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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77화 (77/128)

77.

“연인이 된다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해주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카신이 무슨 뜻인지 더 생각하기도 전에 히나가 설명했다.

“연인이 되면, 저는 차를 맛있게 끓이지 못하니까 시녀를 시키거나 카신 님이 끓여주세요. 대신 전…… 카신 님이 좋아하는,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해드릴게요.”

“안아주는 걸?”

카신이 대놓고 묻자 히나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하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똑히 말했다.

“네. 차를 맛있게 타진 못하지만, 안아드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저도 카신 님과 아, 안는 건 좋아하니까요.”

“흐음.”

역시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작 안아주는 걸로 유세를 떠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히나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당당히 말했다.

“그 외에도 카신 님이 좋아할 만한 걸 계속 연구해서 더 많이 해드릴 거예요! 카신 님은 성력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엄청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성력으로도 아주 많이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어요!”

“그것참 좋구나. 나의 귀여운 연인 덕에 앞으로 아주 행복해지겠어.”

“카신 님을 꼭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카신은 남자가 해야 할 말을 제법 호기롭게 외치는 히나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남녀가 뒤바뀐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지금 당장 성력으로…….”

말을 하다 멈춘 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카신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부터 기쁘게 해드릴게요.”

“오늘은 누구에게 미리 쓰고 오는 길이지?”

아직 히나가 성력을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카신이 물었다.

“그게……. 비밀이에요.”

히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황후마마에게 성력을 썼다고 말할 수 없었다. 루이스와 만난 사실은 최대한 비밀로 해야 했다.

무엇이든 능수능란한 카신이 그녀와 루이스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아내면 큰일이었다. 루이스는 믿지만, 카신의 능력을 생각하면 뭐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

카신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히나, 우리는 방금 전에 연인이 되지 않았니. 연인이 되자마자 비밀이라니, 조금은 섭섭하구나.”

히나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부터 동등한 입장이니까! 그러니까 서로의 사생활은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는 걸로 해요!”

당장 도망갈 얼굴을 한 히나를 보며 카신은 천천히 일어났다.

히나가 누구에게 성력을 쓰고 왔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오늘 그 상대를 캐내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막 연인이 된 참인데, 나중에 알아봐도 충분한 걸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통금 시간이 지났구나. 공간이동 마법을 걸어주마.”

당황해서 잊은 건지 히나가 퍼뜩 놀라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신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돌아가기 전에 제대로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만.”

히나의 코앞까지 다가간 카신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해도 되는 연인 사이가 확실하겠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대답하렴, 히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히나가 대답하지 못하고 긴장으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해 보니 이런 걸 물어보고 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것 같구나.”

카신은 살짝 벌어진 앙증맞은 입술에 제 입을 가져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핥으며 들어간 그가 조금 더 깊이 그녀의 안을 탐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카신은 시간이라도 멈춰 이 순간이 영원하도록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정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얼어 있는 히나를 보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만족할 순 없지.’

그동안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기다려 온 순간이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것도 해야 했다. 그러니 시간은 멈추면 안 된다.

“히나.”

카신은 입술이 떨어지고도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히나를 조용히 불렀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만 그래도 입을 맞출 때는 눈을 감는 걸 권하마. 나중에 기억하면서 덜 부끄러우려면 말이다.”

멈춰 있던 히나의 시간이 이제 흘러가는 것인지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곧 크게 떴다.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렴.”

점점 붉어지는 히나의 얼굴을 지켜보던 카신은 이번엔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공간이동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변모하는 그녀의 얼굴을 구경하며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내일이 기다려지는군.’

내일이, 또 그다음 날이, 가까운 미래가, 멀고 먼 미래가 기다려지기는 처음이었다.

카신은 지금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히나를 상상하며 픽 웃었다.

* * *

“히나, 어서 말해봐! 진짜야?”

“아침에 본 사람이 몇 명인데! 진짜겠지!”

“그보다 누가 먼저 고백했어?”

“우리가 꿈꾸고 있는 건 아니지?”

