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흥, 고작 마법 몇 개 더 부릴 줄 아는 오래 산 뒷방 늙은이 주제에. 내가 피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오산이라고요!”
“뒤, 뒷방…….”
카신의 손끝이 살며시 떨렸다. 칭찬을 받아도 마땅했다. 라우너는 최근 백 년을 통틀어 그를 화나게 만든 인간들 중 가장 어렸다.
카신이 쉽게 이성을 잃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었다. 풀토 공작이 히나를 해하려고 했을 때도 이성은 남아 있었다. 물론 차분히 일을 해결한 데 히나의 덕도 있었지만, 그때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신 님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제법 야무진 얼굴을 한 히나가 라우너를 쏘아보고 있었다. 카신의 손끝으로 모이던 마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카신 님은 라우너 오라버니께 그렇게 불릴 분이 아니에요.”
히나는 천성이 순해서 남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꽤나 굳은 얼굴로 화를 표출하고 있었다. 카신은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히나를 보며 픽 웃었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아, 아무튼 미안.”
정색하며 나오는 히나의 행동에 당황한 라우너가 곧 사과했다. 카신은 그 사과가 자신이 아닌 히나에게 향한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대신 화를 내준 것만으로도 오늘은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그, 그래도 승부는 받아들이죠!”
히나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줄 모르던 라우너가 고개를 홱 돌려 카신을 쳐다봤다.
“난 마법사한테는 쉽게 안 당해.”
“자, 잠깐 라우너! 저분은 대마법사님이라고!”
“맞아요! 대마법사님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베라미와 루터가 다급히 말렸다. 하지만 라우너는 막무가내였다.
“나도 경험의 차이란 걸 아니까 이길 생각은 없어. 그래도 쉽게는 안 당할 거라고.”
라우너의 눈이 호기롭게 빛났다. 히나와 무관하게 라우너는 카신과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다. 평소에 대련하는 걸 좋아하는 그는 옛날부터 싸우고 싶은 상대를 리스트에 적어두기도 했다.
그가 리스트를 적을 당시만 해도 카신은 별궁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상대이기도 했다. 라우너는 그 리스트 중 한 명인 카신과 대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흐음, 그러고 보니 레베스톤 가는 대대로 겁이 없고 승부욕이 강했지. 실력에 비해서 말이야.”
카신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라우너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훑었다.
“베라미, 네 집에 있는 대련장 좀 빌릴게.”
“으응.”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카신까지 승부를 받아들이고 있는 마당에 더 말릴 수도 없었다. 베라미는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루터가 작은 목소리로 히나에게 속삭였다.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히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았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꼭 말려야 해요?”
위대하다는 대마법사와 촉망받는 레베스톤 공자의 대련이었다.
히나는 서로에게 다 좋은 일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사람과 엮이는 걸 싫어하는 카신이 이참에 정식 대련을 통해 친목을 다질 수도 있다. 그리고 대마법사라는 강력한 상대와의 대련은 라우너에게도 큰 경험이 될 것이다.
“……난 가끔 네가 제일 무서워.”
루터는 소심한 겁쟁이 주제에 중요한 순간에는 가장 대담하게 나오는 히나를 보며 혀를 찼다.
* * *
“그냥 하는 건 재미가 없겠지?”
카신의 손끝에 보랏빛의 스산한 오라가 일었다. 처음엔 둥그렇게 일던 오라는 곧 그의 손을 넘어 길게 검처럼 뻗었다.
“다, 당신 마법사 아니었어?”
라우너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마법사라고 검을 쓰지 말란 법은 없지.”
“그 왜, 이 타이밍에는 검 말고 대마법사용 마력 대량 지팡이를 꺼내야 하잖아요!”
대마법사용 지팡이는 루이스가 마음대로 소문을 낸 것에 대충 맞춰준 것에 불과했다. 풀토 공작을 잡아들일 때, 마력을 억제하는 용도가 밝혀진 지팡이를 이제 와 굳이 들고 다닐 필요는 없다.
라우너의 목소리가 꽤나 컸는지 지팡이 얘기가 나오자 멀리 있던 히나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카신은 픽 웃으며 검기로 만들어낸 검을 바로잡았다.
“레베스톤 공자는 소문이 늦나 보군. 공작과 달리 말이야.”
제 어미와 비교당하는 것이 싫은지 라우너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 쓰는 건 오랜만이구나.”
