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마력 폭주를 본 적 있나요?”
조금은 진정이 된 건지 세이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력으로 성력을 완전히 누르고 있는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았다. 조금만 신력이 약해지거나 집중력이 흐려지면, 성력은 언제든 다시 폭주할 기세로 튀어나오려 했다.
“본 적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지.”
마력 폭주를 제압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폭주된 마력은 평소의 힘보다 수십 배는 더 강했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선 그보다 더 강한 마력으로 억눌러야 했다.
생명을 담보로 일류 마법사가 다섯 명은 달려들어야 폭발하는 마력을 잠재울 만큼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류 마법사의 수는 무척 적었고, 그중에 폭주한 마법사가 진정할 때까지 마력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사는 더 드물었다.
“언제 끝이 나는 거죠? 아니, 질문을 바꾸죠. 폭주를 멈추게 한 적이 있긴 한가요?”
예상했던 대로, 폭주한 마력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해 멈추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력으로도 성력을 압박시켜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성력을 잠재우기 전에 신력이 먼저 바닥나리라.
“손에 꼽을 정도지만, 없진 않지.”
“하긴, 없었다면 히나를 내게 데려오지도 않았겠죠.”
아직까지 폭주한 마법사를 제압한 기록은 없었다. 이론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론이 아닌 실제 경험으로 제압이 가능하단 걸 증명한 카신의 말에 세이나는 작게 안도했다. 적어도 끝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야.”
폭주를 멈추게 한 건 그 사람이 간절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호기심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연달아 여러 번 마력 폭주를 멈춰본 그는 이론을 사실로 증명하자마자 흥미를 잃었다. 몇 명을 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 처음부터 결과에만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과정은 더더욱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 잘나신 마법으로 끄집어내지 그래요?”
세이나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곧 제 신력이 떨어질 겁니다.”
세이나도 마력이 폭주한 장면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주변의 기운을 모두 평온하게 만드는 성력 폭주와 달리 파괴만을 추구하는 마력 폭주가 일어나면, 그 파괴적인 힘을 제압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까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폭주자가 죽을 때까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 황폐해진 곳을 뒷수습했다.
“당신은 어떻게 마무리를 지었죠?”
제아무리 강한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어도 폭주된 성력을 억제하는 것이 다였다. 세이나는 당장에라도 흩어지려는 신력을 꽉 잡으며 물었다.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신력이 컨트롤 가능한 신녀는 가까이에 없었다. 공간이동으로 대신전에 간다고 해도 대신녀들이 쉽게 해줄 리 만무했다. 오히려 히나의 힘을 대신전에 묶어두려 할 것이다.
“조금 더 압도적으로 제압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까다롭기 짝이 없는 과정이었다는 거였다. 카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기억해 내려 애썼다.
“여기서 강하게 쓴다면 히나의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마력과 달리 신력은 과하면 오히려 해가 됐다. 인간의 몸에 있는 필요한 불순물까지 모두 정화시키려 들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신력도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아슬아슬하게 맞춘 것이었다.
“제 몸도 버티지 못할 거예요.”
세이나도 인간이었다. 한계 이상의 신력을 쓰면 그녀에게 또한 해가 갔다. 작은 타격을 입어 신력이 흐려지기라도 해서 히나가 다시 폭주하면 큰일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마력이 부족해서 곤란했던 경험은 없었다. 폭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렵지도 않았다. 그래서 카신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큰 무력감이 몰려왔다. 히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곧 한계입니다.”
세이나의 절망적인 대답을 들으며 카신은 그새 핼쑥해진 히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지금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폭주한다면 생명에 지장이 있으리라.
폭주를 제어했던 과정까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마침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결과만을 추구하고 대충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가 기억하기론 폭주가 멈춘 시간이나 반응이 다 달랐다.
“신력은…… 어떻게 회복하지?”
확실하지도 않은 뜬구름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의식도 없고, 처음 보는 힘을 가진 히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카신은 유일한 희망이자 대화가 가능한 세이나에게 방향을 틀었다.
“체력이 회복되면 어느 정도 괜찮아지나?”
어둠의 힘을 완전히 숨긴다면 신녀인 세이나라도 그의 치료 마법으로 얼마든지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 만약 그의 힘으로 안 된다고 해도 별궁에는 체력을 회복시키는 약이 얼마든지 있었다. 세이나의 체질에 맞게 순식간에 조합하여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신력은…….”
세이나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며 카신은 인상을 구겼다.
“설마 한계라면서 내 치료를 받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쾌하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콕 집어 말하는 카신을 쏘아보던 세이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마력과 마찬가지예요.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기본적으로……!”
히나의 몸에서 쉴 새 없이 빠져나오던 성력이 멈췄다. 세이나는 히나의 성력을 제어하던 신력의 양을 아주 조금씩 줄였다.
더 이상 성력이 삐져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미세하게 신력을 줄이던 세이나는 어느 정도 확신을 하자마자 힘을 거두었다.
“하아.”
진이 빠졌다. 세이나는 바닥을 짚으며 한숨 돌렸다.
“된 것 같군.”
