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78화 (78/128)

78.

다행히 오늘은 마법 실습 수업이 많은 날이었다. 히나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이나를 힐끗,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시나?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해 주시는 건가?’

평소와 다름없는 세이나의 모습에 히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어서 편했다.

‘알려지면 큰 소란이 일어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반응이 따라다닐 줄은…….’

카신의 고백에 답변을 해줄 때부터 히나는 연인 관계가 밝혀졌을 때의 상황을 막연히 상상했었다.

당연히 모두 놀라고, 신기해할 거라 생각했다.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대마법사였으니까.

예상한 대로 복도를 걸을 때마다 온갖 수군거림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히나가 생각한 시선과는 살짝 달랐다.

믿을 수 없는 눈을 한 채로 놀라워하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들의 눈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카신 님 인기가 이렇게 많았다니.’

모두가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적대시했다. 어떤 이들의 눈빛엔 아쉬움이 어리기도 했다.

개중엔 히나를 찾아와 대마법사님을 독차지하지 말라며 빼앗을 거라는 선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히나는 소수의 남자들에게도 그런 시선과 질타를 받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람이 많은 거야.’

분명 카신은 상급반만 가르치고, 그 외 시간에는 개인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같은 교수들도 머리카락 한 올 보기 힘들 만큼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존경심 어린 눈이라면 그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른 감정을 품은 눈으로 카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든데 어째서 이렇게 추종자들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황후마마께서 히나의 성력으로 기뻐하셨다니, 내가 더 기분이 좋군요.”

“네. 성력 조절이 갈수록 잘되는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아침에…….”

히나가 아침에 줄리아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의도치 않게 나온 적대적인 분위기가 성력으로 인해 한순간에 바뀌었다고.

물론 카신과의 일로 그리되었단 건 빼고 말했다. 세이나가 이미 카신과의 관계를 알 수도 있겠지만, 만약 모른다면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숨기고 싶었다.

“성력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거니까요. 아마 히나의 간절한 마음이 적의를 가라앉힌 걸 거예요.”

“성력으로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요?”

“히나의 힘은 행복을 불러오는 힘이에요.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요.”

세이나가 생긋 웃었다. 히나는 그녀의 눈부신 미소에 잠시 숨을 멈추고 가만히 응시했다.

“그보다 벌써 힘을 그렇게 다룰 수 있다니. 이제 내가 더 가르칠 것도 없을 것 같군요.”

“우연히 나온 거예요! 또 될지도 모르는 거고…….”

히나는 다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도 얼떨떨했다. 아직도 자신이 한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간절한 바람으로도 그 정도 힘을 낼 수 있다면 대단한 거예요. 그렇게 쓰일 일은 없겠지만, 히나의 성력이라면 작은 전쟁까지 멈출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적의까지 없앨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성력.

어쩐지 자신이 조금 멋있게 느껴졌다. 히나는 멋쩍게 웃었다.

“오늘은 힘을 분산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겠어요. 이렇게 빨리 배우는 학생이라니, 히나가 너무 빨리 배워서 조금 아쉽기도 하네요.”

사실은 많이 아쉬웠다.

세이나는 히나가 무럭무럭 성장하는 모습에 기쁘기도 하고, 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슬프기도 한 모순된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히나가 그로 인해 행복하다면야.’

성력을 쓰고 나서부터 자신감이 부쩍 오른 히나를 보면 기분이 참 좋았다. 처음엔 카신으로 인해 더 의욕에 불타는 히나가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지금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성력을 분산시키는 게 꽤 힘들었을 텐데, 몸은 괜찮나요? 대신녀로서 부끄럽지만, 사실 나도 신력으로 주변을 광범위하게 정화하면 힘이 꽤 부치거든요.”

히나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수업을 듣는데 부쩍 힘들었어요.”

“너무 무리해서는 쓰지 말아요. 조금 더 성력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급하게 쓰면 오히려 독이 될 거예요.”

