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탁.
아까부터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카신은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왜 간다고 한 거지?”
별궁으로 돌아와서 초대장이란 초대장은 다 뒤졌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파티는 없었다.
“내게 분명 뭘 숨기고 있었어.”
혹시 세이나와 관련된 걸까? 하지만 그가 알기론 명문 마법사 집안인 리베리아 후작과 대신전의 교점은 일절 없었다. 세이나가 먼저 다가가고 싶어 해도 그럴 구실조차 못 만들었을 것이다.
“분명 리베리아의 장남은 히나를 싫어했지.”
설마 루터를 이용하여 히나를 부른 다음 무슨 못된 짓을 벌이려는 건 아닐까? 히나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테고 애초에 신분도 불분명한 평민 출신이니, 없애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귀족들이란 그런 부류들로 넘쳐 나니까.
“내가 어떻게든 가야 해.”
히나가 혼자 상처받고 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아니면 주말이 지날 때까지 불안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항상 지루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오늘따라 너무 더뎠다.
결정을 하자마자 카신은 공간이동 마법을 걸었다. 전에 왔던 리베리아 후작가의 저택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제집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대, 대마법사님?”
저번에 봤던 하녀였다. 전에 한 번 봤을 텐데도 깜짝 놀란 그녀가 다급히 집사를 찾았다. 하녀보다는 그나마 유능한 집사가 재빨리 그를 모셨고, 리베리아 후작을 불러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대마법사님?”
“이제는 내가 이곳에 올 일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후작?”
카신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력도 없는 여리고 약한 히나의 기운은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채 여물지 않는 루터의 마력이 정원 한 곳에서 느껴졌다. 카신은 큰 보폭으로 루터를 찾아가려다 우뚝 멈췄다.
“……대마법사님?”
할 말만 하고 정원을 향해 자신을 지나쳐 가던 카신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리베리아 후작은 떨떠름하게 그를 불렀다.
“어째서 레베스톤 공자가 여기 있는 거죠?”
카신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루터의 옆에 베라미의 마력도, 라우너의 강력한 에너지도 느껴졌다.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아마 히나도 옆에 있을 것이다.
“라우너는 원래 자주 놀러 옵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잠시 멈췄던 카신은 다시금 발걸음을 움직였다. 큰 보폭으로 걷는 그는 다소 다급해 보였다.
“대마법사님?”
리베리아 후작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티타임 중인 건지 정원 한중간에서 테이블에 앉아 오순도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열불이 났다.
별달리 관심이 없는 베라미는 둘째 치고, 적극적인 라우너와 그걸 부추기는 루터, 그리고 신이 난 얼굴로 호응을 해주는 히나를 보니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럼 라우너 오라버니는 단장을 맡고 계신 거예요? 그거 엄청 대단한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귀찮은 거 맡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제1 기사단장님이 단장보다 실력 좋은 단원이 있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고 날 단장으로 올려 버렸어.”
귀찮은 얼굴로 한숨까지 쉬는 라우너가 다르게 보인 건지 히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카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히나는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능력이 출중하고 인정받는 사람을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대표적으로 대신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세이나를 동경했다.
“그게 맞는 거지. 그때 널 담당했던 기사단장, 엄청 힘들어했다고. 나한테도 찾아와서 제발 널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니까?”
질린다는 목소리로 혀를 차는 베라미와 달리 라우너는 시큰둥했다.
“하지만 단장이 되고 나서 엄청 피곤해졌는걸…….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는데.”
억지로 단장을 맡았던 것이 억울한 건지 라우너의 얼굴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라우너 오라버니는 어머님 말씀을 잘 들으시나 봐요. 제가 조금 오해했어요. 집에서 무슨 말을 하든 마음대로 행동할 것 같았거든요.”
히나의 말에 루터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히나의 말에 거의 반응을 하지 않았던 베라미도 표정까지 일그러트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니야, 히나. 형의 어머니는 그러니까…… 엄청 무섭거든.”
그들이 왜 웃는지 도통 모르겠는지 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엄하신 분이세요?”
“엄하다기보다…….”
“흠흠, 라우너의 어머니는 제국의 유일한 여공작이자 최고의 기사로 불리는 분이셔. 아무리 라우너가 대단해도 레베스톤 공작님의 손에는 한주먹감이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뜸을 들이던 루터 대신 베라미가 헛기침을 하며 설명해 주었다. 히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으면서도 대화에 끼고 싶은 어중간한 상태인 듯했다.
“그럼 그 소문의 엄청 대단하신 미모의 여공작님이 라우너 오라버니의 어머니이신 거예요? 대단해요! 것보다 여공작님은 어떤 분이세요? 이렇게 이른 나이에 단장이 되신 분을 한주먹으로 이기다니, 역시 아주 멋지신 분이겠죠?”
제국에 여공작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라우너의 모친인 건 몰랐던 모양이었다. 히나는 마치 꿈을 꾸는 얼굴로 레베스톤 여공작에 대해 묻고 있었다.
카신은 못마땅했다. 히나가 별 볼 일 없는 애송이에 불과한 라우너를 치켜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의 어머니인 레베스톤 공작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능력만으로 따지면 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인간은 카신이었다. 하지만 히나는 자신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 모두를 똑같이 우러러봤다. 대마법사도, 유능한 황궁 마법사인 베라미도, 최연소 기사단장인 라우너도 히나의 눈엔 그저 다 똑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어째서 히나는 여자에게 더 약한 거지?’