카신은 바로 히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히나만큼이나 지쳐 있었던 세이나가 카신의 앞을 막았다.
“히나의 체력을 회복시킬 거다. 비켜.”
“확인했을 텐데요? 히나에게 당신이 얼마나 해로운지.”
마치 자신을 더러운 물건 취급하는 세이나를 보며 카신은 평소처럼 픽 웃으며 넘길 수 없었다. 산송장이라고 해도 무방한 히나를 보는 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언제 다시 부딪혀서 폭주할지 모릅니다. 다음번에는 제 신력으로 이 폭주를 버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히나의 성력이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어둠의 힘을 몇 번이나 마주했으니, 날이 선 것이리라.
만약 히나의 성력이 여기서 더 성장한다면?
세이나의 신력은 이미 성장을 멈췄다. 경험이 축적되어 더 노련하게 쓸 수 있을 뿐, 이 이상 강해지진 않는다.
하지만 아직 어린 히나라면 다르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히나의 성력이 더 무르익게 된다면 세이나의 신력으로도 억제하지 못하리라.
“히나가 후작가에 양녀가 되었더군요. 아마 당신이 힘을 써준 덕분이겠죠.”
카신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힘을 쓴 건 아니지만, 그로 인해 루이스의 관심을 사로잡은 히나가 후작가에 들어간 건 사실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세인트에 있던 루터 피안 리베리아 군은 히나를 많이 아끼는 것 같더군요.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들이 있더라도 루터 군이 히나의 힘이 되어준다면 상관없겠죠.”
어미 노릇도 해주지 못한다며 비난했던 것에 복수라도 하는 걸까? 세이나는 히나에게 떨어져야 할 이유와 그녀가 혼자 자립할 수 있는 근거를 대며 그를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에겐 내가 필요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세이나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카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히나는 루터와 잘 지내고 있었고, 상급반 친구들과도 이제는 곧잘 대화를 나눴다. 히나는 머지않아 주어진 모든 상황에 적응할 것이다.
그뿐인가. 베라미가 히나를 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사라도 그의 존재를 신경 쓰며 히나를 조금씩 신경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스러운 히나의 진가를 알아본 가족들과도 잘 지내게 되리라.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공작가의 후계자인 라우너의 지지라면 충분히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라우너는 갖고 있는 권력만큼이나 성격이 안하무인이니, 히나를 싫어하는 상대에게 그녀보다 더 날을 세우며 달려들 것이다.
“그녀에겐 내가 필요해. 확실히.”
그러나 카신은 절대 세이나의 말에 긍정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히나에게 정말로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았다.
“아니요, 충분합니다. 대마법사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문은 제 귀에도 들리더군요.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히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아픈 것이었나? 카신은 쓰게 웃었다. 세이나의 가슴을 후벼 판 것을 몇 배로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성력을 자극하는 어둠을 가진 그보다는 대신녀인 세이나가 히나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이제 히나에게 필요 없었다.
“이제 그만 관심을 끊으세요.”
히나와의 연결을 단호하게 끊으려는 세이나에게 카신은 아무런 반론도 내세울 수 없었다. 히나에게 자신이 필요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히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어버렸다.
“지금부터 히나는 제가 데려가 돌보도록 하죠.”
이렇게 말문이 막힌 적은 처음이었다. 목숨이 치명적일 만큼 히나를 위협했다는 사실에 입술을 떼는 것조차 힘들었다.
“읏…….”
희미한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세이나가 히나를 데리고 사라질 때까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자리에 몇 날 며칠을 서 있었을 것이다.
히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무거운 눈꺼풀이 힘겹게 들렸다. 초점이 흐린 갈색의 동공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신 님?”
히나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옆에 있던 세이나가 아닌 카신이었다.
“몸이…… 쿨럭! 아, 아파요.”
카신의 눈이 히나에게 꽂혔다. 히나와의 사이를 막고 있는 세이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세이나를 지나쳐 히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았다.
“곧 치료를 해주마.”
“너, 너무 아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보이는 히나를 조심스레 다독이며 카신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말거라. 다시 자고 일어나며 모두 괜찮아질 게다.”
“정말이죠?”
“그럼.”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작은 손이 카신의 옷깃을 꼭 잡았다. 세이나의 눈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만 한 힘을 계속 내고 있었으니, 히나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아주 괴로울 것이다. 히나는 죽을 위기를 막 넘긴 상태라 지금 무척 고통스러울 텐데도, 카신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거다.”
“네.”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상대가 얼마나 있을까? 세이나는 혼미한 상태로도 카신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히나를 보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둘 사이에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보았겠지?”
히나가 다시 잠들자마자 카신은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히나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말이야.”
“하지만 히나는…….”
“도움엔 감사를 표하지. 하지만 이 이상의 개입은 히나가 원치 않을 겁니다, 대신녀. 부디 그녀의 행복을 위해 물러나시죠.”
카신은 좀 전과 달리 이번엔 확신을 담아 또박또박 말할 수 있었다. 히나에겐 그가 꼭 필요했다.
그걸 깨달은 것인지 세이나는 지나쳐 가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저 망연자실하게 카신에게 안긴 히나를 응시하다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