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당시에 카신은 대신전에서 의례적으로 수도에 방문하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힘을 피해 밖으로 외출을 했었다.
그리고 세이나와 만났을 때는 마침 대신전의 인간들을 피해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었다.
당연히 수도에 신력을 내뿜는 인간은 없을 거라 여겼다. 시간을 넉넉히 잡아 온 것도 있었지만, 앞을 볼 수도 없는 엄청난 폭우였다. 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세이나와 마주치자마자 기분이 급속도로 하강했었다. 어둠의 힘은 정확히 그때 그의 기분을 드러냈으리라.
“그때는 그 기분 나쁜 힘의 정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대신녀가 되고, 시간이 지난 후에 차차 그 힘이 어둠인 걸 깨달았죠.”
인간은, 특히 신녀들은 어둠의 힘을 불결하게 여겼다. 애초에 어둠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힘이기도 했지만, 남을 해하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내 힘을 알고서도 용케 가만히 있었군.”
오랜 과거, 마법사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카신은 모든 속성의 마법을 완벽히 익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더 강한 무언가를 추구했다. 그래서 손을 댄 것이 어둠의 마법이었다.
어둠의 마법은 그 어떤 속성의 힘보다도 강대했다.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무척이나 버거운 힘에 적응하기까지 그도 꽤 고생을 해야 했다.
한번 적응한 힘은 빛까지 삼킬 만큼 끝도 없이 그를 보다 더 강하게, 완벽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인간을 초월한 특별한 존재였다.
카신은 평소에 그 광대한 힘을 철저히 숨겼다. 어둠의 힘을 제외하고도 그는 모든 속성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이는 일은 아주 쉬웠다.
“확실히 기존의 대신녀와는 달라. 여태 내 힘을 눈치챈 대신녀들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말일세.”
하지만 가끔 긴장을 풀거나 마법의 강도를 높이면, 자연스레 그도 모르게 어둠의 힘이 새어 나올 때가 있었다. 특히나 상성이 맞지 않는 힘을 느낄 때 더 그랬다.
대대로 신력이 높은 대신녀들은 가끔 그가 가진 어둠의 힘을 눈치챘다. 빛을 상징하는 대신녀들은 어둠의 힘을 쓰는 그를 악이라 치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표할 용기도 없으면서 그를 손가락질하며 쫓아내려고도 했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 다녔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싸움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쓸데없는 싸움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바로 대마법사가 신전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의 시초였다.
“물론,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합니다. 당신도 그 힘을 쓸 때마다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카신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세이나는 드높은 신력만큼이나 감도 유달리 좋았다.
그녀의 말대로 어둠은 마법사들도, 심지어 그 힘을 쓰는 자신까지 불쾌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성스러운 신을 모시는 신녀들이 기피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분이 나쁘지만 제게 해롭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그날처럼 말이죠.”
상성이 맞지 않는 힘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그건 카신도, 세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힘을 숨긴다면 불쾌할 것도 없으리라. 하지만 힘을 완벽히 숨기고 다니는 카신과 달리 신녀들은 신력을 일부러 드러내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카신은 서로의 힘이 충돌하지 않도록 과거에 대신전에서 황궁에 방문을 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힘을 쓰지 않으면 들킬 일은 없겠지만, 감이 좋은 대신녀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외출이 귀찮아져 대신전에서 올 때마다 별궁에 수십 개의 결계를 치고 틀어박힌 건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어둠의 힘이 흘러나올 때마다 히나에게 맴돌던 축복의 힘이 흘러나온 거겠지요. 대마법사께서 찾으시던 대답은 이것이겠지요?”
히나는 신력을 가져서 축복의 힘을 내는 게 아니었다. 세이나의 간절한 염원과 오랜 기도를 통해 받아 내재된 힘은 카신의 어둠과 맞닿아도 공격성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어둠을 중화시켰다.
“그런데…… 히나를 대마법사님께서 데리고 있다니, 정말 의외로군요.”
“주웠다네. 이제 내 것이지.”
카신이 대놓고 진득하게 소유욕을 드러냈다. 세이나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이미 버린 아이가 아닌가.”
대놓고 비웃은 카신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아니면, 다시 되찾을 셈인가?”
카신에게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세이나는 바짝 긴장했다. 느긋한 얼굴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주변에 힘을 흘리며 무거운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대신녀께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군.”
아무리 속은 그렇지 않더라도 세이나는 신을 모시는 몸이었다.
대신전에선 히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리라. 축복까지 깃든 히나를 철저히 파헤치고 이용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
“그렇다네.”
무엇이든 벨 것 같은 날카로운 눈. 전신을 옥죄는 불길한 기운. 사냥감을 앞두고 있는 최상위 포식자인 그는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였다.
“버려.”
군더더기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등바등 달려들어도 가질 수도 없지 않나.”
“히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적어도 어둠을 상징하는 당신에게 히나를 맡기고 싶진 않습니다.”
“하하. 대신녀께서는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그래.”
어째서 카신이 히나를 데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은 지 오래된 그는 그 누구와도 어울려 지낼 수 없었다. 그건 히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엄마 노릇도 못 하지 않나.”
조소를 짓던 카신의 얼굴이 냉랭함이 느껴질 정도로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니 끝까지 외면해. 뭐, 어차피 이번 순례가 끝나면 다신 볼 일 없을 테지만 말일세.”
세이나는 빛의 힘을 다루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어둠은 너무나도 위험한 힘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가까이 가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럴 순 없다?”
“이제 와 엄마 노릇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악의 축에 서 있는 당신에게 보낼 생각도 없습니다.”
