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히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카신의 별궁 정원을 멍하니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세인트의 정원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건 한적하고 조용한 카신의 별궁 정원이었다.
“여기서 체하는 건 무효야. 자리를 옮겼으니까.”
그의 마법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깨달은 히나는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사실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동 마법, 손을 안 잡아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카신은 항상 이동 마법을 쓸 때 손을 꼭 잡거나 몸이 닿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공간에 혼자 떨어져 평생을 헤맬 수 있다는 무서운 말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까지 모두 그의 손에 닿지 않고 있었다. 히나는 왠지 모를 억울함이 들었다.
“아, 어제 발명한 마법이지.”
히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카신을 노려보았다.
“정말인데. 제국 마법학 역사에 손은 안 대고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단다, 히나.”
“카신 님은 조금 뻔뻔한 것 같아요.”
“칭찬이라면 고맙게 받지.”
칭찬 아닌데. 히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 대신 쿡, 하고 웃었다.
카신의 뻔뻔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의외로 자신과 함께 있기 위해 참 애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은 언제든 잡아줄 수 있는 건데.’
언제부터 좋아했던 걸까? 히나는 문득 카신의 마음이 언제 시작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저를 좋아하셨어요?”
카신은 빵을 먹기 좋게 뜯어 그녀의 입 앞에 가져갔다. 작은 입술을 벌리고 잘도 받아먹는 그녀를 만족스럽게 보며 그는 고민했다.
“글쎄. 언제부터 네가 내 눈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오래됐어요?”
“꽤?”
좋으면서도 부끄러운 건지 히나가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그녀의 뺨이 귀엽게 씰룩이는 걸 보며 카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카신의 손끝이 닿자마자 오물거리던 히나의 볼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자고 갈래?”
그녀가 마른침과 함께 입안에 있는 음식을 삼켰다. 볼록 튀어나왔던 뺨이 쏙 들어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기숙사에 가야 해요. 주말이 아닌걸요.”
“그럼 주말이면 자고 갈 수 있다는 말이구나.”
어쩐지 야하게 들렸다. 히나는 폭탄 발언을 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금 빵을 떼어주는 그를 보았다.
“정말 순수하게 자고 가게 해주실 건가요?”
히나의 물음에 그녀에게 빵을 건네던 그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그녀의 입에 빵을 먹여주었다.
“히나, 널 순수하게 재워주겠다는 내 거짓말에 절대 속지 마렴.”
카신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린 연인이지 않니. 밤에 내 영역에 침입할 거라면 그에 따른 각오도 하고 와야 한다, 히나.”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하지 못한 히나가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한 채 한참을 아래만 보고 있던 히나가 시간이 꽤 지난 후에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카신 님은 뭘 좋아하세요?”
오랜 정적 후에 튀어나온 부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명백한 질문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카신이 곧 큰 소리로 웃었다.
멋쩍은 미소를 짓던 히나가 곧 그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 * *
세인트 황궁학교는 정기적으로 교수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오늘, 교수들은 다른 이유로 호출을 받아 갑작스럽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중에는 세이나도 있었다. 단 한 명의 학생만 가르치는 세이나를 교수라고 할 수 없지만, 다른 교수들이 그녀를 부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가 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나마 이곳에서 대마법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대신녀 세이나뿐이었다. 거기다 세이나가 가르치는 유일한 학생이 바로 지금 회의를 열게 한 히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마법사와 대신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에게는 불편한 자리일 거라 예상하여 세이나를 불러온 것이 분명했다.
‘겁쟁이가 따로 없군.’
처음으로 세인트 교수 회의에 오게 된 카신은 주변을 쓱 훑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각각 시선을 피하는 교수들을 보며 그는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흠흠, 갑자기 회의를 연 까닭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교수 한 명이 카신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그러다 서늘한 그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카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질색이었다.
“내가 학생과 사귄다는 것 때문에 모였다고 어서 말하시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회의 소집 이유를 몰랐었던 세이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오늘따라 세인트 내부가 어수선한 건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세이나는 카신이 사귄다는 학생의 이름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카신이 유일하게 애정을 쏟는 대상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히나와 오늘 차를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 히나의 입장에선 교수와 사귄다는 말을 굳이 할 이유도 없지만, 그 말을 직접 듣지 못해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분명 학칙에는 교수와 학생의 사랑을 금한다는 말은 없는데.”
카신의 앞에 놓여 있던 두꺼운 책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펼쳐졌다. 휘리릭, 소리가 나며 빠르게 넘겨가던 책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보시다시피 풍기문란죄는 있어도 학칙 중 교수와 연애를 해선 안 된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해서 그 누구도 반박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교수와의 연애를 금한다는 조항은 없었죠.”
짧은 시간 이어진 무거운 정적이 한순간에 깨졌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카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너무 당연히 안 되는 것이니 굳이 학칙에 넣지 않은 것이겠지요.”
카신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세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이나의 말처럼 교수와 연애를 꿈꾸는 학생은 없었다. 세인트의 교수는 우수한 만큼 전체적으로 나이가 있었다.
