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71화 (71/128)

71.

히나는 마치 다른 세계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와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다른 상황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저는 많은 걸 잘못 알고 있었어요.”

카신을 사랑하지만,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라고 단념했다. 욕심을 누그러뜨리고, 평생 그의 옆에서 돕고 사는 걸로 만족하려 했다.

어차피 그를 사랑한 건 사랑의 묘약 탓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사람을 옆에 두지 않는 그가 그녀는 특별 대우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의 삶에 진작부터 만족하고 있었으며,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이건 도망가는 게 아니었다. 하나씩 계획하고 이루었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어떻게 바로 받아들이겠는가.

히나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단단히 제 손목을 붙든 카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또 생각하려 했던 적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도 시간은 주세요, 카신 님.”

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히나는 그가 떨어지기도 전에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오늘은 집에 가야 될 것 같아요. 더는 별궁 시녀도 아닌 제가 카신 님이 계시는 별궁에서 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카신과 절대 이성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거라는 전제가 사라지자, 여기서 자는 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귀족 영애가 외간 남자와 함께 밤을 지새우는 건 낯부끄러운 짓이었다. 물론 그의 고백을 듣기 전까지 자신이 그러했듯이 다른 사람은 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겠지만 말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전 그만 갈게요.”

“……그래.”

가지 말라고 차마 붙잡지 못한 카신은 겨우 억눌러 대답했다. 그리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그녀에게 이동 마법을 걸었다. 아니면 그녀를 억지로 붙잡아 윽박지르며 대답을 강요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감돌자 히나가 놀라는 게 보였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히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아, 정말.”

카신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을 토해냈다.

마음이 같다. 거기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밝혔다. 한데, 왜? 대마법사라서? 나이 차이 때문에? 사랑은 하는데 그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다니?

히나가 조금 혼란스러운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 대마법사여서, 전혀 이성적인 상대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그에게 인간의 관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나마 친한 인간이라고 있는 게 루이스였다. 카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산에 능한 능구렁이 황제에게 물어보느니, 어디 사는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물어보는 게 나으리라.

“잠깐…… 짐승이라.”

짐승이라고 전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지.

카신은 순식간에 공간이동 마법을 시현했다.

[오랜만이군. 또 무슨 볼일로 온 거지? 신녀라도 들이닥쳤나?]

넝쿨이 무성하고 오래된 유적지 느낌이 나는 곳에 덩그러니 있는 커다란 블랙 드래곤.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드래곤은 콧김으로도 사람을 날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또 웅대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카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드래곤이 날개를 높게 쳐들었다. 날갯짓 하나로도 주변에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에 날리는 흙먼지에 카신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

“물어볼 거라니. 위대하신 대마법사가?”

손을 두어 번 휘저으며 대기를 안정시킨 카신이 눈앞의 미청년을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한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미남자가 그를 보며 히쭉 웃었다.

“재미난 거라도 발견했어?”

“그건 아니고.”

현 드래곤 로드인 칼피온은 카신의 즉각적인 부정에도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는 카신이 유일하게 친우 비슷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상대였다.

“뭐든 물어봐. 내가 다 답해줄게.”

그 무엇을 말하든 잡고 늘어질 분위기였다. 카신은 잠시 고민했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입 다물고 다시 돌아갈지.

꽤나 긴 세월을 산 드래곤들은 본래 인간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드래곤의 특성이기도 했다.

칼피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드래곤들보다도 더더욱 게을러서 이제는 유희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칼피온은 예외적으로 카신이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두었다.

“속 편히 말하라니까? 어서.”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칼피온을 보니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카신은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다. 계산적으로 달려드는 루이스에게 물을지, 아니면 끝까지 귀찮게 달라붙을 칼피온에게 물을지.

답은 금방 나왔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묻고 싶은데.”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던 칼피온이 곧 폭소를 터트렸다.

“그래, 이해해. 인간이면서 인간과 가장 먼 존재인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겠지.”

대놓고 무시하는 말투에 불쾌감이 치솟았다. 하지만 카신은 아주 훌륭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물었다.

“왜 대마법사는 연애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가 되는 거지? 나이가 문제인 건가? 아니면 신분?”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아무리 이질적인 존재여도 같은 인간인데, 왜 대마법사라는 이유 때문에 되지 않는 건지.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어째서 히나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는데 그걸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남의 이목을 굳이 신경 쓰진 않지만, 히나가 신경 쓰니 그도 계속 그 부분이 거슬렸다.

“연애 대상? 지금 나한테 진심으로 묻는 거야?”

칼피온이 이번엔 배를 잡고 폭소를 터트렸다. 치밀어 오른 불쾌감에 카신은 한 손에 거대한 마력을 응축시켰다.

“잠깐, 잠깐! 아니야, 싸우자는 게 아니라고!”

“답도 모르면서 그렇게 비웃은 거라면 당장 죽여 버릴 줄 알아.”

“아아, 내가 감히 대마법사님께 그럴 리가. 좀 봐달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칼피온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어서 말해. 왜 안 되는 거지?”

카신은 히나에게 고백할 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다. 히나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묘약으로 인해 괴로워했다는 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서로의 마음은 같은 거 아닌가.

