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어떻게요?”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더 크게 일렁였다. 카신은 대답 대신 양팔을 벌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히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카신에겐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안아드리면 되나요?”
코앞에서 두 팔을 벌린 채 망설이던 히나가 곧 카신의 허리에 두 팔을 둘렀다.
“그래.”
이렇게 안긴 히나를 보니 유달리 더 연약하고 작게 느껴졌다. 카신은 두 팔로 히나를 마주 안았다. 따스한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좋은 것인지 히나가 그의 품에 더 깊이 안겼다. 안길 때 긴장했던 것과 달리 편안하게 기대는 그녀를 보며 카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녀는 나와 상반되는 힘을 가졌단다. 그래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지. 세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원한 관계는 아니지만, 다를 바 없는 사이야.”
“상반되는 힘이라면…….”
카신은 히나를 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녀의 질문을 막았다. 그리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히나는 순수했다. 그리고 아직 어리기도 했다. 그래서 카신은 티 없이 맑은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움받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웠다.
‘두렵다라…….’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카신은 지금 이제 막 성년이 지난 조그만 여인의 감정이 변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변한 자신의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로 인해 변하는 건 무엇이든 좋았다.
“너를 불안하게 했구나.”
“불안한 게 아니라…….”
히나는 말을 하다 멈췄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감정을 확실하게 정리하기 힘들었다. 카신이 불안했다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히나는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설명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카신 님이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중에 편해질 때 말하셔도 되고, 평생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카신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얘기를 듣고 싶진 않았다. 조금 답답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감정으로 불안하더라도, 자신이 답답함으로써 카신이 편해질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포시 고개를 드니 반듯하면서도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방금 전까지 불편해 보였던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에 또 가슴이 뛰었다.
카신에게 안겨 있으니 너무 좋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건만 오히려 사랑의 묘약이 강하게 발동하는 건지 눈을 마주치는 게 갈수록 쑥스러워졌다.
“대신에 절 이렇게 안아주시면 안 돼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카신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히나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왕 말한 김에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히나는 카신을 안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저는 카신 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니까……. 제게 너무 불리한 벌을 내리셨으니까 가끔은 이렇게 안아주세요.”
용기 내어 하고 싶은 말을 꺼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속이 시원해도 쑥스러운 마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그의 품에 숨겼을 때였다.
“불리한 벌?”
도통 모르겠다는 카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워 숨으려고 했던 그녀의 고개가 도로 올라왔다.
“설마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인지 카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히나는 잠시 충격에 빠진 눈으로 카신을 보다가 뒤늦게 그를 밀치며 물러났다.
“너, 너무하세요!”
“잠깐! 나는 네게 벌 같은 건…….”
품에서 사라진 따뜻한 온기에 반응한 몸이 그녀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히나의 실망 가득한 눈에 카신의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멈췄다.
순간 뇌리에 투명한 병 속에서 일렁이던 보랏빛 액체가 떠올랐다.
“아아, 사랑의 묘약. 그건 사랑의 묘약이란다.”
히나에게 벌을 내린 적이 없으니, 바로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건 사랑의 묘약도, 그녀에게 내린 벌도 아니었으니까.
“제게 사랑의 묘약을 먹이셨잖아요! 그래서 전 카신 님을 싫어할 수도 없고, 그, 그렇게 안아주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잖아요.”
히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동시에 카신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걸 잊어버리시다니, 너무해요!”
“미안하구나. 시간이 너무 지나 까먹고 있었단다.”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카신 님을 미워할 수 없잖아요.”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삐쭉 내미는 히나가 너무 귀여웠다. 마음이 약해지다가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녀를 보니, 진짜로 울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나도 성격 참 나쁘군.’
처음 그녀에게 약을 줄 때 다짐했다. 무슨 약인지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카신은 잠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약도 순 엉터리로 설명해 주시고.”
“엉터리?”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카신 님을 보면 지금처럼 계속 두근거린단 말이에요.”
두근거린다라.
히나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편해하는 건 알고 있었다.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은 세인트에 있을 때 부르지 말라며 단호히 선을 긋는 그녀의 행동에 서운할 때도 많았다. 혼자서만 애를 끓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약이 잘못된 모양이구나.”
히나에게 먹인 약은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재료와 겹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묘약으로 인한 반응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걸 보면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자신만을 향해 있다면 마음의 크기나 깊이 따위는 상관없었다.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작고 가벼워도 괜찮았다. 이 정도면 그녀를 향한 마음에 충분히 보상받았다. 오히려 넘쳤다.
