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전반적으로 티타임은 즐거웠다. 칼피온은 말을 재미나게 했고, 히나는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카신만이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섬세한 마법은 뭐예요? 카신 님이 섬세한 마법을 쓰나요?”
아까 칼피온이 카신만큼 섬세한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 히나가 물었다. 마법학을 공부하고 미래 유능한 마법사가 될 동기들이 있지만, 마법의 종류나 정도를 구별하긴 어려웠다.
“모르는구나? 로티우스의 마법은…….”
“그만 가지, 히나.”
칼피온의 말을 끊으며 카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얘기 도중에 말을 끊으며 가는 것이 미안한지 히나가 칼피온의 눈치를 봤다.
“내게 궁금한 건 가는 길에 직접 물어보거라.”
칼피온은 슬쩍 카신을 보았다가 바로 눈을 돌렸다.
‘일 났다. 진짜 화났어.’
히나의 앞이라 티를 내고 있지 않지만, 카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칼피온은 이러다 나중에 정말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나 앞에서 승질을 죽이는 카신이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했다. 히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좋아서 잡아둔 것도 있었다.
“그래, 히나.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야지. 얘기는 다음에 또 하자.”
칼피온은 죽을 각오를 하고 히나와 다음에 만날 여지를 만드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나 카신의 싸늘한 시선이 닿았다.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돼요?”
잔뜩 아쉬운 얼굴을 하는 히나를 보며 칼피온은 히죽 웃었다.
“그럼! 날 불러도 돼. 참, 이거. 이걸 부르면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칼피온이 내미는 까만 피리를 보며 히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까맣고 단단해 보이는 피리는 어쩐지 기분을 조금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 히나는 성력을 갖고 있다고 했지.”
선뜻 피리를 잡지 못하는 히나를 보며 칼피온은 피리를 쥐고 있는 손에 다른 종류의 마력을 응축시켰다.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피리였다. 다른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블랙 드래곤인 그의 비닐은 상반된 힘을 가진 히나에게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칼피온은 자연계 속성의 마력으로 피리를 한 겹 봉인한 후 다시 내밀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더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히나가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피리를 받았다.
“고마워요, 칼피온.”
“이제 가자, 히나.”
히나가 인사하기 무섭게 카신이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공간이동 마법을 펼쳤다. 히나와 카신이 사라지자마자 히죽 웃고 있던 칼피온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엘레샤르.”
“예, 칼피온 님.”
“귀하고 맛있는 차를 종류별로 구해놔. 다음에도 저 인간 여자가 네 차에 반하게.”
“예, 칼피온 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드래곤에 겁을 먹지 않는다면 어린 인간 여자에게 호감을 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칼피온은 다음에 히나를 만날 걸 기대하며 픽 웃었다.
“로티우스, 이제부터 네 세상은 끝이다, 끝.”
인내심이 한계에 찬 카신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무지막지하고 제멋대로인 카신의 새로운 모습에 앞으로가 기대되었다.
* * *
“드래곤을 만난 것도 모자라 차까지 대접받다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몸짓만 컸지, 별로 대단할 건 없단다.”
탐탁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 카신은 히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보다 히나.”
답지 않게 아까부터 긴장을 하고 있었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칼피온이 히나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탓이었다.
그에 비해 신이 난 히나를 보니 조금 얄밉기도 했다. 카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를 평범하게 봐주는 시선이 필요했던 거지?”
히나가 어째서 칼피온을 만나고 싶었는지는 대충 안다.
제국에 있는 모두가 그를 신적인 존재로 보고 있었다. 아예 같은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그가 히나를 특별 취급 해도, 여자로 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 정도 대화를 했다면 너도 이제 답을 내렸겠지.”
카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칼피온과 히나를 절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그의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칼피온만은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칼피온과 히나를 만나게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히나가 답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를 후작가에 가기도 전에 잡아다 별궁에 가둬 버렸을 것이다.
“이제 대답을 해주겠니?”
히나는 고개를 돌려 카신을 바라보았다.
“카신 님이 좋아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밝아지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직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조금 더 시간을 주세요. 제가 더 생각할 수 있도록요.”