라우너는 당연히 카신이 마법을 쓰다가, 검은 그가 근접했을 때 몸을 보호하는 역할로 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카신이 검을 잡은 채 꽤 그럴듯한 자세까지 잡자 생각이 바뀌었다.
얼핏 보면 대충 폼을 잡은 것 같지만, 빈틈이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라우너는 오른손에 쥔 검에 검기를 두르며 당장에 튀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뭐, 검을 쓸 수 있다면 됐어.”
기사는 본래 마법사와의 대련을 피했다. 장거리 공격을 하는 마법사에게 검으로 부딪히며 원거리로 싸우는 기사는 확실히 불리했다.
하지만 라우너는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속도에도, 힘에도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타고난 체력도 강했고, 동체 시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일류 마법사라도 마법을 시현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검기를 두른 검으로 날아드는 마법을 뿌리치며 사이사이를 피해 단번에 돌진하면, 마법사가 다음 마법을 시현하기도 전에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대마법사님이라고 해도 마법만 쓰면 나도 재미없으니까.”
이런 싸움 방식은 검기를 자유자재로 쓰는 능력과 압도적인 힘, 그 무엇도 놓치지 않는 동체 시력과 뛰어난 집중력, 또 그 모든 걸 버티는 체력과 강인한 신체를 가진 레베스톤 여공작과 라우너만이 가능했다.
“마법과 검을 같이 쓴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당신은 대마법사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대마법사의 마법을 검기로 온전히 튕겨낼 수 있다 자신할 만큼 라우너는 자만하고 있지 않았다. 해봤자 고작 방향을 틀거나 겨우 피하는 게 다일 것이다. 어떻게 가까이 간다고 해도 마법을 시현하는 틈이 없어 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대마법사니까.
라우너의 눈에 날카로운 살기가 서렸다. 싸움을 할 때의 그는 인상까지 변할 만큼 무척 진중해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냈다.
“저 녀석, 진심이네.”
멀리서 지켜보던 베라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변한 라우너는 말릴 수 없었다. 베라미는 부디 라우너가 많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대련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간다.”
아주 가볍고 빠른 동작이었다. 보기엔 가볍게 뛴 수준이었지만, 라우너는 단번에 카신의 앞까지 다가갔다. 허공에서 칼날이 부딪히는 날카롭고 경쾌한 소리가 공기 중으로 크게 울렸다.
쇳소리보다 더 맑고 청명한 소리였다. 카신이 마법으로 만든 검과 라우너의 검이 허공에서 몇 번이고 부딪혔다. 챙챙 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다른 기사들과 대련할 때보다도 더 묵직한 소리였다.
몇 번이고 부딪히기만 하던 검이 큰 소리와 함께 맞물리며 멈췄다. 한 치도 밀려나지 않기 위해 라우너가 이를 꽉 물었다. 반면 그와 달리 카신은 티타임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기분 나빠.”
엄청난 힘이었다. 카신이 봐주고 있다는 게 훤히 보일 만큼 압도적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대마법사라지만 꼼짝 못하는 것에 라우너는 자존심이 상했다.
마법을 시현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근접전보다도 원거리전을 선호했다. 자신의 마법을 믿고 있는 그들은 체력이나 반사 신경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광범위하고 복잡한 마법 수식을 익히기에도 바빴다. 간혹 체력을 단련하는 마법사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마법을 쓰는 것 자체가 체력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일이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는 전투를 대비한 일류 마법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별궁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햇빛도 제대로 쐬지 않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대마법사. 라우너는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이나 힘에서는 카신에게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대련을 하는 그의 눈에도 카신이 자신을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보였다.
“나도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네, 레베스톤 공자.”
검을 쥐고 있는 카신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라우너는 본능적으로 검을 떨어뜨리며 뒤로 멀리 떨어졌다. 카신이 잠시 기묘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픽 웃었다.
“오호, 위험감지 능력이 뛰어나군그래. 팔이라도 끊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라우너는 예상보다 더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었다. 카신은 눈을 빛내며 신랄하게 움직이는 라우너와 힘을 겨루면서 조금 흥분했다. 라우너가 그 자리에서 피하지 않았다면 과도하게 들어간 힘 때문에 크게 다쳤을 것이다.
카신은 손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다쳐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시 멀쩡하게 만들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치료를 하다가 육체를 더 강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우너는 대귀족이었다. 팔이 잘렸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골치 아파질지도 모른다. 히나 앞에서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한 걸 생각하면 조금 더 험하게 다루고 싶었지만, 귀찮아질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쉽게 끊어질 줄 알고?”