하지만 대마법사여서 안 되고, 또 사랑의 묘약을 마신 거라서 안 된다니. 그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 대마법사라는 대상은 다른 인간 마법사가 아닌 너를 뜻하는 거지?”

카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아래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잡초만 무성한 땅에서 새싹이 피어오르고 단단한 줄기가 솟아올랐다. 단단한 줄기가 서로 얽히며 적당히 앉을 만한 의자가 만들어졌다.

드래곤도 따라 하지 못할 기이한 마법이었다. 나무줄기로 만들어진 의자에 카신이 앉는 걸 잠시 지켜보던 칼피온은 어서 말하라는 따가운 시선에 즉각 말을 이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인간을 연애 대상으로 본 적은 있어?”

“나는 달라. 애초에 나는…….”

“다르다니. 너도 인간이잖아? 인간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너도 인간이야, 맞지?”

딱히 부정하지 못한 채 눈살을 찌푸리는 카신을 보며 칼피온은 가볍게 웃었다.

“내가 지금 유희를 간다고 해도 인간을 연애 대상으로 볼 것 같아?”

“지금 네 얘기가 아니잖아. 넌 드래곤인데, 왜 네 얘기를 하는 거지?”

“있잖아, 로티우스.”

칼피온은 새까만 눈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다른 인간들도 너를 똑같은 인간 대우를 해줘?”

“다른 인간들의 생각 따위는…….”

“그래, 네게 관계없겠지. 하지만 네가 널 연애 대상으로 봐줬으면 하는 인간도 다른 인간들과 같은 부류 아니야? 아니면 너처럼 오랜 시간을 살거나 나처럼 드래곤이라도 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칼피온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카신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럼 그 애가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거야?”

“너도 널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잖아?”

이거였던가.

히나가 왜 당황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카신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지금 인간이 아니기도 하잖아, 로티우스.”

카신은 칼피온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갑자기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보다 누구야? 널 그렇게 심란하게 만든 인간이? 인간인 건 확실해? 여자겠지? 이거야 원, 무척 궁금한데?”

“궁금해하지 마. 그 이상으로 관심을 두면 죽여 버릴 거니까.”

“흐음,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아쉽군.”

여지도 주지 않는 카신의 단호함에 칼피온은 입맛을 다셨다. 카신이 한번 수틀리면 어찌 나오는지 아니,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 상대가 어찌 생각하든 밀어붙이라고. 설마 배려랍시고 물러나 기다리려고 하는 건 아니지?”

정곡을 찌르는 칼피온의 말에 카신은 겨우 태연함을 유지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는 걸 들킨다면 평생의 놀림감이 될 것 같았다. 고작 드래곤 따위에게 말이다.

“사랑의 묘약 같은 거, 만들 줄 알잖아? 그런 거라도 먹이라고.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들키지만 않으면? 들키면 안 된다는 건가?”

진심으로 묻냐는 표정을 짓던 칼피온은 곧 입을 쩍 벌렸다.

“당연히 들키면 안 되지! 그런 걸 만들 거나 언급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남자로서 부끄러운 짓이잖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신이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며 칼피온은 혀를 찼다.

“이것 봐. 네가 이러고도 당당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인간적인 생각을 드래곤보다 더 못하면서?”

“그래도 본질은 인간이야.”

“하, 여태 네 손에 죽은 드래곤들이 땅을 치며 비웃겠군. 드래곤 하트를 우적우적 씹어 먹은 인간이 어디 있다고.”

칼피온은 과거의 카신을 떠올렸다.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수많은 드래곤을 죽이고, 또 더한 힘을 취하기 위해 직접 죽인 드래곤 하트를 삼켜 버린 괴물을.

“원하는 건 무조건 갖는다. 그게 로티우스, 네 신념 아니야? 그 상대가 널 어찌 생각하든, 과거에 무슨 잘못을 했든 전부 묻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칼피온은 카신이 앉아 있는 의자 옆, 바닥에 앉아 팔걸이에 팔을 괴며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몇 번이나 빠르게 깜빡인 그는 호기심 충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힘들면 도와줄까?”

“아니.”

카신의 입에서 즉각 거절이 튀어나왔다.

“난 네까짓 것의 조언을 들으러 온 게 아니야. 네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그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그 이상은 관심 꺼.”

옆에 칼피온이 앉아 있든 말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인간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물으러 온 거야. 내가 왜 거절을 당했는지 궁금했거든.”

말 그대로였다. 히나와 철천지원수 지간이라도 상관없다. 지금은 어떻든 간에 그녀는 결국 그의 품에 오게 될 것이다.

“성격 여전하시네.”

짧게 휘파람을 불며 칼피온은 뒤로 물러났다.

카신은 인간들 사이에서 뜬구름과 같은 소문만 무성하지만,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한때 모든 드래곤을 학살하며 다니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카신의 성정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성격, 부디 네 상대에겐 꼭꼭 숨기길 바라.”

칼피온은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지는 카신을 보며 큭큭 웃었다.

“관심 끄라고 했는데.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나.”

카신을 안달 나게 한 상대.

궁금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