대부분 유능한 마법사나 실력 있는 기사가 왕성히 활동하다가 후에 관직에서 물러나며 맡는 것이 세인트의 교수직이었다.
“애초에 나이 먹은 교수가 학생과 연애라니. 세인트에 길이 남을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나이 지긋한 교수와 연애를 꿈꿀까.
아무리 사랑에 나이는 상관이 없다지만, 세인트의 교수가 학생과 연애를 꿈꾸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었다.
“특히 대마법사님께서는 꽤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외모는 단연 이곳에서 가장 어렸지만, 카신이 살아온 세월은 셀 수조차 없다. 세이나는 일부러 그 점을 꼽았다.
“대신녀님께서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신녀님은 세인트의 교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세인트에서 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임시로 가르치는 것을 교수라고 칭할 순 없어 보입니다만.”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 바로 대마법사님과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이 난 학생이 아닙니까? 제가 여기 있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신경전이었다. 이곳에서 세이나만이 카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소한 것을 문제 삼는군요. 제 신체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멈췄습니다. 당장 죽을 늙은이도 아니고, 학칙에 위배되는 것도 없는데, 무엇이 문제인가요?”
신체 나이가 멈췄다는 말에 교수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카신의 몸으로 향했다. 그들은 히나와 카신이 연애를 한다는 것보다도 카신이 무슨 이유로 늙지 않는지가 더 중요한 듯했다.
“히나가 세인트에 들어오기도 더 전에 저는 폐하께 히나와의 관계를 약속받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폐하께 가서 얘기하고 난 후에 제게 오도록 하시죠.”
황제가 뒤에 있다는 말에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렇지 않아도 히나를 지도해 주는 신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히나가 성력을 쓰는 것을 봤습니다만, 살짝 문제가 있는 듯해서 말입니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신녀님은 저를 따로 보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는 카신을 보며 세이나는 분한 마음을 참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카신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가 성력을 쓰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카신의 말을 그냥 넘길 순 없었다.
‘다른 건 믿을 수 없어도, 히나의 안전에 관련된 사항이라면 누구보다 민감한 남자니까.’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만큼 그녀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본 걸 수도 있다. 세이나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멍한 얼굴을 한 교수들을 뒤로한 채 카신을 따라갔다.
“여기가 적당하군.”
빈 교실 중 하나를 찾아 들어온 카신이 뒤로 돌아섰다. 세이나도 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멈췄다.
“히나가 성력을 쓰는 것에 문제가 있다니, 무슨 말이죠?”
세이나는 히나가 다시는 폭주를 하지 않도록, 조급해하지 않고 히나에게 성력을 쓰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히나는 빠르게 배웠고, 오늘 스스로 성력을 응용까지 했다.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의욕 넘치는 히나가 너무 빠르게 배우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드니까.’
히나는 노력을 많이 하니 앞으로 성력을 더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히나는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인정받으리라.
“아까도 히나와 얘기를 했는데, 그녀가 힘을 쓰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카신이 잠시 세이나를 응시하다 간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히나의 성력을 봉인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세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성력을 봉인하는 방법은 오늘부터 연구하도록 하죠. 웬만한 힘은 다 봉인할 줄 아니, 방법은 일주일 안으로 찾을 겁니다.”
“잠깐, 성력을 봉인한다니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성력을 봉인할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히나에게 개인 지도를 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당연한 말을 하듯이 매끄럽게 이어 말하는 카신 덕에 수긍할 뻔했다. 세이나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바로 나가려는 카신에게 다급히 말했다.
“더 자세한 설명, 아니 제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시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히나는 카신을 위해 누구보다도 더 노력했다. 상급반 학생들을 따라가기 위해 밤새워 공부하면서도, 초췌한 얼굴로 성력 수업도 열심히 받았다.
그래서 세이나도 히나가 카신의 옆에 있어야 행복하단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히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말이다.
‘그런데 히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준 성력을 봉인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해 열등감에 빠져 있던 히나를 유일하게 버티게 해준 성력을 빼앗는 건 그녀의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었다.
귀찮다는 얼굴로 카신이 곧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에 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힘을 쓰다 결국 자멸했다는 얘기를 들었죠. 지금은 대가가 없이 쓸 수 있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봉인하려 합니다.”
카신은 세이나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물론 그 아이와 히나는 상황 자체가 달랐다. 히나가 가진 힘은 예민한 인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뚜렷하고 강했다. 거기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뛰어난 선생님도 있다.
‘그래도 불안할 수밖에.’
어둠의 힘에 의해 깨어나고, 접촉할 때마다 더 강한 힘을 드러내는 성력이 언제 히나를 자멸하게 할지 불안했다. 되도록 히나를 모든 위험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싶었다.
“같은 힘이 확실한가요?”
“그 아이가 낸 건 희미했지만 같은 힘이 확실합니다.”
“같은 힘인지도 모르고, 직접 제대로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위험할 것 같으니 봉인하자는 말인가요? 당신 지금 제정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