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63화 (63/128)

#63.

열흘이 넘도록 히나는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수업은커녕 기숙사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카신도 수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루터는 카신의 연구실에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문도 열리지 않았다. 계속 불러도 보고 기다렸는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아예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담당 교수인 에단이 히나가 아파서 며칠 쉰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열흘이 넘어가자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있잖아, 정말 히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쉬는 시간이 되자 아까부터 계속 눈치를 보던 카터가 물었다. 잔정이 많은 카터는 매일같이 루터에게 히나의 안부를 물어왔다.

“나도 모른다니까.”

다음 시간은 카신의 수업이었다. 오늘도 자습이 주어질 것이 분명했다.

루터는 가져온 마법서를 꺼냈다. 예전에 사놓고 보지 않은 마법서였다. 구매한 지 꽤 됐지만, 계속 히나의 공부를 봐주느라 오랫동안 읽지를 못했다. 최근 며칠은 히나에 대한 걱정으로 까먹고 있기도 했다.

“오늘도 역시 자습이겠지?”

자습 준비를 하는 루터를 힐끔 본 카터도 한숨을 내쉬며 공부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공포스러운 카신의 수업이 없다는 것에 안도감 반, 아쉬운 마음이 반이었다.

“수업이 빡세서 그렇지, 실력은 확실히 오르긴 하는데 말이야.”

“맞아.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듣고 나면 엄청 강해진 기분도 들어.”

카터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동조하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향상되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한 번의 수업을 듣고 난 전후가 완전히 달랐다. 카신의 스파르타 교육은 사람을 녹초로 만들긴 했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너 정말 몰라? 카신 교수님은 히나랑 친하잖아.”

평소에 말없이 고고하게 있던 줄리아까지 루터에게 물었다. 히나와 카신으로 인해 요즘 들어 인기가 많아진 루터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도 지금 히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니까?”

“넌 도대체 아는 게 뭐야?”

“너보단 많을걸?”

고고하고 새침한 줄리아가 평소에 까칠하게 말하는 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루터는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 대화가 길어지는 걸 피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루터의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도 히나에 대한 걱정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아하, 잘나신 리베리아 도련님이니 당연히 아는 게 많겠지.”

“거기서 왜 우리 집이 나와? 하, 그렇게 비꼬기만 하니까 항상 밀리는 거 아니야.”

“밀리긴 누가 밀렸다고 그래?”

원래부터 집안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줄리아의 집안인 루카스 백작가는 리베리아 가처럼 뛰어난 마법사를 꾸준히 배출해 낸 명문가였다. 하지만 대대로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인 리베리아에 밀려 2인자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마법 실력 면으로는 루카스 백작가도 뒤처지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인 데다 황제의 신임까지 얻고 있는 리베리아 가에 비하면 루카스 가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다.

두 가문은 대대로 사이가 나쁘지만, 같은 마법사단에 있기 때문에 서로 상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였다. 그래서 두 집안은 공적인 만남 외에는 서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교류 자체를 피해왔다.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에 차 있는 줄리아가 무슨 말을 해도 여태 모두 무시하거나 흘러 넘긴 건 아버지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가 시비를 걸더라도 수장의 자리에서 아랫사람을 지휘해야 하는 리베리아 후작을 위해서라도 참아야 했다.

“마법 실력도 한참 떨어지는 주제에.”

“네 실력도 만만치 않잖아? 너도 작년에 유급해서 여기 남아 있는 거 아니야?”

“그만해. 너희 둘 다 갑자기 왜 그래?”

“맞아. 수업도 시작했잖아.”

주변에서 줄리아와 루터를 막으려 들었지만, 분위기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

자칫 가문과 가문의 분란으로도 번질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어서인지 그 누구도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꼴이 말이 아니군. 언제부터 세인트의 자랑스러운 상급반이 유치한 애들 싸움 장소로 바뀐 거지?”

“교수님?”

“모두 자리에 앉게. 내게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면 말일세.”

언제 나타난 건지 카신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교탁 앞에 서 있었다.

“교수님! 히나는…….”

다급히 자리에 앉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루터가 벌떡 일어났다. 카신은 잠시 루터를 보더니 시선을 내려 가져온 책을 펼쳤다.

“사적인 질문은 사절하지.”

칼 같은 거절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 사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히나는 같은 반 학우이기도 하다고요! 특히나 히나는 제 동생이기도 하니 저는 알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카신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못마땅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눈을 피하지 않고 카신을 계속 응시했다.

“하아. 리베리아 군.”

이제 막 펼친 책을 덮은 카신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수업을 하지 않고 자습을 시키는지 아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루터는 질문을 하고도 왠지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힘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꽤 난폭해진다네.”

카신은 자신의 힘을 마치 타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얘기했다.

“내 힘이 조잡한 마력만 갖고 있는 자네들에게 너무 세게 공격을 하면 어쩌겠나? 내 보호 마법이라고 해도 절대적인 건 아니네. 평소보다 강한 힘에 보호 마법이 깨져 버리면 자네들은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안 그런가?”

느긋하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 카신의 기분은 말한 것보다 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그걸 안다면 나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게야.”

말 그대로였다. 열흘째 깨어나지 않는 히나로 인해 카신은 초조하다 못해 미치기 직전이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루이스가 직접 찾아왔다. 히나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걸 안 루이스는 그가 계속 수업을 빠진 것을 추궁했다.

