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67화 (67/128)

67.

순진한 히나의 마음을 갖고 장난친 게 아니었다. 오히려 히나를 향한 카신의 마음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무척 깊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하, 한 가지만 더요!”

루터가 다급히 물었다. 카신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까딱했다.

“교수님은 지금도 충분히 히나를 데리고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싫은 걸 참으면서까지 기다리는 거죠?”

히나는 어엿한 성인이다. 지금 결혼을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맹목적으로 카신을 믿고, 또 그에게 마음까지 있는 순진한 히나를 꾀어내어 결혼하는 건 카신에게 일도 아니리라.

히나가 바라는 건 결혼을 하고서도 이루어줄 수 있었다. 능력은 그의 마법으로도 만들어주면 된다. 한데 카신은 그저 지켜보는 걸 택했다.

“교수님은 저랑 히나가 같이 있는 것도 싫어하잖아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카신은 히나가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두는 것도 싫어했다.

그런데 히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찮은 걸 무지 싫어하는, 살아 있는 전설이면서 말이다.

“자네는 좋아하는 여자를 권위와 힘으로 억지로 옆에 데려오고 싶은가? 그 여자가 힘에 굴복해서 온다 한들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하지만 교수님은 저와 다르시잖아요.”

“나는 히나를 아내로 맞이하면 내 생명과 히나의 생명을 하나로 연결시킬 생각이네. 그리하면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아주 긴시간 동안 행복하게 살겠지.”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게 만들도록 지금 계속 연구하고 있지. 이 마법이 언제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마법이었다. 아니, 이게 마법이긴 한 걸까?

혼란에 빠진 그를 둔 채 카신은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린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하겠지. 그러니 그 어떤 부작용도 없이 그녀가 나를 선택하게 해야 해. 그러니 그 과정에서 후회를 남길 만한 강요나 억지는 절대 들어가선 안 돼.”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깊어질수록 카신은 사랑의 묘약을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후에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는 그 약으로 남은 삶을 후회와 한탄으로 살 순 없었다.

모든 걸 이룬 히나가 스스로 자신을 선택해야 했다. 엄청난 인내와 짜증이 폭발하더라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낼 걸 생각하면 참아야 한다.

히나와 함께할 미래. 카신이 인내하며 지켜보기만 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걸로 답이 됐나?”

루터는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끔찍한 집착이었다.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순 없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은 카신의 마음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럼 우리 거래를 하지.”

잔뜩 긴장한 루터를 보며 카신은 본론을 꺼냈다.

“거래요?”

“나를 도와주게. 히나가 내게 수월하게 올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벌써 라우너 형에게…….”

카신의 눈이 사나워지는 걸 보며 루터는 입술을 다물었다.

“물론 레베스톤 공자의 마음은 알고 있네. 차기 공작에 실력도 출중하니, 최고의 신랑감이 되겠군. 레베스톤은 가문을 위해서도, 개인을 위해서도 선택하기 아주 좋은 집안이지. 하지만 히나를 가장 아껴주고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나야.”

확신에 가까운 어조였다.

“난 적어도 평민 출신의 후작 양녀가 공작 부인이 되어 받는 눈총은 받지 않게 할 수 있네.”

아무리 공작 부인이 됐다고 해도 히나가 시녀 출신의 평민이었다는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카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위치로 따지자면 교수님이 더…….”

“난 안하무인이라. 그따위 눈총은 전부 막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네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국의 황제가 눈치를 보는 사람이 바로 카신이었다. 루터는 질린다는 얼굴로 카신을 쳐다보았다.

“히나를 동생으로 아낀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겠지?”

“물론 교수님을 선택하는 게 더 낫겠지만,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나? 거기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잖아?

“공짜로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저는 히나를 팔거나 하지 않아요.”

히나로 인해 이득을 볼 생각은 없다. 과거와 달리 지금 그에게 히나는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어릴 때부터 지내온 것이 아니니 아직 어색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세인트에서 수업도 함께 듣고, 공부도 도와주고, 그녀의 고민 상담을 해주면서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지켜주고 싶고, 보호해 주고 싶었다.

한데 히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걸 도와주면 그 대가를 주겠다니. 루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히나를 팔라는 말이 아니야. 어차피 자네가 방해한다고 해도 히나의 마음은 이미 내게 향해 있고, 난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걸세. 굳이 자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

“그럼 교수님이 직접 하세요.”

카신은 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루터를 응시했다.

매일같이 질릴 만큼 종일 붙어 있다 싶었더니, 오라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는 한껏 숙이며 들어갔음에도 반항하는 루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만큼 히나를 생각하는 것이니 이 정도 무례는 참을 수 있었다.

‘히나에게 기댈 수 있는 오라비가 하나 있는 것도 좋은 일이지. 물론 나는 싫지만.’

아무리 그가 많은 양보를 한다 해도, 함께 살다 보면 나중에 말다툼 정도는 하게 되리라. 히나가 마음 놓고 투정할 오라비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지.

“나는 자네와 내가 서로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네.”

카신은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는, 오히려 꺼려 하는 루터에게 달콤한 제안을 꺼냈다.

“머리는 지나치게 좋으나 마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리베리아 군.”

카신은 딱 잘라 루터의 약점을 꼬집었다.

“궁금하지 않나? 마력을 높이는 방법이.”