“하지만 어쩌지? 사랑의 묘약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은 아직 나도 모른단다.”
일말의 희망이 사라진 것인지 실의에 빠진 얼굴을 한 히나를 보며 카신은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네 증상이 심해질 때마다 기분 좋게 안아주마. 그러니 그럴 때마다 언제든지 말하렴.”
“저, 정말이에요?”
“물론.”
아주 잠깐 안았을 뿐인데도 그녀가 없는 품이 허전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이유든 간에 먼저 안겨준다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단순히 심술이 나서 사랑의 묘약이라 속인 거였다. 히나가 오랜 시간 그로 인해 고민하고 이런 반응을 내비칠 거라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전혀 없었다.
그때는 당연히 곧 사실을 알거나 약효가 떨어졌을 거라 치부하고 무시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아예 그도 잊고 있었던 거였다.
“그보다 리베리아 가에 간다고?”
부끄러운지 고개를 끄덕인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화제를 돌렸다. 아껴뒀다가 나중에 놀려야지, 란 몹쓸 심보 덕이었다.
“네! 음…… 베라미 오라버니가 이번에 황궁 마법사단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대요.”
화제를 돌린 것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히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축하 파티를 연다고 했어요.”
히나의 얼굴에 작은 근심이 보였다.
“가기 싫으니?”
“아니요! 오라버니께 좋은 일이 있어 축하를 하러 가는 거잖아요. 좋아요! 아직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제 오라버니잖아요.”
히나가 리베리아 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 카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처음에 루터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리베리아 후작은 어쩔 수 없이 히나를 맡았다. 루이스의 부탁이 있기도 했고, 대마법사가 아끼는 아이라는 소리에 집안의 번창과 황궁 마법사단을 위해 맡은 것이기도 했다. 큰 책임감을 갖거나 부성애를 갖고 히나를 양녀로 들인 게 아니었다.
‘갑자기 들어온 히나가 눈엣가시겠지.’
히나가 대마법사와 친분이 있는 것 외에 가족들에게 다른 무언가를 설명할 순 없었으리라.
아무리 리베리아 후작과 자제들이 평민과 귀족의 선이 없는 세인트를 다녔다고 해도 그들은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신분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갑자기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이다.
그 모든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말릴 수 없었던 건, 가족이 생긴다는 말 한마디로 크게 기뻐하던 히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히나.”
“네?”
최근 루터가 제법 오라비다운 행동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처음엔 그렇지도 않았다.
마차 안에서 히나에게 보이던 적대적인 시선이나 다소 까칠한 면이 있는 루터의 성격을 떠올리면 둘 사이가 어땠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히나는 루터를 오라버니라 여기며 졸졸 따라다녔다.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부터.
“가족이 있어서 좋으니?”
“네! 너무 좋아요.”
“진짜 가족이 아니라도?”
“진짜 가족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제게는 없잖아요.”
차라리 세이나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히나의 친모가 바로 옆에 있었다. 원하면 만날 수 있는 장소에. 그럼에도 히나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루터 오라버니랑 같이 세인트에 다녀서 다행이에요. 아니었으면 학교생활이 더 힘들었을 거예요.”
끝까지 세이나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었다. 카신은 확실하게 선택을 내렸다. 이렇게 강하게 결단을 내렸으니, 마음이 바뀌진 않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찝찝했다. 이상한 미련이 튀어나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가족이 있어서 정말 좋아요!”
“그렇구나.”
그래도 진짜 가족이 있었다면 좋을 것 같아요.
히나의 얼굴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카신은 쓰게 웃었다. 히나가 바라는 건 다 들어주고 싶었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가야겠구나. 들를 곳이 있거든.”
“이 밤에요?”
“갑자기 중요한 일이 떠올랐단다.”
히나가 작은 손을 꾸물거리며 머뭇거렸다. 카신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기분이 좋은지 히나가 배시시 웃었다.
“그냥…… 이 시간에 대신녀님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죠?”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카신이 세이나를 만나러 가는 건 싫었다. 하지만 카신에게 솔직히 그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에 내가 직접 만나러 오는 여자는 너밖에 없단다.”
너무 노골적인 말이었나?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보고 있는 히나를 두고 카신은 밖으로 나왔다. 히나를 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우선 증거부터 없애야겠지.”
몰래 기숙사를 나온 카신은 곧바로 중죄인을 관리하는 황성 북쪽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