안 된다. 이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하지만 카신은 결코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기다려 달라는 히나에게 어떻게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을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카신은 히나가 점점 멀어지고 그 모습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 허탈하게 허허, 웃었다.
“젠장.”
웃음이 뚝 끊기자마자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순진한 히나가 사내의 순수한 사랑을 갖고 밀고 당길 만큼 영악할 리 없다. 적어도 그녀는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카신은 히나를 굳게 믿으며 다시 공간이동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있었던 드래곤 레어로 돌아오자마자 손안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자, 잠깐! 여긴 집 안이라고!”
칼피온이 다급히 외쳤지만, 카신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일단 이동부터…….”
힘들게 만들어놓은 운치 가득한 오두막집이었다. 몇 년을 고생해서 만든 건데 카신의 손에 부술 순 없었다. 칼피온은 다급히 이동 마법을 시현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날아왔다. 이동 마법을 급하게 건다고 보호 마법은 생각도 못 한 그가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몸을 굴려 피했다.
“그 인간 계집, 아니, 그러니까 히나도 좋아했잖아! 로티우스, 일단 들어봐, 응?”
“네가 감히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지. 안 그런가?”
카신의 손에서 또다시 마력이 응축됐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카신의 손 위로 수십 개의 마력 덩어리가 생성되고 있었다.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마력이었다. 칼피온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잠깐, 잠깐! 여기서 내가 죽으면 큰일 난다고!”
“고작 드래곤 하나 죽는 것 가지고 호들갑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목소리였다. 칼피온은 카신이 한 말이 진심인 것을 깨닫고는 그의 관심을 끌 만한 말을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그 어떤 종족보다 뛰어난 두뇌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카신의 귀를 솔깃하게 할 주제를 찾는 건 어려웠다. 방금 전 히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은 이대로 죽었을 것이다.
“난 귀족 영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
아주 찰나의 순간, 카신의 행동이 멈췄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칼피온은 조금 더 그를 자극할 만한 말을 꺼냈다.
“성력! 그래, 성력이란 힘을 알아! 조절하는 방법도 대충 알 것 같다고!”
카신의 주변으로 생겨났던 수십 개의 마력 덩어리들이 한순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네가 그 힘을 안다고? 고작 네가?”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생물이었다. 절대 이렇게 무시를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칼피온은 카신의 홀대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기분은 나빴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로티우스, 넌 인간들하고 섞여 살지 않았잖아? 난 다르다고! 수백 번의 유희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만났는 줄 알아?”
“그게 정말 히나와 같은 힘이었나?”
카신은 의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희귀한 힘이 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탓이었다.
‘신력이 높은 신녀가 일생을 바쳐 기도하여 만들어진 힘이 또 있었다고?’
신녀로서 힘이 늦게 깨어난 세이나, 그리고 때마침 들키지 않고 하게 된 임신과 출산, 거기다 신앙을 초월한 모성애.
그런 우연히 또 겹칠 수가 있을까?
카신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칼피온을 관찰했다. 그는 헛소리를 자주 늘어놓긴 해도 바로 들킬 거짓말을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과거에 버림받은 신녀가 낳은 아이를 본 적 있어. 그 아이에게서 이런 비슷한 힘을 느낀 적 있어. 히나처럼 강하진 않았지만.”
신녀가 낳은 아이.
증폭되던 의심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카신의 주변에 생성된 마력 덩어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드래곤은 쓸데없는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지.’
한번 믿어볼 만했다. 그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다른 종족에게 드래곤은 지혜롭고 현명하기로 소문난 생명체였다.
“조금 더 얘기해 봐.”
카신에게 공격할 마음이 사라진 걸 깨달은 칼피온은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 힘이 깨어난 건 나랑 닿고 나서부터였어. 상반된 힘이 닿아서인지 그런 비슷한 힘이 나타났어! 엄청 희미했지만, 같은 힘이 확실하다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과거를 억지로 끄집어내며 칼피온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 아이, 제 목숨을 희생시켜서 전쟁을 멈췄어.”
“……목숨을 희생시켰다고?”
전쟁이 멈추지 않았던, 황폐했던 시대에 태어난 아이였다. 신력이 약해 치유의 힘조차도 내지 못했던 신녀는 결국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신녀는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 중에 애지중지 아이를 낳아 길렀다.