“적어도 맡은 수업에는 얼굴을 비치란 말일세! 안 그러면 자네의 별궁에 찾아와 히나의 상태를 확인하겠다는 신녀들의 제의를 허락할 테니!”

하필이면 카신이 정신을 잃은 히나를 데리고 세이나를 찾아갔을 때 다른 신녀들의 눈에 띄었다. 다행히 세이나가 어디선가 나타난 어둠의 기운에 히나의 성력이 반응하여 함께 있던 그가 급히 찾아온 거라고 둘러 넘겼다.

하지만 신녀들은 히나의 성력을 직접 확인했다. 그들은 신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힘에 관심을 갖고 다시 한 번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세이나는 히나를 데려가려 했다. 성력과 비슷한 힘이니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말이다. 급기야 세이나를 비롯한 신녀들은 별궁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청까지 해왔다.

“자네도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아? 깨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말이야. 더 이상 수업을 빠지면 나도 자네를 계속 두둔해 줄 순 없네.”

히나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업이라니. 적어도 깨어날 때는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카신은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루터까지 불을 지피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서 시간을 때운 다음 히나에게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그건 제가 한 질문에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교수님!”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루터는 물러나지 않았다.

“히나는 제 동생이라고요!”

카신은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는 루터를 살폈다. 루터는 히나를 무시했던 처음과 달리 제법 오라비다운 눈을 하고 있었다.

“사적인 질문이라면 수업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하도록.”

아무래도 절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피할 방법은 많았지만, 나중에 루터가 자신을 이토록 찾았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히나가 기뻐할 것이다. 딱히 말해줄 생각은 없지만, 가족을 갖고 싶어 하는 히나에게 오라버니를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교수님!”

루터는 카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히나의 소식도 못 듣고 반쯤 깨질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물어본 건데,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 * *

안타깝게도 히나는 카신이 수업을 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깨어났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곁에 있어주려고 했던 카신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여긴…….”

오랫동안 잔 기분이었다. 히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카신의 별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드디어 깨어났군.”

“폐, 폐하?”

루이스를 발견하자마자 히나가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루이스가 그녀를 저지했다.

“그대로 누워 있게. 환자에게 인사를 받을 만큼 매정하지 않으니 말이네.”

그보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히나에게 인사를 받았다간 카신이 가만두지 않으리라. 가끔 카신은 황제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루이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신을 찾는 히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카신은 수업에 들어갔네. 계속 수업에 빠져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수업에 빠져요?”

“꽤 오래 잤네. 카신이 교수인 걸 망각하고 열흘을 넘게 망부석처럼 이곳을 지키고 있어 한 소리 하고 세인트로 돌려보낸 참이었지. 카신을 보냈다고 너무 서운해하진 말게.”

그 덕에 애꿎은 루이스가 히나의 옆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황제의 신분으로서 통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녀를 포함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보냈으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히나를 지켜주시지요.” (이탤릭체)/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 말하는 카신의 눈빛이 꽤나 위협적이었다.

당장 급한 용무는 없었다. 처리할 일은 가져와 하면서 자리를 지키면 그만이었다. 루이스는 이제는 편지 친구이기도 한 히나를 옆에서 지키는 걸 기꺼이 택했다.

“아니에요! 전혀 서운하지 않아요. 일이 우선인 게 당연한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급히 말하는 히나가 귀여워 루이스는 픽 웃었다.

히나에 관해서라면 카신은 무척 적극적이었다. 매사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것에 비하면 아주 큰 쾌거였다. 그러니 답례로 카신에게 이 정도 시간을 쏟아도 괜찮았다. 뭐, 그거 때문에 히나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니지만.

‘꽤 마음에 든단 말이지.’

본래 의도가 있어 히나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쌓이는 편지의 수만큼 마음도 쌓여갔다. 편지글에서도 히나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 절로 흐뭇해졌다. 꾸밈없고 솔직한 그녀를 보고 있자면, 어느새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딸이 하나 있었으면.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아이에 대한 로망이 생긴 걸 보면.

“편지를 보낼 때처럼 편히 대해도 되네. 이곳엔 레이디와 나, 둘밖에 없으니 말일세.”

직속 하녀와 호위 기사가 방 안에 있긴 했지만, 루이스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그의 사람들이었다. 따로 말이 새어 나갈 일도 없으니, 괜히 그들의 존재를 언급해서 히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처음에는 미숙한 시녀였고, 그다음에는 꺼림칙한 첩자였다.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여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되네. 아니면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았던 걸 까먹은 건가?”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까지 편지로는 속마음까지도 곧잘 얘기했으면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낯을 가리는 히나를 보니 루이스는 조금 섭섭해지려 했다.

“아닙니다! 제가 까먹다니요.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아쉬운 티를 살짝 냈을 뿐인데도 히나가 다급히 부정했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에 루이스는 허허, 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반응이 귀여워 짓궂은 농담이 절로 나왔다. 곤란해하는 히나를 보면 죄책감이 살짝 생겼지만 말이다.

“카신이 없을 때 깨어나서 다행이랄까.”

루이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나가 눈을 크게 뜨고 루이스를 쳐다보았다.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거든.”

히나와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이런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른다. 루이스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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