확고한 의지를 내비치는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히나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히나와 달리 세이나에게선 신녀 특유의 기분 나쁜 기운이 흘렀다.
강대한 신력이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고작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신녀가 내기엔 터무니없는 위력이었다.
세이나는 대신녀의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카신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어울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완벽한 대신녀였다.
“신녀는 신녀라 이건가. 보수적인 건 여전하군.”
벌컥.
카신의 긴 손가락이 허공을 한 바퀴 돌자 문이 열렸다.
“그 기분 나쁜 힘은 이제 충분히 봤으니, 그만 꺼져 줬으면 좋겠군.”
“저와 같이 온 신녀들도 감이 꽤 좋습니다. 그러니 대마법사께서도 연구실 밖으로 그 불쾌한 것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세이나가 원한다고 한들, 이제 와 그녀가 히나의 엄마가 되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대신녀라는 칭호를 버릴 수 없는 그녀는 절대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고 사라지는 세이나를 지켜보며 카신은 픽 웃었다.
히나의 빛이 신력이 아닌 건 다행이었지만, 문제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복잡한 것투성이였다.
“역시…… 신녀라는 것들은 전부 불쾌하다 이건가.”
오랜만에 만난 대신녀는 여전히 불쾌했다. 짜증이 날 정도로.
* * *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든 것인지 히나는 책 속에 작은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방금 그가 누굴 만나 무슨 얘기를 하고 왔는지는 꿈에도 모를 히나는 무척 태평한 얼굴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축복이라…….”
긴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카신은 손끝에 밀집된 어둠의 힘을 히나에게 가져갔다.
“우웅…….”
영롱한 빛.
아주 작은 힘을 일으켰을 뿐인데도 히나에게선 예의 그 빛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을 다룰 때마다 올라오던 그의 불쾌감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녀에게서 이 빛을 보기 위해 수백 가지의 마법을 써보며 얼마나 노력했던가. 고작 상처를 입히는 것도 못 하는 아주 미세한 어둠의 힘에 나오는 빛을 보자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제야 말이 맞는군.”
축복은 신력으로 이루어내는 기적이었다. 세이나의 신력을 통해 생긴 힘이니, 비슷한 기운인 건 당연했다.
이미 알고 온 거였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또 달랐다. 그래도 혹시나, 했던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히나는 세이나의 아이였다. 비슷하지만 다른 힘을 가진 빛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허탈함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카신 님?”
잠에서 깼는지 히나가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훑어보는 모습이 꼭 먹이를 찾아 귀를 쫑긋 세운 토끼 같았다.
“여, 여긴 들어오면 큰일 나는데…….”
여자 기숙사엔 남자 출입이 일절 금지였다. 들어온 사람도, 데리고 온 사람도 모두 큰 벌점이 주어졌다.
벌점이 매겨질까 걱정이 되는 건지 히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마법으로 기척을 지우고 들어왔으니 아무도 모를 게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휴우, 다행이에요.”
말 한마디에 안심하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의심을 했던 전과 달리 히나는 이제 그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세이나를 이긴 것 같은 우월감이 들었다. 이런 감정이 얼마나 유치한 짓인지 카신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히나는 자신을 택하리라.
“공부는 잘되고 있니?”
“네! 루터 오라버니가 매일 모르는 부분을 잘 가르쳐 줘요.”
또다시 나오는 루터의 이름에 카신의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참, 아까 있었다던 선약이…….”
히나는 말끝을 흐리며 카신의 눈치를 봤다.
“대신녀님이었어요?”
하얀 제복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카신이 걸어준 공간이동 마법으로 갑자기 기숙사에 도착했다. 히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카신을 보러 왔는지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카신 님은 대신녀님과 친하세요?”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대신녀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아까 카신의 연구실에서 세이나를 보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히나는 그토록 바라던 소망을 이루었음에도 마냥 기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루터가 내준 숙제에 집중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깜빡 졸았다. 하지만 꿈속에서 카신과 세이나가 친밀하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화들짝 깨버렸다. 어째서 그 모습이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대신전에서 축복 기도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카신과 함께 대신녀 앞에서 신성한 기도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내키지 않았다.
“대신녀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 잠시 만난 거였단다. 왜? 내가 대신녀를 만나는 것이 싫으니?”
잠시 묘한 얼굴을 한 히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어요.”
강하고 아름다운 카신과 성스럽고 빛나는 대신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느끼자마자 갑자기 속에서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눌렀다.
특히 다급히 자신을 뒤로 숨기는 것도 모자라 공간이동 마법을 걸어 쫓아내다시피 보낸 걸 생각하면 카신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대신녀님과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세이나는 작은 체구의 여린 여인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엄청났다. 그래서 더 잘 어울렸다. 보잘것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에 비하면.
“그건…….”
언제나 무엇이든 답을 해주던 카신이 머뭇거렸다. 그는 무언갈 숨기고 있었다. 답을 찾는 그의 모습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카신을 독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카신과 세이나가 마주 서 있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쓰렸다. 상대가 보자마자 우상이 된 세이나란 사실에 더 그랬다.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카신을 속여 큰일이 일어날 뻔했다. 다시는 카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대신녀님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알고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큰 뜻은 없었어요.”
하지만 히나는 또다시 카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어쩐지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히나, 대신녀와의 대화는…….”
“아! 카신 님, 저 주말에 집에 가요.”
히나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루터 오라버니가 집에 간다고 했는데, 제게 같이 가자고 했어요.”
히나가 억지로 과장해서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빨리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히나.”
카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히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만 안아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