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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62화 (62/128)

#62.

“괜찮냐?”

베라미는 카신에게 된통 당하고 완전히 뻗어버린 라우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치료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분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인지, 라우너의 눈은 불만에 차 있었다.

“베라미 형, 이래선 당분간 일도 못 하겠어요.”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루터는 아까 전 엄청났던 대련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카신이 보였던 힘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아아악! 왜 마법사가 칼을 휘두르는 거…… 흡!”

꾹꾹 참고 있던 라우너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소리를 꽥 지르던 그가 뒤늦게 아리는 통증을 느끼고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젠장, 죽을 것 같아.”

예전에 라우너는 세인트에 다닐 때 시험에 떨어져 한 번 유급을 한 적이 있었다. 시험이 어렵기로 소문난 세인트에서 유일하게 쉬운 소양 시험이었다. 누구나가 다 통과하는 소양 시험은 학생들에게 시험에 합격하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형식상 만들어진 것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인트 역사상 소양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라우너가 바로 그 역사를 깼다. 세인트 역사상 대련 무패라는 기록을 쓰고 있던 라우너는 소양 시험 불통이라는 새로운 기록까지 썼다.

그날, 머리 빈 기사는 필요 없다며 어머니한테 밤낮으로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라우너는 살면서 가장 아팠던 때는 그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그때보다도 지금이 더 아팠다.

“뼈는 부러진 게 없다는데? 그렇게 아파?”

살가죽이 어떻게 되어 있으면 피를 철철 흘려도 멀쩡할까 싶을 만큼 라우너는 통증에 무뎠다. 심지어 뼈가 부러져도 짧게 통증을 호소하다 마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한때 이 녀석을 데리고 따로 인체 실험이라도 해볼까, 궁리까지 했던 베라미는 라우너가 고통을 호소하자 깜짝 놀랐다.

“진짜 아픈 거야? 아니면 분해서 아픈 거야?”

라우너는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잘 다치지도 않았지만, 다쳐도 크게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베라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아파! 아프다……. 하아.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니지?”

기사들끼리 정신 단련 겸 며칠을 내리 훈련만 해도 라우너의 체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기사들이 왜 힘들어하는지, 근육통에 시달리면 얼마나 아픈 건지 궁금해했다.

“뼈도 안 부러졌는데 죽긴 뭘 죽어. 지금까지 네가 비정상이어서 그렇지, 지금 그게 정상인 거야.”

이렇게 뼈가 멀쩡하다는 게 신기했다. 라우너는 뼈를 으스러뜨리는 것 같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한계를 넘어 힘을 억지로 끌어 올린 부작용을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그 괴물.”

천장에 카신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라우너는 애꿎은 천장을 강하게 쏘아보았다.

라우너는 쓰러지면서도 카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카신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어둠의 힘을 불러들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동자도 더 예리하고 사납게 변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인간의 눈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라우너는 이 사실을 베라미나 루터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상급반 수업할 때도 우리 다 나가떨어질 때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다음부터 그런 무모한 싸움은 하지 마세요.”

루터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라우너에게 충고했다. 카신이 상대를 하는 것이기에 이미 예견은 했지만, 그래도 천하의 라우너가 공격 한 번 성공시키지 못하고 완벽하게 져버린 것을 보니 얼떨떨하였다.

“그런데 대마법사님은 원래 그렇게 검술이 뛰어나셔? 그런 소문은 못 들었는데. 루터 너는 아는 거 없어?”

베라미는 황궁 마법사까지 하고 있었지만, 카신이 검을 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검기로 형체가 없는 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오늘 보고 알았다.

역시 대마법사는 독보적으로 절대적인 존재인가 싶기도 하면서도,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살짝 껄끄러웠다. 특히나 마지막에 보였던 어둠의 마법을 떠올리자니 더 그랬다.

“나도 교수님이 검을 쓴다는 건 몰랐어…….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잖아.”

카신에 대해 알려진 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상 거의 없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컸기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지만, 무슨 마법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법진 없이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자세한 건 나도 잘…….”

“마법진도 없이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해?”

“수업 때는 보고 따라 하라고 마법진을 만드시긴 하지만, 그 외에는 그냥 마법을 쓰시는걸. 공간이동 할 때도 마법진 없이 하시잖아.”

“그게…… 가능하구나.”

마법사라면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마법진 없이 마법을 쓰는 걸 전혀 상상할 수 없으리라. 중간 과정도 없이 마법을 쓴다면 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기사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유리했다.

마법사와 기사의 싸움은 대부분 마법사가 우월했다. 하지만 검기를 다루는 기사라면 말이 달랐다. 검기로 마법을 날려 버리거나 피하고, 다음 마법 시동하기 전에 빠른 속도로 다가가 공격을 하면 기사가 유리했다. 물론 그 경지까지는 엄청난 노력과 경험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나 네가 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네. 너무 그렇게 억울해하지 마.”

베라미는 진심으로 라우너를 위로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마법으로 진 거면 몰라도 검술로 졌다고. 난 그게 억울한 거야.”

“그건 좀 의외긴 하다. 어떻게 검술까지 그렇게 잘하냐?”

