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40화 (40/128)

#40.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는 기척을 따로 느끼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들어오거라.”

살며시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히나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누가 볼세라 후다닥 들어왔다.

히나는 그의 연구실을 찾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부득이도 노력했다. 먼저 찾아오는 일은 무척 드물었지만, 그래도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쏙 들어오는 그녀를 보면 기다리는 보람이 꽤 있었다.

“계셨네요?”

히나가 언제 올지 모르니 카신은 별궁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았다. 그녀는 모르고 있지만, 카신은 계속 세인트의 연구실에서 살고 있었다. 소음이 들어오지 않도록 결계를 몇 겹으로 쳐 둔 채 말이다.

“어쩐 일이니?”

오늘은 제국을 위해 대신녀가 축복 기도를 올리는 날이었다. 때문에 세인트도 수업이 없었고, 성 밖의 사람들도 전부 다 일을 쉰 채 축복 기도를 구경하러 갔다.

어제 히나도 이른 아침부터 구경을 간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당연히 히나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머물고 있었던 카신은 히나의 방문에 의외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분명 구경을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신전 얘기를 하며 눈을 빛냈으니, 축복 기도가 열린 광장에 끝까지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히나가 같이 가고 싶은 눈치를 보이긴 했지만, 카신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을 차마 갈 수가 없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눈으로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를 외면하느라 마음이 꽤 쓰렸다.

“벌써 갔다 왔는걸요! 끝나자마자 여기 온 거예요.”

“구경은 제대로 했니?”

“너무 늦게 가서 광장에도 겨우 들어갔어요. 대신녀님 얼굴을 가까이서 꼭 보고 싶었는데…….”

매해 대신녀의 기도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그걸 몰랐던 히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인파에 밀리다가 왔으리라.

히나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신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실망했겠구나.”

“그래도 좋은 점도 있었어요.”

자랑하고 싶어요.

히나의 얼굴에 그리 쓰여 있었다. 작은 것에도 큰 감동을 받는 히나는 그때의 기쁨을 줄줄이 나열하여 감정을 같이 공유하는 걸 좋아했다. 아마 이번에도 축복 기도를 보고 온 걸 설명하며 좋았던 감정을 함께 느끼고 싶어 온 것이리라.

“대신 이렇게 일찍 나와서 늦지 않게 카신 님을 뵈러 올 수 있었잖아요.”

발그레한 볼이 참 예뻤다. 붉은 기가 맴도는 히나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카신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기도가 끝나면 대신녀가 직접 찾아오겠다고 서신을 보내왔다. 수많은 인파로 광장은 분잡하겠지만, 그녀는 아마 다른 통로로 몰래 빠져나와 여기까지 올 것이다.

아쉽게도 그때는 히나를 돌려보내야 했다. 하필 약속 시각을 축복 기도 직후로 잡은 것이 후회되었다. 히나의 힘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 예쁜 빛이었어요. 막 하늘 위로 하얀빛이 펑펑 펼쳐지는데, 멀리서도 정말 멋졌어요! 카신 님도 같이 봤으면 정말 정말 좋았을 텐데.”

널찍한 책상을 사이에 둔 채 히나가 춤을 추듯이 그때의 상황을 몸으로 그리고 있었다. 큰 빛을 연상시키듯, 허공에서 가녀린 두 팔로 큰 무언가를 그리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깐.’

여러 감정을 얼굴로 보여주는 히나에게서 문뜩 세이나의 얼굴이 보였다. 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히나가 축복 기도를 올리는 대신녀에 대한 말을 해서 연상한 게 아니다. 대신녀처럼 흉내를 내서도 아니었다.

전혀 닮은 것이 없지만, 갑자기 세이나와 히나가 겹쳐 보였다. 그것도 갑자기.

“행진 때 봤던 대신녀님은 엄청 작고 가녀려 보였는데, 그런 힘을 내시다니 대단해요!”

신이 나서 말하는 히나에게 처음으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카신의 눈은 히나를 보고 있으나,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폭우가 내릴 때, 대마법사님께 신세를 졌습니다.”

폭우. 어쩐지 세이나가 말한 폭우는 얼마 전 일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만나지도 않은 낯선 여자가 폭우 때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로서도 최근의 폭우 외에는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얼마 전 폭우라고 확신했다.

