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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76화 (76/128)

76.

히나는 오랜만에 보는 루이스에게 귀족 영애답게 치마를 잡으며 공손하고 예쁘게 인사를 올렸다.

“레이디로 부족함이 없네요.”

옆에서 눈에 띄게 부른 배를 매만지고 있던 황후가 그런 히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후작가에 들어간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카신에겐 말하지 않고 온 만찬 자리였다.

“그보다 히나, 카신에게 고백받은 일은 어찌 되었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친해진 루이스가 히나를 편히 부르며 물었다.

카신에 관련된 고민은 루터에게만 털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세세하게 말할 순 없지만, 루이스에게도 고민 상담을 했다.

‘루터 오라버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못 미더운 부분도 있고.’

루터는 카신에게 개인 훈련을 받는 제자였다. 그러니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다르다.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는 믿음직한 성군이자, 카신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루이스에게 의견을 묻고 싶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편해진 것도 있었으며, 서면이라서 조금 더 쉽게 마음을 털어놓은 것도 있었다.

“그게 조금 화가 나는 거 있죠?”

루이스가 턱을 괸 채 히나의 얘기를 경청했다. 헬렌도 흥미로운 눈을 한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히나를 응시했다.

“저한테 차도 못 탄다고 하고, 힘들게 쓰게 된 성력도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하고. 아무리 제가 부족하다고 해도 너무한 것 같아요.”

“그러게 내가 말했지 않나. 처음부터 세게 나가야 한다고. 연애는 시작 전부터 우위를 점해야 해.”

“어머, 폐하께서는 제게도 그러셨던 건가요?”

“그럴 리가. 나는 카신처럼 노련하고 계산적인 남자 앞에서 그래야 한다는 거야. 내가 황후에게 로맨티시스트인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않나.”

루이스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헬렌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 가볍게 키스했다. 히나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걸 보며 루이스는 키득거렸다.

“히나, 카신은 엄청 노련한 남자라네. 원하는 말이나 상황을 언제든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절대 카신이 원하는 말을 쉽게 해주지 말라고.”

“폐하 말씀처럼 저도 이제 카신 님한테 네, 하고 대답만 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하잖아요. 루터 오라버니는 그냥 넘기라고 했지만, 사랑의 묘약이라고 속이고 먹인 거나, 당연히 바로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히나가 결코 밀고 당기기를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카신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었다.

“하하! 그렇지, 그렇지. 카신은 제가 잘난 걸 너무 잘 알아. 물론 독보적인 힘을 갖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실패도 해보며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고.”

기분이 좋아진 루이스가 이제는 체통을 잊고 껄껄 웃었다. 카신이 예상치 못한 히나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렸을 걸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보다 너무 의외라서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도대체 대마법사께서는 레이디 리베리아의 어떤 점에 끌렸던 건가요?”

헬렌이 여전히 귀엽기만 한 히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레이디를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대마법사께서 사랑을 하는 게 신기해서요.”

루이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의외로군.”

루이스는 카신이 히나를 애완동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가끔 히나가 보낸 편지를 헬렌과 공유하며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다.

“카신이 사랑을 한다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루이스는 히나가 서면으로 수줍게 고민 상담을 해오자 깜짝 놀랐다. 꿈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편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인 것을 자각하자마자 냉큼 답장을 보내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저도 아직…… 실감이 가지 않아요. 카신 님께 특별한 감정은 있었지만, 상상도 못 했거든요.”

뺨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전하는 히나를 보며 헬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가져서인지 아이처럼 순수한 히나가 어여뻐 보였다.

“그래서 언제 마음을 받아줄 생각인가요? 전 뜻대로 풀리지 않아 쩔쩔매는 대마법사님의 모습도 궁금하지만, 사랑에 빠져 다정하게 구는 대마법사님이 더 보고 싶거든요.”

옆에서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카신이 사랑에 빠져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전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평소에 히나를 과보호하던 걸 떠올리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기도 했다.

“언제 받아주는 게 좋을까요?”

히나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카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컸지만, 루이스의 말대로 카신은 워낙 노련했다. 시녀나 보조 격으로 있는 거면 몰라도, 동등한 입장이 되는 연인 사이에 그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며 마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카신 님이 너무 좋아서 당장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기도 한데, 폐하의 말씀처럼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막상 받아들이려니까 조금 무섭기도 하고요.”

그래도 카신에게 고백을 받고 계속해서 상상을 하자 그와 연인이 된 모습이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누구보다 오래 살아서 수많은 경험을 하신 분이잖아요. 인생이 지루하다고 말하실 만큼요. 그러니까 저만큼은 뜻대로 흘러가는 당연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 점은 노력하고 싶어요.”

언제부터 히나가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을 만큼 큰 걸까?

루이스는 처음 봤을 때 미숙하기만 했던 히나를 떠올렸다. 일 년이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온 걸까를 생각하니 잘 키운 딸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지금의 히나라면 카신의 마음을 받아줘도 되지 않을까 싶네. 이렇게 똑 부러지니 굳이 내게 조언을 구하지 않아도 카신에게 잘 어울리는 레이디가 될 것 같군.”

“정말인가요?”

“그보다 히나, 티타임 때 황후에게 성력을 보여주지 않겠나? 황후가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네.”

“네, 폐하.”

루이스에게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히나가 히죽 웃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스스로가 많이 성장한 것 같아 뿌듯했다.

* * *

“제대로 도운 게 맞나?”