“처음엔 그 어떤 기운도 나타나지 않았어. 우연히 내 힘과 닿았는데, 그 힘이 깨어나 버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왕국의 귀족으로 있을 때였다. 아이의 앞에서 병사들에게 겁탈당할 뻔한 여자를 구했다. 암만 그가 인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 광경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해도 신녀라면 다시 전쟁터로 불려올 것이다. 칼피온은 아이를 전쟁이 없는 지역으로 돌려보내고, 힘없이 늘어진 여자가 편해질 수 있도록 죽일까, 잠시 고민했다.
“네 힘과 닿았다고? 유희 중에 힘을 낸 건가?”
“정확히는 내 힘이 담겨 있던 검과 닿았어. 아이가 내 칼을 잡았거든.”
아이가 제 어미를 죽이지 말라며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살려달라 빌었다. 칼날에 닿은 아이의 작은 손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빛이었다.
“그때부터 좋은 기운이 났어. 죽기 전, 마지막에 낸 힘은 조금 슬펐지만.”
아이가 죽기 전,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 나갔다. 그중에는 아이의 어미도 있었다.
아이에게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힘이 강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마력 폭주처럼 힘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힘, 편리해 보이지만 나중엔 엄청 위험한 대가가 따르는 힘이라고.”
전쟁이 지긋지긋해져 유희를 마치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칼피온은 그 아이의 최후가 궁금해서 남아 있었다.
어째서 그때의 일을 잊고 있었을까.
칼피온은 아이가 마지막으로 짜냈던 서글픈 힘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애초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남의 행복을 빌어주고 슬픔을 없애주는 힘이 어디 있겠어?”
아이가 가진 힘은 너무 희미했다. 하지만 아이의 간절함으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해져 갔다. 특히 죽기 전 아이가 냈던 힘은 너무 따뜻하고 평온해서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는 힘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무작정 좋은 기운을 강하게 뿜어내는 히나와 미처 연결 지어 생각하질 못했다. 아이가 죽고 꽤 긴 시간이 흐른 탓도 있었다.
“분명 한계가 있을 거야. 한계가 넘어가면 생명을 담보로 힘을 쓰도록 되어 있는 거겠지. 그러니 어서 그 힘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을걸? 아니면 나중에 스스로 폭주해 버린다고.”
아이는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사람이 죽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주 간절히.
그 순간 스스로 폭주했다. 서글픈 마음이 담긴 그 힘은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힘과 닿은 인간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이내 전의까지 상실하였다. 드래곤인 그조차도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엄청 편리한 힘이잖아. 무엇이든 쉽게 현혹되는 게 인간이야. 그 힘을 소소하게 쓰는 걸로 만족하면 다행이지만,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면 그 아이처럼 쉽게 폭주해 버릴지도 몰라.”
“다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폭주한다는 건가.”
“뭐, 내가 봤던 힘은 그랬다는 거지. 하지만 히나는 다를 수도. 힘의 크기가 다르니까.”
그 시대의 슬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어미의 간절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힘은 큰 희생을 요구했다. 칼피온은 한 번 본 그 힘에 자연히 관심을 가졌다.
한때 세상을 미친 듯이 떠돌았던 건 단순히 유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힘을 찾아 조금 더 자세히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비슷한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어서 성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말해.”
카신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칼피온은 드래곤보다도 더 위험스레 빛나는 카신의 눈동자를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건 예측일 뿐인데…….”
시험해 본 건 아니었다. 선명한 기운을 내는 히나와 달리 아이의 힘은 죽기 직전까지 아주 희미했다. 그 미세한 힘으로 별달리 실험을 하거나 조사를 해보지도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럴 결심이 드는 순간 아이는 죽어버렸으니까.
“어서 네 멍청한 머리로 생각해 낸 걸 말하라고.”
확 말하지 말까 보다.
잠시 망설였지만, 카신의 눈이 무척 사나웠다. 칼피온은 언제 망설였냐는 듯, 술술 말했다.
“어둠의 힘으로 눈을 뜬 힘이니 어둠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확실한 사실이 아닌 만큼 조심스럽게 말하는 칼피온을 보며 카신의 눈이 한층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