“끊어질까 봐 줄행랑을 친 것이 아닌가, 공자?”
도발 따위에 넘어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까딱하면 죽는다. 그 공포감에 라우너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실력 차이가 확연했다. 여유라곤 일절 없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그에 비해 카신의 움직임은 사뿐히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가벼웠다.
숨을 한 번 가다듬은 라우너가 다시금 카신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고 간결하게. 어느 마법사들에게는 다 통했지만, 안타깝게도 카신에게는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라우너는 포기하지 않았다.
“당신…… 기분 나빠.”
카신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이상하게 불쾌했다. 특색이 강하게 느껴지는 마법사나 힘이 과도하게 느껴지는 기사와 달리 카신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국이 건국할 때부터 대마법사가 살았다는 전설 따위는 사실 감이 크게 오지 않았다. 한평생 검만 다뤄왔던 그에게는 마법으로 물이 솟아나거나 불이 나타나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라우너는 영생을 사는 것 또한 마법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얼마나 오래 살고 경험이 많아지면 존재 자체를 숨길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째서 대마법사의 칭호가 그토록 높고, 대대로 황제까지 설설 기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됐다.
공기보다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대마법사. 움직이는 데도 그는 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너는 카신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불쾌감이 돌았다. 기분 나쁜 무언가가 그의 주변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내 눈엔 자네도 짐승인 것 같다만.”
카신은 히나와는 다른 의미로 오랜만에 흥미가 돋아 라우너를 찬찬히 살폈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확인하며 돌진하고 피할 줄 아는 라우너는 그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성격답게 라우너는 저돌적으로 돌격하며 싸웠다. 라우너는 아마 피하거나 뒤로 내빼는 것보다도 무작정 맞서는 싸움만 했으리라.
“친우는 아니지만…….”
그가 여태 만난 인간 중에서 힘이나 감각적인 면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라우너는 강했다. 다소 객기를 부리던 것과 달리 위기에 따른 상황 판단 능력도 독보적으로 좋았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것만 봐도 싸움에 대한 감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네와 비슷한 짐승을 안다네, 공자.”
하지만 카신은 오래 살았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들과도 많이 싸워봤다. 라우너는 분명 뛰어나지만 그가 만난 모든 ‘생명체’ 안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대련 중에…… 공자, 공자 하지 마!”
라우너가 강하게 파고들었다. 카신은 간단히 피하며 손끝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계속 검을 맞부딪치던 라우너가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며 그의 검을 피했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동체 시력이었다. 아무리 여유로워도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감지하며 싸우는 방식은 그도 하지 못했다. 뭐, 그는 기사가 아닌 마법사니 필요 없는 능력이지만 말이다.
“황궁 예법을 그다지 신경 쓰진 않지만.”
마치 싸움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이렇게 위기를 피하면서 간을 보는 싸움은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레베스톤의 다음 대를 이을 차기 공작을 발정 난 짐승이라고 부를 순 없지 않나.”
카신은 조금 더 라우너를 도발했다. 고작 가벼운 대련에도 새로운 싸움법을 익히고 그에 맞춰 빠르게 성장하는 라우너에게 살짝 흥미가 솟았다.
도발이 먹힌 건지 아니면 그만큼 극도로 흥분해서인지, 라우너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쥔 검에 서슬 퍼런 검기가 점점 더 강하게 둘러졌다.
라우너의 몸집만큼이나 커져 가는 검기를 보며 카신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호오, 아주 끝내려고?”
지금도 불리한 건 마찬가지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이보다 더 불리해지리라.
어릴 때는 서로에게 맞춘 대련만을 해왔고, 커서는 그에게 대적할 상대가 별로 없었다. 기억나지 않을 때부터 검을 잡기 시작했던 라우너는 한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몰린 적이 처음이었다.
“버거울 텐데?”
모든 걸 안다는 듯, 느긋하리만치 입을 놀리는 카신의 행동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이대로 끝난다면 가문의 수치는 물론, 그의 기사 인생에도 불명예였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검에 집중시킨 검기로 인해 손끝에서 파지직, 전류가 흘렀다. 검을 잡은 손이 저릿하다 못해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웠다. 하지만 라우너는 검을 더 꽉 쥐었다.
“기세는 높게 사주마.”
어서 오라는 듯, 카신이 형체가 없는 검을 바로잡았다.
이미 대련의 정도를 벗어났다. 라우너는 사활을 건 마지막 공격을 위해 카신에게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