기하고 다시 신성 의식을 치렀다. 세이나도 신성 의식 중 도망갔다가 포기하고 신녀가 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신성 의식에서 도망가는 일은 자주 발생되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일주일을 남기고 도망간 건 확실히 이상했지.”
“일주일? 어째서 다 끝나갈 때 도망을 간 거죠?”
처음부터 세이나의 신력은 남달랐다. 추후에 그녀가 대신전의 기둥이 될 걸 예상한 당시 신녀들은 치부가 될 그 일을 무조건 숨기려 들었다. 보수적인 대신전에서 워낙 쉬쉬했던 일이기 때문에 황태자였던 루이스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네.”
금방 붙잡힌 세이나는 그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신성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신녀가 되고 얼마 있지 않아 바로 대신녀 자리에 올랐다.
세이나는 한때 도망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대신녀 역할을 해냈다. 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알고 있는 건, 처음부터 엄청난 신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밖에 없지.”
대부분 성스러운 신전 근처에서 신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지만, 세이나는 전혀 관계도 없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곳에서는 신력을 갖고 있다고 한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세이나의 신력은 신전의 발걸음이 없는 지역임에도 눈에 띌 정도로 강대했다. 인맥은커녕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시골 소녀가 대신전에 오자마자 바로 대신녀가 된 건 순전히 그녀의 능력 하나 때문이었다.
“보통 신녀가 발견되면 그 근처의 신전으로 가는 것이 관례지만, 세이나를 예외로 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어린 나이에 가족들은 물론 살던 마을까지 모두 버리고 대신전의 대신녀가 되었으니, 많이 힘들었을 게야.”
여린 마음을 가진 어린 소녀가 한순간 겁을 먹고 흐려진 판단에 몸을 맡겼다. 그것 말고는 그녀의 도망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린 황태자 시절, 처음 본 세이나는 지금과 달리 순하고 착한 인상이었다. 당시 산책을 나왔던 루이스는 슬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달빛 아래에서 보았던 아련한 눈동자는 무척이나 가련하면서도 숭고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래도 뭐, 보다시피 금방 적응하더군. 높아지는 신력만큼이나 마음이 견고해진 거겠지.”
카신이 가까이할 수 없는 독보적이고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라면, 세이나는 아름답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요정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아마 자네가 저번 폭우를 막아줄 때 근처에 있었나 보군. 매번 힘든 길로 다니니, 폭우가 내렸다면 이동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그때 자네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야.”
“그렇군요.”
폭우가 내릴 때라.
형식적인 대답을 하며 카신은 세이나를 떠올렸다. 감정 없는 눈동자와 싸늘한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것도 무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