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진흙 더미에 파묻히다 나온 것 같은 지저분한 물골, 자잘한 상처에서 나는 피 냄새. 하지만 그보다도 더 불쾌했던 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분 나쁠 정도로 강력한 신력이었다.
“끝까지 모를 뻔했군.”
슬픔에 찬 눈동자와 앳된 얼굴의 여자는 그 누구보다도 절박했었다. 여태 본 그 어떤 인간보다도 아주 강한 감정을 드러냈던 그녀는 카신의 뇌리에도 강하게 박혔다. 그럼에도 지금의 세이나와 매치시키지 못한 건 분위기부터 표정까지 모든 게 달라서였다.
너무 달라서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때의 세이나를 데려와 옆에 두고 비교한들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제 그만 절 놓아주세요.”
진정을 한 것인지 다소 냉정해진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파지직!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카신은 세이나를 붙잡고 있는 팔에서 흘러나오는 신성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잡고 있는 손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주위에서 감지하지 못할 만큼의 작은 신력으로 그녀는 그를 최대한 위협하고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았던, 이리저리 신력이 불안하게 삐져나왔던 그때와 달랐다. 지금의 세이나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의 정도를 유추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신력을 노련하게 숨기고 방출하며 자유자재로 다뤘다.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치이이익!
그의 몸과 상성에 맞지 않는 힘이 부딪혔다. 손바닥이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카신은 오히려 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읏…….”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힘에 세이나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신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아까 그 아이…… 봤겠지?”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의 세이나. 그리고 품에 안고 있던 갓난아이.
지금의 세이나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봤던 세이나와 히나는 비슷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바라지만…….”
시선까지 피하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도 얼핏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다. 공통점이 전혀 없는, 다른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비슷한 점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러기엔 너무 비슷해서.”
히나에게서 본 힘은 고작 두 번, 그것도 아주 짧게 흘러나온 빛이었다. 처음 보는 종류의 힘이었지만, 어딘가 낯이 익다고 계속 생각했었다.
“그때 아이에게 주던 힘, 다시 보여줬으면 하는데…….”
그 힘의 본질을 본 적 있으니 비슷할 수밖에 없으리라. 추측이 맞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에겐 더 확실히 할 확증이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끝까지 확인하여 추측을 부정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휘익.
세찬 바람이 주변을 둘러쌌다. 카신의 손짓에 연구실 주위로 견고한 결계가 몇 겹 더 쳐졌다.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에 무작정 거부만 하던 세이나가 결국 힘을 뺐다.
도망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모습에 카신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픈 것인지 세이나가 다른 손으로 붉게 손자국이 난 손목을 잠시 문질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최근에도 비슷한 힘을 봤거든.”
“제 신력으로 뭘 알고 싶은 거죠?”
“알고 있지 않나?”
세이나는 카신을 경계한 채 물었다. 카신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는 대마법사였다. 아무리 강력한 신력을 노련하게 다룰 수 있다고 해도 단단히 마음먹은 그를 이길 리 없었다.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과거였다. 아직도 손안에 있는 작은 생명체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녀리고 여린 그 아이의 온기가.
아직 본격적인 얘기도 꺼내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피곤했다. 세이나는 연구실 중앙에 있는 접대용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저도 한 가지 묻죠.”
상성이 맞지 않는 힘이라고 해도 잠깐의 힘을 보인 대마법사는 확실히 독보적으로 강했다. 도망가지 못한다면 손해 보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궁금한 건 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 그 아이의 이름이 히나인가요?”
그립고 아련한 이름. 반드시 행복해야 할 히나.
그날 이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끄집어낸 이름이었다. 이름을 한 번 부른 것만으로도 입에 모래를 잔뜩 물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히나를 부르며 그리워할 자격도 없어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평생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수도는 근처에도 오지 않았고, 일부러 외진 지역만 돌아다녔다. 만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만나길 바랐다. 매해 수도에 축복 기도를 하러 올 때마다 히나의 나이를 계산하며 무의식적으로 그녀 또래의 여자아이를 찾았다. 만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며 머릿속으로 히나가 성장한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아주 행복해 보이더군요.”
말간 미소를 짓던 천진한 얼굴은 어린 시절의 누군가를 떠올릴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안도감과 함께 죄책감이 퍼져 갔다.
“내가 옆에 있는데, 당연하지.”
상상했던 대로 세이나는 히나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히나를 알아본 건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과 닮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를 알아본 건 그토록 거부하고 원망했던 신력 덕이었다.
세이나는 히나를 단번에 알아보며 처음으로 자신에게 신력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녀에게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면 몰라볼 정도로 예쁘고 곱게 컸다.
“대신녀의 기도 따위가 아니더라도 히나는 나로 인해 충분히 행복해.”
아마 히나에게서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옆에 지나가도 몰라봤으리라. 오히려 불길한 힘을 가진 대마법사와 함께 있는 아이니, 똑같이 불길하다 여기며 피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까지 미치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나도 한 가지 묻지.”
카신은 눈을 감은 채 이 상황을 견디려 하는 세이나의 맞은편에 편히 앉았다.
“히나는 누구지?”
그녀의 긴 속눈썹이 살며시 올라갔다. 감정이 없을 것 같았던 눈동자는 아주 큰 슬픔을 그려내고 있었다.
“히나는 제 아이입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
다르지만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세이나는 그때도, 지금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카신에게 모든 걸 보이고, 털어놓았다.
“신성 의식을 치르며 품고 있던 아이죠.”
“그게 의식을 마치기 일주일 전 도망간 이유였나?”