“보통 실력이 아니었어. 어떻게 형체도 없는데 검기를 만들어서 칼로 쓰는 거지?”

라우너는 입술을 쭈욱 내밀며 툴툴거렸다. 카신의 검술 실력이 그렇게 출중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으랴.

“매일 별궁에 박혀 있다며! 애초에 무슨 마법사가 그렇게 잽싸게 움직여?”

마법사가 아닌 라우너는 카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직접 본 것도 히나를 본 날, 같이 본 게 처음이었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는 대마법사라는 위대한 마법사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조금은 자신 있었다. 마법이라면 튕겨내면 그만이었고, 그게 안 되면 피하면 될 테니. 모두가 떠받들 듯 동경하는 대마법사라도 적어도 작은 상처 하나쯤은 낼 수 있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진짜 대마법사 맞아? 기사라고 해도 무방하겠어.”

카신은 매번 주문만 중얼거리며 치사하게 뒤에서 마법만 쓰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검술이라면 제 어머니, 레베스톤 여공작과 대련해도 거뜬할 것이다.

‘어머니가 제국 최고? 말도 안 돼. 어머니가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머니가 진심을 다해 대련해 줄 때도 그는 이렇게까지 농락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신의 힘은 독보적이었다.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그 정도 검술 실력이라면 굳이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카신은 최강의 호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봤던 그 마법, 그건 도대체 뭐예요? 형은 알아? 난 그런 마법은 들어보지도 못했어.”

루터는 마지막에 카신이 보였던 마법이 계속 찝찝했다. 어둡고 불길한,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하늘에 있어도 그보다 더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마법이라니, 웬만한 마법 서적을 전부 읽어본 루터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도 그런 마법은…….”

베라미도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자연의 속성에 들어가지도 않는 그 불길한 힘을 딱히 정의하기 어려웠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불길하다고. 바로 그 기운이었어. 그걸 꽁꽁 숨겨두고 있었던 거라고.”

라우너가 그럴 줄 알았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느껴졌다고? 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저도요.”

“희미하지만 보고 있으면 왠지 불길하잖아. 정말 전혀 안 느껴졌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라우너를 보며 루터와 베라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히나를 그 불길한 마법사한테서 떼어내야…… 잠깐 히나! 히나는 어디 있지?”

“형이 기절했을 때 교수님이 데려가셨어요.”

“기절이라니! 난 잠깐 눈 감고 쉬고 있었던 거라고! 그보다 데려가다니? 어디로?”

“글쎄요.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였지만…… 교수님이 옆에 있으니 괜찮겠죠.”

그렇게 말했지만, 루터의 얼굴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세이나가 직접 성력이 있다고 말해주었지만, 히나에게서 신비로운 힘이 나오는 걸 보니 새삼스러웠다.

“난 이만 가볼게, 형. 라우너 형도 몸조리 잘 하고 가세요.”

베라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터의 팔을 잡았다.

“너, 아까 걔 몸에서 나온 힘이 뭔지 알지?”

베라미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수상쩍은 동생을 응시했다.

히나에게서 갑자기 나타난 빛을 쐬는 순간, 놀랍게도 카신의 어둠으로 인해 두려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빛이었다.

“나도 모른다니까? 형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카신이 히나를 데리고 가자마자 베라미는 루터를 추궁했었다. 하지만 루터는 끝까지 모른 척 잡아뗐다.

“너, 계속 걔랑 붙어 다녔잖아?”

카신은 히나가 가진 힘에 대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히나가 양녀가 되기 전에도 무슨 힘이 있다고 말이 나온 상태니, 함께 있었던 카신이 모를 리는 없으리라.

끝까지 히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베라미가 얄미워서인 것도 있었지만, 루터가 히나의 성력을 숨긴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카신은 마법사로서의 재능은커녕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의 모습에 잔뜩 의기소침해진 히나를 데리고 수업 시간에 따로 여러 번의 시험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시험을 중단하고는 의아해하는 히나에게 나중에 따로 보자고 했다.

‘분명 히나의 힘을 숨기려는 이유가 따로 있겠지. 어쩌면 신녀님이 온 건 교수님이 히나를 부탁해서일지도 몰라.’

루터는 처음 갑자기 대신녀가 세인트에, 그것도 마법 상급반을 찾아온 것이 이상하다 여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카신의 부탁으로 성사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녀님까지 오셨으니 알아서 발표가 나겠지. 그때가 올 때까지 일단 나도 입단속 하자.’

카신 때문에 세이나가 세인트에 온 것은 맞지만, 두 사람이 앙숙과도 같은 사이인 것까진 전혀 모르는 루터는 그렇게 추측했다.

루터의 생각과 사실은 전혀 다르지만, 어찌 됐든 그간 히나의 능력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카신의 의도를 알아챈 그는 끝까지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까 히나도 모르던 눈치였잖아. 본인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알고 있었으면 나도 그렇게 안 놀랐어.”

잠시 꺼림칙해 하던 베라미가 루터를 놓아주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터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천천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빠르게 기숙사로 떠날 준비를 했다.

히나는 분명 카신과 함께 있을 테니, 무섭지만 연구실에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루터는 히나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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