“네, 신녀님.”

“아침에 성력을 썼다면 오늘 더 이상의 수업은 무리겠군요. 우리 오늘은 여자들끼리 차나 마시면서 담소나 나눌까요?”

눈을 크게 뜨는 히나를 보며 세이나는 살며시 웃었다. 딸과 사사로운 대화를 하며 시간 때우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히나와 함께한 시간은 찰나의 순간처럼 아주 짧게 느껴졌지만, 실제론 아니었다.

대신전에서 그녀의 빈자리는 무척 컸다. 틈이 날 때마다 대신전으로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대신전에서는 어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상황이었다. 얼마 전부터는 히나까지 데려오라는 은근한 독촉을 받았다.

신력과는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힘이니, 대신전에서 히나를 어찌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세이나는 히나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핑계로 잡아둘지 모르는 거니까. 물론 그 남자가 히나를 대신전 근처에도 보내지 않겠지만.’

카신이 히나 옆에 있는 건 싫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도움이 됐다. 오히려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가 옆에 있는 이상 히나가 위험해질 일은 없으니.

“그래도 되나요?”

담소를 나누자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히나를 보며 세이나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힘겹게 억눌렀다.

“그럼요. 안 될 건 없지요.”

조금 더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가르칠 게 거의 없었다. 세이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 * *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히나는 깜짝 놀랐다. 수업 외에 연구실에만 있는 카신이 그녀의 교실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히나, 같이 밥을 먹자꾸나.”

주변에서 학생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친구들의 눈치를 한 번 스윽 본 히나가 당당한 카신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카신이 당당하니 더 민망했다. 그래도 학교인데 이렇게 티를 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것도 교수님이랑.’

간혹 커플이 된 학생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몰래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만나진 않았다. 히나는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카신 님은 밥을 먹지…….”

“싫으니?”

히나는 민망함에 어떻게든 거절하려고 했지만, 카신이 말을 끊으며 적극적으로 물어오자 싫다고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음식을 먹지도 않으면서!’

억울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그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히나는 갑자기 떠오른 그럴듯한 핑계를 재빨리 말했다.

“전 루터 오라버니와 이미 선약이 되어 있어요.”

“리베리아 군이라면 이미 나갔단다.”

카신의 말에 히나가 고개를 홱 돌려 옆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여기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루터가 없었다. 카신을 보자마자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진작 도망간 거였다.

“싫다면 어쩔 수 없구나.”

한순간에 사라진 핑곗거리에 당황한 히나가 머뭇거리자 그가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뒤돌아서는 카신을 멍하니 보고 있던 히나는 뒤늦게 벌떡 일어나 그의 옷깃을 잡았다.

“가, 같이 먹어요.”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이것이 카신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로 그를 보내면 찝찝해서 잠도 못 자리라.

“그럼 같이 나가자꾸나.”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그가 싱긋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히나는 가만히 그 손을 보다가 마지못해 제 손을 내밀어 잡았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상대가 카신이니 차마 대놓고 구경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너무하시네.’

연애를 하면 흔히 보이는 기 싸움이 이런 건가.

아침부터 그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히나는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대놓고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내뿜는 카신으로 인해 부끄럽고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시집은 다 갔네.’

하지만 싫지 않았다. 히나는 카신과 맞잡은 손을 흘낏, 내려 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공간이동 하실 생각은 없죠?”

카신과 손을 잡고 복도를 걷는 건 상상 이상으로 더 부끄러웠다. 히나는 아주 작은,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물었다.

“내가 공간이동을 쓸 것 같으니?”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민망해하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요.”

“히나는 날 아주 잘 아는구나.”

“잘 알다니요. 카신 님은 신비주의잖아요. 아무리 물어봐도 카신 님에 대한 건 잘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조금 억울하군. 난 분명 네가 물어보면 다 알려줬는데 말이다.”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던 그녀가 곧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리곤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기지?”