“신녀에게 아이는 금기나 다름없죠. 그때도, 지금도.”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래서 더 구슬펐다. 감정을 감춘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심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카신도 돌돌 감싼 천 사이로 작은 생명체가 있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자신이 가리킨 저택 앞에 버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친 것도.
세이나는 그녀를 쫓던 무리를 아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따돌렸다. 아마 그리 길게 도망가지 못했을 테니, 그 후로 바로 잡혀 신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제 이름을 주었지요. 제게 있었을 때부터 그 아이의 이름은 히나였습니다.”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군.”
“그럼에도 용케 알아보셨군요.”
히나의 힘을 봤을 때 느꼈던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똑같은 빛임에도 불쾌감이 감돌던 세이나의 신력과 달리 히나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은 그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비슷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세이나와 히나처럼 두 사람에게 흘러나오는 빛의 느낌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히나의 힘에서 세이나를 기억하지 못한 이유는 신력 특유의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히나에게서 두 번의 빛을 봤네. 그쪽의 신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지.”
과거를 회상하며 세이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지난날들이 그녀의 눈에 스쳐 지나갔다.
“품 안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히나를 위한 기도를 한 번도 쉬지 않았습니다. 신력과 함께 축복이 몸 안에 머무른 모양이군요.”
사상 최고의 대신녀란 칭호와 달리 세이나는 불순하기 짝이 없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외지까지 찾아갈 정도로 적극적으로 했던 치료 순례와 축복 기도는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다. 그건 모두 히나를 위한 거였다.
“아이를 품으며 행복하길 빌었습니다. 소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아이가 되라고, 매일같이 바랐습니다.”
사람들은 대신녀 세이나가 절대 개인적으로 신력을 허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힘을 철저히 이용했다. 신력이 발현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한 번도 신을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제 모든 것을 받고 자란 아이입니다. 지금도 말이지요.”
히나에게 탈진에 이를 만큼 막대한 신력을 쏟아부었다. 거기다 비록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사상 최고의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대신녀의 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받았다.
“풍족한 생활은 하지 못할망정 굶어 죽거나 역병에 걸리지 않게, 어디서든 항상 건강하게 자라달라 기도했습니다.”
애초에 세찬 폭우가 쏟아지는 날 그 모진 고생을 했음에도 어디 하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란 건 모두 그녀의 강대했던 신력 덕분이었다. 그녀의 신력이 다른 형태로 히나의 몸 안에 남아 있다 한들 이상할 건 아니었다. 아니, 남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제 기도는 신을 위한 게 아닌 오로지 히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언제나 아이의 축복,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세이나는 역병이 도는 마을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며 히나가 이런 끔찍한 병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 기도했다. 황폐해질 대로 처참한 마을에 갔을 때는 히나가 가난에 배를 곯지 않게 해달라 빌었다. 축복을 내려달라는 기원을 할 때도 그 행복이 히나에게 가길 바랐다.
“제 기도는 항상 히나에게 닿아 있지요.”
그녀는 대신녀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았다. 신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고, 항상 자신의 이기심으로 신력을 이용했다.
“그 죗값을 받아도, 세상 모든 불행을 짊어져도 상관없습니다. 히나만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세이나는 세상의 모든 불행과 바꿔서라도 히나가 행복하길 바랐다.
“하, 대신전에서 들으면 기겁할 일이겠군.”
“처음부터 신녀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내뱉은 속내에 긴장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고해성사를 한 것처럼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신력은 유전되는 게 아닙니다. 아마 히나가 가지고 있다는 그 힘은 신력으로 만든, 축복에 가까운 빛이겠지요.”
“그래서 불쾌하지 않았다는 건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골머리를 썩였던 것과 달리 너무나도 쉽게 나온 대답에 카신은 허탈하게 웃었다.
히나에게서 흘러나온 빛은 그가 마법을 쓸 때 나온다는 추측은 맞았다. 정확히는 그가 불행을 상징하기도 하는 어둠의 힘을 쓸 때 나오는 축복의 빛이었다.
“축복은 행복을 기원하는 힘입니다. 그 빛의 근본이 신력이라 해도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는 힘이 누군가를 해할 수는 없겠죠. 설사 맞닿은 힘이 어둠의 힘이라도 말입니다.”
세이나는 카신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던 히나를 떠올렸다. 그녀에게선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응축된 축복의 힘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오랜 시간 준 힘을 한눈에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대마법사께서 쓰시는 힘의 매개체가 어둠이라고 한들 그 빛은 상대의 행복까지 바랄 겁니다.”
모든 의문이 풀렸다. 카신은 느긋한 얼굴로 세이나를 응시했다.
“내 힘의 근본이 어둠이란 걸 잘도 알았군.”
힘을 들켜도 상관없었다. 여태 대신녀 중 그의 힘을 눈치챈 사람은 세이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 그 힘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세이나를 만난 날은 수도에서 열리는 축복 기도를 피해 오랜 친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퍼붓는 폭우로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카신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새벽에 빗길을 거닐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정돈되지 않았던 신력을 내뿜는 세이나를 만났다.
기분 나쁠 만큼 신력을 흘리고 있는 세이나의 힘에 반응하여 그가 가진 본질의 힘이 튀어나왔다.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세찬 폭우에 인적이 없었다. 그래서 본래라면 바로 숨겼을 힘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뒀다.
“아아, 불쾌하기 짝이 없는 힘에 반응해 버린 그때인가?”
카신이 가진 힘의 근본은 지독하고 깊은 어둠이었다. 그래서 멀리서라도 신성한 기운을 느끼면 저절로 불쾌감이 들었다. 상응하는 힘이란 본래 그런 거였다. 서로 부딪히고 싸우는.
“불쾌한 힘은 대마법사께서 가진 것이지요.”
카신과 세이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