아침부터 히나는 수많은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히나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눈을 꼭 감았다.

맹세컨대 결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카신은 교수의 신분이었고, 나이로 따지면 조상님의 조상님보다도 더 많은,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래서 굳이 밝히지 않으려 했다.

‘카신 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기숙사에서 바로 옆인 학교로 가는 길은 아주 짧았다. 누구와 같이 갈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신에겐 아니었던 모양이다.

“히나, 아침 산책 겸 함께 가자꾸나.”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왜 이러는지에 대해서는 묻지도 못했다. 그저 학교에 가기 위해 나왔을 때,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신을 마주하고부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연인이 되었으니 앞으로 함께 가자꾸나. 방향도 같으니 말이다.”

존재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게 카신이었다. 그런 데다가 세인트 본관 앞까지 함께 걸어갔다.

“히나, 오늘도 수업 잘 들으렴. 틈날 때마다 내 생각도 많이 해야 한다. 우린 연인이니까.”

그녀의 심란한 마음은 전혀 모른다는 듯, 카신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떠났다.

아무리 연인이라지만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몇 번이고 ‘연인’이라는 말을 되풀이했으니 못 들은 사람이 없었다. 학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너!”

히나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줄리아가 그녀의 책상 위를 짚은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떼쓴 거지? 교수님께 네가 울면서 연인이 되어달라 부탁한 거지?”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와 더 강하게 쏘아붙였다.

어제 루터가 카신에게 개인 훈련을 받고 녹초가 된 사실을 모르는 히나가 눈을 굴려 루터를 찾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상황을 말려줄 루터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낙담했다.

“맞잖아! 어서 그렇다고 대답해!”

히나는 상급반에 적응하면서 다른 학생들과 원만한 교우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단 한 명, 줄리아만큼은 친해지지 못했다.

집안 탓인 걸까.

지금 귀족이 되었다지만, 평민 출신인 히나는 집안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리베리아 가에 들어간 거지? 루카스 가보다 마법 능력이 떨어지니까 대마법사님을 꾀어내서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 자리를 지키려는 거잖아!”

“저기, 줄리아 그만해.”

“맞아. 히나는 따지고 보면 집안과 관계없잖아.”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줄리아를 말렸다. 사교계도 아니고, 평등함을 지향하는 세인트에서 집안싸움이 벌어지는 건 모두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상급반의 대부분은 귀족의 자제였기 때문에 리베리아와 루카스가 얼마나 앙숙인지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원한이니 한 번 터지면 곤란한 일이 발생하리라.

“그럼 성력도 밝혀지지 않았던 애가 왜 세인트에 특례 입학을 하고, 그 시기에 맞게 카신 교수님도 세인트에 온 건데? 그때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마법사로서 재능도 하나도 없었던 애가!”

“그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성력이 발견되긴 했잖아.”

학생들이 하나둘 줄리아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히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평민이었던 네가 무슨 힘으로 귀족이 되고, 세인트에도 중간에 들어온 거야? 왜 네가 대마법사님의 관심을 끄는 거냐고!”

히나의 성력이 발견되며 특례 입학에 대한 의문이 사라졌지만, 확실히 그녀가 들어왔었던 때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싸움을 말리려던 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런 식으로 편법을 쓰는 건 너무 치사하잖아!”

리베리아의 마법 실력이 항상 루카스보다 우위인 건 아니었다. 때론 루카스 백작가에서 압도적으로 더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리베리아 후작가는 오랜 시간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을 맡아왔다. 거기다 둘 사이에는 귀족적인 계급이 존재했다. 구간 제국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해 왔다. 루카스 백작가에서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한다고 해도 황궁 마법사단 수장 자리를 빼앗는 일은 힘들었다.

‘그래도 난 빼앗을 거야.’

점점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특히나 현 황제는 가문보다는 실력을 중시했다. 줄리아는 이번 대에서 어떻게든 실력으로 리베리아 후작가를 이기고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 자리를 가져오고 싶었다.