“카신 님은 의외로 거짓말에 능숙한 것 같아서요.”

“이거야말로 억울하구나.”

“에이, 카신 님은 제 휴가를 빼앗아 가면서도 중요한 건 전혀 알려주지 않으셨잖아요.”

이건 조금 양심에 찔렸다. 카신은 시선을 살며시 돌리며 어물쩍, 대답을 회피했다.

“아직도 카신 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카신 님이 좋아하는 거 하나는 알아요.”

“내가 좋아하는 거?”

카신이 흥미를 갖고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인 히나가 곧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곤란해하는 걸 즐기시죠? 아침부터 지금까지 쭈욱 엄청 좋았죠?”

반박하지 못하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쐐기를 박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계속 절 곤란하게 만들고. 다음에는 제가 카신 님을 곤란하게 할 거예요.”

아이를 혼내듯,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한 히나가 곧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카신은 속에서 올라오는 뭉클한 감정에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거참 기대되는구나.”

설렌다.

이런 감정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마법을 해냈을 때도,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을 때도, 간절히 원하는 연구를 성공시켰을 때도 이보다 더 설레지 않았다.

“정말 곤란하게 만들 건데.”

“그러니 기대되는 거지. 어디 한번 마음껏 곤란하게 만들어보거라.”

세인트 황궁학교의 정원은 작지만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기숙사 생활에 억압된 학생들이 잠깐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원에 나와 점심을 먹었다. 카신은 나무 그늘이 내려앉는 곳으로 히나를 이끌었다.

루터와도 자주 나와서 먹었다. 히나는 별생각 없이 바닥에 앉으려 했다.

“레이디를 바닥에 앉힐 수는 없지.”

앉으려는 히나를 막으며 카신이 바닥을 향해 한 손을 살랑이며 휘둘렀다. 마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처럼 그의 손짓은 단조로우면서도 참으로 우아했다. 히나는 저도 모르게 그 손짓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바닥에 뭉게구름처럼 하얗고 몽실한 의자와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히나가 눈을 크게 뜨더니 가까이 가서 손끝으로 몽실한 의자 구름을 콕콕 찍어보았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참 좋았다.

“앉아도 돼요?”

“무너지진 않는단다. 안전은 보장하지.”

카신이 반대쪽에 앉으며 말했다. 구름처럼 잡히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의자를 잠시 보던 히나가 반대편에 앉은 카신을 보며 조심스레 의자를 뺐다.

‘몸이 통과될 것 같은데.’

엉덩이 끝을 살짝 대본 히나가 생각보다 튼튼한 걸 깨닫고는 곧 편히 앉았다.

“그런데 꼭 여기서 먹어야 해요?”

점심을 먹으러 나온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히나가 물었다. 무서워서 고개를 돌려보진 않았지만, 얼핏 교수님도 본 것 같았다.

“역시 제가 곤란한 게 좋으시죠?”

“난 그저 자랑하고 싶을 뿐이란다.”

턱을 괸 채 그녀를 보고 있던 카신이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튕기며 탁, 소리를 냈다.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빵과 수프가 나왔다.

“별궁의 시녀에게 미리 만들어달라고 했단다. 많이 먹으렴.”

무서워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히나는 카신과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자랑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돼요?”

카신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무척이나 곤란해하는 히나를 응시했다. 히나의 말대로 그는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이 꽤 즐거웠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듣는 ‘우리’라는 단어도 참 듣기 좋았다.

“먹다가 체하면 다시는 같이 점심 안 먹을 거예요.”

히나가 작은 입술을 쭝긋하게 내미는 걸 보며 카신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마력을 모아 마법진을 펼쳤다. 그들의 몸이 테이블과 함께 통째로 사라졌다.

구름 같은 테이블과 의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음식은 어떻게 나오게 했는지,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과 교수들이 넋을 놓고 두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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