세이나부터 레베스톤 여공작까지. 히나는 확실히 능력이 출중한 남자보다 여자에 대한 동경이 더 컸다. 같은 여자로서 불리한 환경과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멋있게 보는 듯했다.
카신은 히나에게 누구보다 더 특별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가 아닌 이상 히나에게 지금보다 더한 동경의 시선을 받지는 못하리라. 그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별을 바꾸는 연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히나에게 여자가 아닌 남자로 다가가고 싶었다.
“한주먹감은 아니다! 나, 엄청 강하다고! 나도 조금만 더 크면 어머니도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뜨릴걸?”
“하지만 제국의 여공작님은 드래곤과도 비등하게 싸울 만큼 엄청 강하신 분이라던데요? 저도 어릴 때부터 여공작님 얘기는 많이 들어서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 분인지 알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 어머니는 뭘 먹고 그렇게 강한지 모르겠다니까.”
아무리 레베스톤 여공작이 대단하다고 해도 드래곤과 비등하게 싸울 순 없으리라. 그보다, 평범한 인간이 드래곤과 만날 일이 있기나 할까? 그건 과장된 소문에 불과했다.
“어쩐지 라우너 오라버니가 여공작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다르게 보여요. 더 대단한 것 같아요.”
“정말? 이제 보니 히나는 어머니 팬이었구나.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어머니를 보여줄게!”
저게!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여공작을 미끼로 히나를 집에 끌어들이려 하다니! 카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히나가 넘어가질 않기를.
“그, 그래도 되나요?”
“그럼! 나도 널 좋아하니까, 어머니도 분명 널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경각심이라곤 일절 없었다. 카신은 거절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얼굴까지 붉히며 가고 싶다고 눈을 빛내는 히나를 보며 한숨을 깊이 내뱉었다.
“그럼 다음 주말에 세인트에 외출 신청을 하고 놀러 갈까, 히나?”
히나와 라우너의 목적은 달랐지만, 원래 남녀 사이란 이렇게 정이 드는 거였다. 분위기가 좋아지는 두 사람을 보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루터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딜 간다고, 리베리아 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순간에 몰려오는 오싹한 한기에 루터는 몸서리를 쳤다. 돌아보지 않아도 이 불길한 기운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요즘 운이 좋지 않았다. 라우너를 밀어주고 싶은 마음에 온 거긴 했지만, 카신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어째서 카신이 하필 이 타이밍에 맞춰서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카신 님! 언제 오셨어요?”
“대마법사님!”
“대마법사님?”
반갑게 맞이하는 히나와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베라미, 그리고 달갑지 않은 시선의 라우너가 차례로 카신을 맞이했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린 루터를 제외하곤.
“분명 아무런 기척도 안 느껴졌는데.”
라우너는 작은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카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기척을 숨기는 일에 누구보다 자신 있는 라우너는 카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카신을 보자, 왠지 모를 기분 나쁜 기운이 확 끼쳤다. 이곳에 다가올 때까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하지만 다음 휴일엔 히나와 내가 갈 곳이 있네. 그 약속은 무한정으로 밀어도 되겠나, 리베리아 군?”
“네, 네! 그럼요.”
서늘한 시선이 뒤통수에 닿자마자 루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고개를 돌리자 살기 어린 샛노란 눈동자가 그를 죽일 기세로 쏘아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요? 저와 갈 곳이 있나요?”
카신은 처음으로 히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보니 차마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없었다. 히나를 억압하고 상처를 줄 바엔 제국을 폭발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나중에 알려주마. 그보다 티타임을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사과와는 달리, 카신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진작 튀어나와서 망치고 싶었다. 만약 나오지 못할 상황이었다면, 천재지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었다. 지진을 일으키거나 폭우를 내리는 일 따위는 그에게 아주 간단하니까.
“히나!”
갑자기 다가온 라우너가 히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에 카신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대마법사님한테 가까이 가지 마. 역시 오늘도 엄청 불길한 기운이 나.”
“네? 불길한 기운이라니…….”
“몰라. 분명 아닌 것 같기도 했는데, 또다시 보니 확실히 알겠어. 엄청 불길해.”
루터와 베라미가 경악에 찬 눈으로 라우너를 쳐다봤다. 제발 아무런 말을 하지 말라는 눈치도 엄청 줬다. 하지만 눈치라곤 일절 없는 라우너는 당당했다.
“그리고요, 대마법사님. 히나한텐 엄청 좋은 기운이 나는데 대마법사님한테는 아주 안 좋은 느낌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대마법사님도 히나한테 다가오지 말아주세요.”
카신은 라우너를 한 단어로 표현했다.
‘짐승.’
상반된 힘을 가진 신녀들도 잘 눈치채지 못하는 힘을 라우너는 감각만으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둠의 힘을 완전히 감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우너는 공기 중에 미세하게 섞여 있는 기운까지 읽었다. 거기다 상반된 힘이 나와야만이 희미하게 형성되는 히나의 힘도 감지하고 있었다.
“호오, 그렇구나. 하지만 어쩌지? 히나는 나와 아주 각별한 사이인데 말이다.”
간혹 있었다. 감이 좋은 인간이. 여태껏 봤던 인간들 중에 특출 나게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상황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걸 초월한 그에게 있어 인간은 어차피 미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레베스톤 공자. 나와 히나를 떨어뜨리고 싶다면 남자답게 내게 승부를 걸지 그런가?”
저돌적이고 솔직한, 거기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덕에 오만 방자하게 날뛰는 인간이라면 다루기 쉬웠다. 한 번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콧대를 눌러주면 그만이었다.
카신의 눈이 위험스레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