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72화 (72/128)

72.

“무슨 일 있었지? 그렇지?”

계속되는 루터의 추궁에도 히나는 입술을 꾹 다물기만 했다.

“너 설마…….”

루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움찔 떠는 히나를 천천히 관찰했다.

“교수님이 네게 파렴치한 짓이라도……!”

“그런 거 아니에요!”

히나가 다급히 루터의 입을 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있는 학생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점심을 먹기 바빴다.

“그럼 왜?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그날 자고 온다던 애가 갑자기 집에 오질 않나, 툭하면 멍 때리고. 계속 이상하잖아!”

몇 번이고 주변을 확인한 히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조용히 말해요, 오라버니.”

점점 일그러지는 루터의 표정에 히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뗐다.

“카신 님은 제게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어요. 이상한 말은 했지만.”

“무슨 말?”

히나의 눈이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한 루터에게 향했다.

‘믿어줄까? 나도 아직 믿기지 않는 걸?’

히나는 그날의 일이 꿈이 아닐까, 하고 몇 번이나 의심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수정구를 통해 오던 카신의 연락이 끊긴 걸 봐선 꿈은 아닐 것이다.

“고백이라도 받은 거야?”

확신이 담긴 루터의 목소리에 히나는 퍼뜩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요?”

루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럴 것 같았으니까.”

“누가요? 내가 티 난 거예요? 아니면 교수님이 티 낸 거예요?”

“둘 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을 한 히나를 보며 루터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네가 무슨 일 있다고 얼굴에 적어놓고 다니고 있잖아. 거기다 그날, 교수님 눈은 꽤 진지했잖아? 그래도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도와주겠다고 하자마자 바로 고백해 버리다니.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게 빨랐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인물이 말이다.

“교수님이 진지했다고요? 정말요? 난 그런 거 못 느꼈는데.”

행동력이 빠를 수밖에 없는 건가?

루터는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히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카신의 그 뜨겁고 강렬한 눈빛을 왜 보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알고 있는 거예요?”

“뭘? 교수님이 너 좋아하는 거?”

대놓고 말하자 히나가 부끄러운 건지 얼굴을 살며시 붉혔다.

“당연히…….”

루터는 고개를 돌려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떨며 점심을 즐기고 있는 학생들을 한 번 훑었다.

“모르겠지. 알 리가 있겠어? 여기 있는 전부, 교수님이 널 단순히 특별하게 대한다고만 생각하고 말겠지.”

카신이 히나를 특별하게 대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 이성적인 감정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카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전제 자체를 두지 못하고 있었다. 루터도 카신의 불같은 질투를 직접 겪지 않았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죠? 모르는 게 당연한 거죠?”

“당연한 건 아니지! 쟤네들은 멀리서 지켜보는 방관자고 넌 당사자잖아. 눈치 좀 키워라, 이 둔탱아.”

히나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카신 님의 연인이라니. 생각 못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기도 하지.”

대마법사의 아내.

루터도 직접 듣지 않았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신이 히나를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전 어쩌면 좋죠, 오라버니?”

뭐라고 대답하지? 도와주기로 했으니 잘됐다고 부추겨야 하나?

도움을 구걸하는 히나를 보며 루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도와주기로 했지만, 무조건 히나를 갖다 바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 그리고 이건 또 비밀인데…….”

“뭔데?”

루터는 갈수록 더 작아지는 히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제가 마신 게 사랑의 묘약이 아니었대요. 그냥 절 벌하려고 그렇게 말한 거였대요.”

너무 기가 차서 루터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수습을 어떻게 할지 조금 걱정이 됐지만, 사실을 밝힐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 그냥 묘약의 효능은 진작 끝났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히나가 묘약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까지 말했는데 왜 그 사실을 말하는 건지. 그러면 가지고 놀았다는 것밖에 되지 않은가.

답답함이 몰려오자 루터는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있잖아, 히나.”

말도 안 되는 대답이라도 간절한 히나가 루터에게 다가가며 귀를 기울였다.

“그게 사랑의 묘약이 아니면 넌 정말 대마법사님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거였잖아? 그럼 오히려 잘된 거 아니야?”

“하지만 대마법사님이라고요.”

“마법사들의 살아 있는 전설을 연애 대상으로 보는 게 힘들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상대가 좋아한다고 마음을 고백했으니까 너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맞는 거잖아?”

어엿한 오라버니다운 그럴듯한 자신의 말에 루터는 혼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가 마신 게 사랑의 묘약이 아닌 것도 알았으니까, 여태 네가 교수님께 가진 마음을 정리하고 답을 해줘.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인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리고 사랑의 묘약은……. 교수님이 조금 너무한 것 같지만 잊자. 그건 네가 잘못해서 벌을 받은 거라며. 그래도 진짜가 아닌 게 어디야. 그런 복잡한 건 다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좋은 거야.”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히나가 선택하게 해야 했다. 물론 이미 마음이 카신에게 있는 히나의 선택은 하나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 정도까지 도와주는데, 나한테 넙죽 엎드려 고맙다고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거다.’

카신의 협박과 훈련을 빙자한 폭행을 떠올리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루터는 스스로가 아주 관대한 사람이라 여기며 히나에게 의젓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거든 교수님한테 이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지인을 소개해 달라고 해봐. 누군가가 너와 교수님을 객관적으로 보면 너도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빠진 히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역시 오라버니는 모르는 게 없군요! 정말 대단해요.”