‘그런데 대마법사님이 리베리아의 편이라니!’

대마법사가 리베리아 후작가에 힘을 실어준다면 루카스 백작가는 이길 방법이 없었다. 가능성을 완전히 짓밟아 버렸다. 그것도 아무런 관련 없는 평민 출신의 무능력했던 여자애가.

줄리아는 씩씩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히나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분위기, 진짜 싫은데. 루터 오라버니한테 언제까지 의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집안까지 얽혀 버려서 히나는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변명을 하고 싶어도 줄리아의 말대로 루이스라는 편법으로 세인트에 들어온 건 사실이었다.

‘모두 다 잘 지내면 좋을 텐데.’

모두가 즐겁고 행복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매끄럽게 풀어갈 수 있는 달변가도 아니었고, 분위기를 압도시킬 만큼의 능력도 없었다.

“매일 루터 뒤에 숨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봐!”

귀족이 되니 제약이 너무 많았다. 평민이라면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귀족은 그렇지 않았다. 줄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모두가 다 좋을 순 없는 걸까?’

악에 바친 줄리아를 히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 때문일까. 히나는 몸에서 성력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자마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력을 끌어내고 나서부터 항상 한 사람에게 쏟아붓는 연습만 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나온 성력은 한 사람이 아닌 주변에 고르게 분포되어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이 공기 중으로 녹아내리는 걸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싸늘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히나는 눈을 깜빡이며 한결 누그러진 줄리아를 응시했다.

“너 지금 뭐 한 거야?”

화가 극에 달해 소리를 친 것이 민망했던 것인지 그녀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 히나는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의도와 상관없이 성력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흘러나온 성력이 적의를 순식간에 지웠다.

“편법을 쓴 것처럼 느꼈다면 죄송해요.”

싸울 의욕이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화를 낸 것이 그리도 민망한지 줄리아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히나는 당황한 줄리아에게 바로 사과했다.

“카신 님하고는 어쩌다 보니 그런 사이가 됐지만, 그건 집안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의심과 의문이 가득했던 주변도 잠잠해졌다. 히나도 당황스럽지만, 곧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리베리아 가는 마법 실력이 떨어지지 않아요. 베라미 오라버니는 어린 나이에 가문과 상관없이 황궁 마법사단에서 아주 크게 인정받고 있고, 루터 오라버니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의 노력을 함부로 깎아내리진 말아주세요.”

마력이 적은 만큼 루터가 누구보다도 노력한다는 사실은 상급반의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런 루터의 노력을 가문 덕이라는 말로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다.

베라미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사이가 껄끄럽지만, 그래도 주말마다 집에 가며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봐왔다.

“루터 오라버니만 그런가요? 여기 있는 상급반 학생 중에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 응원해 주는 게 어때요? 노력하는 사람은 멋지잖아요.”

“맞아. 우리 중에 노력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교수님이 히나를 아끼는 건 그전부터 있었던 일이잖아. 그간 교수님이 히나한테 대하는 걸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

“오히려 눈치 못 챈 우리가 둔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누가 교수님하고 연결을 짓겠냐?”

“그건 그래.”

누그러진 공기 속에서 장난스런 대화가 오가자 하나둘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지? 성력이 이런 힘도 있는 거야?’

뜻하지 않게 일이 해결되자 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히나, 누가 먼저 고백한 거야? 너야, 아니면 교수님?”

“나도 궁금해!”

“어서 말해줘 봐, 응?”

여린 것 같으면서도 중요할 때는 서운할 만큼 칼같이 선을 긋는 히나가 먼저 말했을 것 같진 않았다. 특히나 수줍음 많은 히나라면. 하지만 카신이 먼저 고백했다는 것은 더 믿기지 않았다.

학생들의 궁금증 어린 시선을 받으며 히나가 난감하게 웃고 있을 때, 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세인트에서 교수와 학생이 사귀어도 되나?”

어색하게 웃고 있던 히나의 얼굴이 그대로 멈췄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카신과 자신의 관계가 교수와 제자 사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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