미숙한 자의 약점을 끄집어내는 일은 쉬웠다. 루터는 절대 거절할 수 없으리라.

“자네도 세인트를 졸업하면 황궁 마법사단에 들어가겠지. 난 자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 추후에 히나가 투정을 부릴 친정에 능력 있는 오라비 하나가 있으면 좋을 것 같거든. 자네 생각은 어떤가?”

루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신은 거의 넘어온 루터를 보며 씨익웃었다.

“루터 군, 주말에 히나를 데리고 집에 가는 걸 취소하고 내가 직접 해주는 개인 수업을 듣지 않겠나?”

루터는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카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꽤 엄격하지만, 노력파인 루터 군이라면 잘 버틸 수 있겠지.”

힘없는 왕국을 최강의 제국으로 만들었다는 카신의 가르침.

견고했던 루터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역시 히나에겐 카신 님이 더 어울리지.’

카신의 달콤한 제안에 단단히 홀린 루터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루터가 카신에게 개인 지도를 받는 건 아주 축하할 일이었다. 루터는 마법 공부에 정말 열심이었지만, 타고난 마력이 부족했다. 루터의 노력을 알고 있는 히나도 그 점이 항상 안타까웠다.

매주 가던 집에 가지 않아 가족들과 친목을 쌓을 기회가 줄어든 건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카신의 별궁으로 가는 것도 기대되었다.

“개인 지도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도저히 감이 안 잡혀요.”

히나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마력을 높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근데 그게 가능한 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카신 님이 그렇게 말했으니 가능할 거예요!”

노력으로 마력도 높일 수도 있다니. 역시 카신은 대단했다. 히나는 제가 다뿌듯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었을 때, 몇몇 마법사님들에게 알려줬다는 그 마법일까요?”

히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당시의 마법사들은 마력의 양도, 능력도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그때의 마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물어봤어?”

그때 가르쳐 줬다는 마법에 대해서 히나도 궁금했다.

“물어보긴 했는데…….”

히나가 말끝을 흐리며 루터를 바라보았다. 그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히나의 공부는 대부분 루터가 봐주었다. 그녀는 일부러 카신에게 공부를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카신은 항상 책에 나와 있는 이론과 다른 설명을 해주었다.

카신이 기억하는 역사와 기록에 적힌 역사는 많은 것이 달랐다. 현재 마법 연구에 대한 소견이나 견해도 책과는 너무 동떨어졌다. 책에서 확실히 결과가 나온 이론을 완전히 부정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 알려지지 않은 사항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카신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걸 아는 루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물어봤는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난대요.”

“하긴. 엄청 오래되긴 했어. 기억이 나지 않을 만도 하지.”

잠시 고민하던 히나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거짓말일걸요?”

루터는 카신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줄 알았던 히나가 부정하자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분명 귀찮아서 말 안 하신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눈치가……. 그리고 카신 님은 제게 옛날 일 말해주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옛날에 어땠는지 물어보면 계속 말을 돌려요.”

의외였다. 히나가 묻는 거라면 뭐든 알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히나가 심각한 나이 차이를 느낄까 봐 그러는 걸까?

루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카신의 연구실에서 본 그 집착이라면…….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겠네.’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인 카신의 이미지가 갈수록 와장창 깨지고 있었다. 루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중에 또 물어봐야지.”

그 말에 루터는 픽 웃었다.

히나는 처음 봤을 때와 눈에 띄게 바뀌었다.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을 그간어찌 누르고 살았는지 모를 만큼 그녀는 호기심이 넘쳤다. 한번 궁금한 건 끝까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히나가 상급반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열심히 공부를 봐준 것도 있지만, 그녀의 탐구력과 열정 때문이었다. 같은 노력파인 루터는 히나의 집요한 호기 심을 아주 높게 샀다.

‘어쩌면 교수님과 히나는 이런 점에서 조금 닮았을지도.’

하나는 무섭고, 하나는 귀엽지만.

번뜩이던 카신의 눈동자가 생각나자 루터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무서운 집착을 보이는 카신에게 히나를 데리고 가도 되나 싶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마차야 돌리면 그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루터는 히나에게 다급히 물었다.

“히나, 너 교수님을 보면 아직도 막 가슴이 떨려? 껴안고 싶고, 또 입도 맞추고 싶고 그래?”

갑작스런 질문에 눈을 크게 뜬 히나가 곧 얼굴을 붉혔다.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만 봐도 그녀가 카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였다.

“묘약의 효능이 갈수록 더 강해지나 봐요. 요즘은 카신 님을 보면 가슴이 막답답해요. 계속 보고 싶기도 하고, 대화도 더 많이 하고 싶고 그래요.”

“그래?”

한껏 실망한 루터의 목소리에 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데, 억지로 라우너 형과 결혼시키는 것도 못할 짓이지.’

지위나 힘을 떠나서 히나는 카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귀족 사회에서 정략결혼은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평범하게 자란 히나는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더군다나 카신은 황제 폐하까지 눈치를 보는 인물이 아닌가. 그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었다.

‘나이가 아주 심하게 차이 나는 게 좀 많이 걸리지만.’

찝찝한 기분을 끝까지 떨치지 못한 채 루터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가까워지고 있는 대마법사의 작은 별궁이 어쩐지 거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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