‘그 폭우 때 히나를 처음 봤었지.’

비를 맞아 더 붉은 기를 내던 젖은 머리카락과 유독 하얬던 피부.

‘폭우라. 그러고 보니…….’

무언가가 생각날 듯, 말 듯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히나에게서 흘러나온 빛 때문에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는 언젠가 폭우 때 히나와 비슷한 몰골의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상황은 무척 달랐지만 말이다.

‘비슷해.’

그때의 상황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폭우를 떠올리며 연상된 여자가 언뜻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크고 따뜻한 빛이 번지는데 마음이 굉장히 편해지는…….”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세이나? 히나?

누구 한 명 꼽을 수가 없었다. 세이나와 히나는 너무나도 다른데, 그 둘을 비교하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것에 제대로 답을 내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히나.”

장황하게 묘사하던 히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카신을 쳐다보았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든 얘기를 들어주던 카신이 오늘따라 이상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단다. 얘기는 조금 이따가 해도 될까?”

“네? 아, 네!”

“미안하구나. 내가 나중에 찾아가마.”

갑자기 날카롭게 변한 카신의 시선이 히나를 넘어 그녀가 들어온 문에 머물렀다. 아니, 정확히는 문밖에 있는 세이나를 향해 있었다.

세이나가 기척을 거의 내지 않고 온 것도 있었지만, 답지 않게 그가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 있었다. 그녀가 문 앞에 올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렴. 공간이동 마법을 걸어주마.”

똑똑.

조심스런 노크 소리. 한번 매치를 시키자, 한도 끝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이건만 어쩐지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마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손님이…….”

작은 노크 소리에 히나의 눈이 커졌다. 카신은 빠른 걸음으로 히나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문이 열렸다.

“손님이 계셨군요.”

카신이 히나에게 가는 것보다도 문이 열리며 세이나가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카신은 본능적으로 빠르게 움직여 히나를 등 뒤로 감췄다.

“연구실 주변으로 결계가 쳐져 있어 손님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저 얘기하시죠.”

감정 없는 눈동자와 조근조근한 목소리.

“죄, 죄송해요! 선약이 있으신 줄 모르고……. 전 그만 돌아가 볼게요!”

갑자기 들어온 세이나에 놀란 히나가 어쩔 줄을 모른 채 카신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

나가려던 히나는 그 앞에 서 있는 세이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찾아온다는 손님이 세이나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 정말 나가려고…….”

우왕좌왕하는 히나보다도 혼란스러운 건 카신이었다.

카신은 뒤늦게 히나를 세이나에게 보인 걸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 일인지 세이나에게는 히나를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히나, 이동 마법을 걸어줄게. 이만 돌아가렴.”

“아, 가, 감사합…….”

위잉―

감사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와 함께 히나의 몸이 투명해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그는 급했다.

“방금 그 아이, 이름이…….”

항상 담담하던 세이나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세이나가 다소 진정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신력이라면 다음에 보여 드리도록 하겠……!”

휙!

본능과도 가까운 행동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카신은 세이나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카신은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역시 어디서 만난 적이 있어.”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넘겨 버렸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세이나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감정의 고저가 없었던 어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다르니 기억하지 못할 수밖에.”

그리고 아주 오래전 마주쳤던 그녀와도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손 놓아주세요.”

“확실히, 내가 폭우 때 도움을 줬었지.”

폭우가 쏟아지던 날, 카신은 세이나를 만났다.

“안 그렇습니까, 대신녀님?”

“어서 놓아달라 했습니다.”

딱딱한 목소리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당황스러워하는지가 보였다. 실수 한 번 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대신녀는 지금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대신녀께서도 참 짓궂군요. 절 알면서도 그렇게 모른 척하셨다니. 그렇게 절 놀리시니 저 역시 심술이 납니다.”

세이나가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저항도 멈췄다. 그녀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살포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대신녀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카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부터 천천히 듣고 싶군요. 물론,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연구실 주변으로 강력한 보호 결계가 쳐졌다. 결계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걸 모두 듣겠다는 카신의 의지가 강력하게 드러났다.

카신은 과거의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대신녀가 되기 전의 세이나는 지금과는 무척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신은 과거의 그녀를 떠올리며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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