“뭘 이 정도 갖고.”

루터가 히쭉 웃자 히나도 따라서 헤헤, 웃었다. 진작 말하면 됐을걸,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며칠 동안 머리를 어지럽힌 이 일을 끝낼 수 있다는 해방감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 * *

“소개해 주세요.”

카신은 다짜고짜 찾아와 무리한 요구를 하는 히나를 보며 하고 있던 모든 행동을 멈췄다.

“누구를?”

“전에 친구라고 하신 드래곤이요. 오늘 소개해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카신은 겨우 평정심을 유지했다.

“왜 갑자기 그를 소개해 달라고 하는 거지?”

그거 말고 할 말이 있잖아?

“전 카신 님을 이성…… 아무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 누구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객관적으로 우리를 봐줄 분이 필요해요!”

그가 생각한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히나가 먼저 선수를 치며 답했다.

“우리를 연인으로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라면 네 오라비가 있지.”

카신은 루터가 굳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리베리아 군은 내 마음을 진작 알고 있었으니 가서 물어보렴. 그리고 내게 답을 해주겠니?”

며칠을 기다렸다. 히나가 매일 밤마다 짧게라도 하던 연락을 하지 않아도 인내했다. 기다려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애가 타다 못해 가슴이 잿더미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주말이 되면 히나를 불러다가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쓰더라도 어떻게든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러했으리라.

“오라버니는…… 예외예요. 오라버니 말고 다른 분이요! 카신 님이 알고 있다는 그 친구분이 좋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카신은 칼피온과 히나를 되도록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전에 히나에게 소개를 해준다고 했지만, 그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말에 불과했다.

‘히나를 보이기엔 위험해.’

드래곤이라서 위험한 게 아니었다. 칼피온은 카신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과거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모두 말이다.

“만나게 해주실 거죠?”

순진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히나를 보니 차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분을 보고 나면……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차라리 기다리는 게 낫지.

카신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번 주말이 오면 만나게 해주마.”

도마뱀 따위, 히나에게 같잖은 수작이라도 부린다면 힘으로 굴복시키면 그만이다. 카신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 * *

처음엔 ‘카신의 친구라면 자신들의 관계를 이상하게 보지 않겠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말이 다가올수록, 그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미지의 생명체라는 것에 긴장이 됐다.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커다란 날개에 저택보다 더 큰 몸, 그리고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많은 마물도 죽일 수 있는 강인한 꼬리.

‘내가 인간이라고 싫어하면 어쩌지?’

히나는 마법학을 공부하며 드래곤에 대한 기록을 잠깐 본 적 있었다. 강인하고 용맹한 드래곤은 아주 게으르고 나태하여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드래곤은 대체적으로 지혜롭고 현명하다. 하지만 포악한 성정 때문에 인간은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만난다고 해도 살아 돌아오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봐야 했다.

간혹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하여 유희를 즐긴다고는 하지만, 그건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다. 실제로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을 인간이 알아채는 경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히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카신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니, 그냥. 드래곤은 얼마나 클까에 대해 생각했어요.”

눈동자 색은 어떨까?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단순한 집이 아닌 대규모 저택과 비교를 한 걸까?

“그리고 절 싫어하면 어떨까에 대해서도요. 카신 님의 친구분께 미움을 받고 싶지 않거든요.”

고작 드래곤에게 미움을 받을까 고민했다는 히나의 말에 카신의 얼굴이 잠시간 굳었다. 하지만 카신의 친구이기 때문에 잘 보이고 싶다는 히나의 속뜻을 읽고 그는 바로 얼굴을 풀었다.

“널 싫어할 일은 없을 게다. 그는 널 궁금해했거든.”

보고 싶어 미치려고 해서 협박을 하고 왔단다.

“정말요? 최근에도 만나신 거예요?”

“얼마 전에 잠깐 봤지.”

“두 분은 정말 친하신가 봐요.”

그다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막으며 카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앞에 서 있던 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나가 눈앞에 있는 그의 손을 힐끗 보며 얼굴을 살며시 붉혔다.

“거리가 꽤 멀단다. 잘 붙잡고 있으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착하게도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 따스한 온기가 좋아 카신은 마법을 천천히 발동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무척 짧았다.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싫은 카신은 마법을 느리게 쓰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는 형형색색의 빛이 몸을 두르는 걸 보며 다음엔 마법을 천천히 쓰는 법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와아.”

히나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풀토 공작의 영지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있는 시골에서 자란 히나는 큰 나무나 무성한 풀숲에 익숙했다.

하지만 드래곤 레어 안에 있는 높다란 나무와 무성한 풀숲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 우물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았다.

“로티우스?”

드래곤을 만나러 간다고 인지하자마자 히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드래곤을 마주할 상황을 상상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 까만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미청년은 전혀 드래곤을 연상시키지 않았다.

“이런. 로티우스만 온 게 아니로군.”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남자가 순식간에 히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언제 왔는지, 걷기는 한 건지 전혀 보지 못했다.

“아가씨 이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남자의 눈동자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까만 보석처럼 빛나는 눈은 예쁘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어디서 봤지?’

까만 머리나 까만 눈동자는 넓고 커다란 제국에서도 흔치 않은 색깔이었다. 히나도 흑요석과 같이 까만 눈이나 머리카락은 처음 보는 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말 못 해?”

위험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기운에 깜짝 놀란 히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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