루터는 억울했다. 기껏 사랑의 묘약 건을 넘기게 해줬는데 이런 취급을 받다니. 하지만 그는 힘이 없었다.

“저는 히나에게 사랑의 묘약도 신경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다고요.”

개인 지도를 가장한 일방적인 폭력 시간을 겪고 난 후라 더 지쳤다. 일어날 힘도 없는 루터는 자신이 그간 했던 노력을 피력했다.

“히나의 마음도 전부 알려 드렸잖아요. 원래 이렇게까지 알려주면 히나에게 무척 실례되는 건데…….”

점점 작아지는 제 목소리에 루터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나 더 따지고 들기엔 카신의 표정이 너무 험악했다. 어째서 도와주는 사람이 설설 기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라우너였다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순간, 공자임을 잊고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루터는 자신에게 막 대하는 카신에게 심술이 났다.

“사실은 히나가 그만큼 교수님을 좋아하지 않는 게…….”

조금 반항을 해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주변에 맴도는 공기에 무서운 기운의 마력이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온 신경이 곤두설 만큼 팽팽해지던 공기가 탁 풀렸다. 저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쉰 루터는 어째서 카신이 사나운 기운을 감췄는지 바로 깨달았다.

똑똑.

“카신 님, 계세요?”

문밖에서 히나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교수님을 믿는다지만, 지금 몇 시인데 여길 오는 거야?’

루터가 야밤에 카신의 연구실까지 찾아온 히나를 나중에 꼭 나무라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카신이 그에게 마법을 걸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이동 마법으로 몸이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루터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며 카신은 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니, 히나? 곧 기숙사 통금 시간에 걸리지 않니?”

히나가 이렇게 늦은 시각에 찾아오는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이 시간에는 카신이 기숙사에 몰래 찾아가는 것도 그녀는 불안해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해도 쫓아낼 만큼.

밤에는 항상 수정구를 통해서 말했기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히나로 인해 당황스러웠다.

“통금 시간에 걸리지 않게 카신 님이 수를 써주시면 안 될까요? 저 하나 몰래 들어가게 해주실 수 있죠?”

개인적인 부탁이나 편애는 무조건적으로 사절하는 히나가 이런 말을 직접 하다니.

카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히나를 살폈다. 어디가 아프거나 곤란해 보이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혹시 수정구를 잃어버렸니?”

“아니요. 직접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언제부터 히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게 되었지?

히나가 자신의 수업을 듣지 않으면서 만나는 횟수가 거의 줄어들었다. 주말에는 루터로 인해 계속 집에 갔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 히나가 연구실로 직접 찾아오거나 그가 기숙사로 찾아가지 않는 이상 만나기 힘들었다.

‘대부분 수정구로 얘기했지. 이렇게 눈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으니까.’

수정구를 통해 거의 매일같이 대화를 나눴지만, 대부분이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였다. 학교를 다니는 그녀의 하루 일과는 무척 단조로웠기 때문에 히나가 꽤 많이 성장하고 변했다는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일단 앉거라.”

카신은 올곧은 눈으로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히나를 보니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가 모르는 새에 훌쩍 성장한 것도 모자라 속내를 꽁꽁 숨기는 그녀가 혹여 거절이라도 할까 싶었다.

‘히나가 내 고백을 받아들일 거라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던 거지?’

같은 마음이니 당연히 히나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조금 혼란스러워하겠지만, 그건 그녀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고 술렁술렁 넘겨 버리면 그만이라 여겼다. 약은 계획이었지만, 히나가 관련된 이상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카신 님께 대답을 하러 왔어요. 마음이 정리가 됐거든요.”

긴장되는 건지 히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행동에 카신은 덩달아 더 긴장됐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쭙고 싶어요.”

물어도 좋다는 듯, 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히나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카신 님은 제 어디가 좋은 건가요?”

뜻하지 않는 질문에 카신은 말문이 막혔다.

어디가 좋냐고? 전부 다 좋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어리숙한 실수도, 순진한 구석도, 야무진 모습도, 최근 똑 부러진 행동도 전부 다 마음에 들었다.

“아니, 제가 무슨 행동을 해서 좋았나요?”

고개를 저으며 히나가 급히 질문을 바꾸었다. 카신은 그녀가 했던 행동 중 가장 좋았던 걸 떠올렸다.

‘이걸 말하면 날 엉큼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순진하다고 생각할까?’

카신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마. 나는 네가 내게 안아달라며 어리광을 부렸을 때가 가장 좋았단다. 가끔 내게 안겨올 때도 꽤 설렜지. 그건 내게만 허락된 거니까.”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히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런 것에 부끄러워하다니.’

카신은 품 안에 안긴 모습을 보며 더한 짓을 하고 싶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때의 감정을 조금 더 섬세히 말했다.

“네가 안기고 나서 처음으로 내 키가 커서 꽤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 네가 내 품에 꼭 파묻히는 게 좋았거든.”

눈을 크게 뜨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히나가 곧 정신을 차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제법 진지해지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카신은 방금 전까지 긴장했다는 것도 잊고 픽 웃었다.

“저는 연인은 서로 동등한 입장이어야만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평민이라서 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전 그러고 싶어요.”

히나는 조심히 제 생각을 밝혔다. 힐끗, 카신을 보니 딱히 불쾌해하거나 못마땅해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특히 카신 님은 자유로운 분이고, 귀족의 굴레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니까…….”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수십, 수백 번을 준비한 말이지만, 막상 카신에게 말하려니 떨렸다.

히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카신을 보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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