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80화 (80/128)

80.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히나는 손안에 든 검은색 피리를 매만졌다.

칼피온이 준 피리는 아주 단조롭고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하지만 쳐다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은 강한 힘이 느껴졌다.

“불러볼까?”

사실 히나는 카신이 없을 때 칼피온을 만나고 싶었다. 물어볼 말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카신은 절대 칼피온과 그녀를 단둘이 두지 않을 것이다.

“카신 님은 모르겠지?”

히나는 카신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여태 참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물론 과거의 일을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듣고 싶었다.

‘아까도 그냥 다 좋다고만 하고.’

뭘 좋아하냐는 그녀의 질문에 카신은 뭐든 자신이 하는 건 다 좋다고만 말하며 질문을 어물쩍 넘겼다. 히나는 그게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카신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과거의 얘기를 꺼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좋다는 건 다 고개를 끄덕였고, 싫어하는 것도 귀신같이 알아내어 피했다.

‘너무 나한테만 맞춰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카신은 그녀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움직였다. 히나는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칼피온을 만나러 가자고 조른 것도 있었다.

피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히나는 결심이 서자마자 피리를 힘차게 불었다.

어두침침한 표면과 달리 피리는 맑고 예쁜 소리를 냈다. 마치 숲속 깊은 곳에 사는 신비한 새가 노래하는 소리 같아 히나는 피리를 불며 절로 미소를 지었다.

휘이잉―

일반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이 아니었다. 조금 다르긴 했지만, 칼피온이 쓰는 마법은 카신이 쓰는 것과 비슷했다.

음삼한 빛과 함께 눈앞에 나타나는 칼피온을 보며 히나는 눈을 깜빡였다.

“부르길 기다렸는데 말이지.”

칼피온은 눈을 크게 뜨고 있던 히나가 곧 반가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정말요? 전 오지 않으면 어쩌나 엄청 고민하면서 불렀는데.”

“생각보다 일찍 불러줘서 덕분에 지루한 시간이 빨리 끝났어.”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부드러운 말솜씨에 히나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수많은 시선에 시달렸던 걸 모두 잊게 해줄 만큼 그는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불렀을까? 로티우스가 괴롭혔어? 아니면 뭘 알고 싶어?”

“뭐든 알려줄 거예요?”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는 칼피온의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알려줄 수 있는 것만.”

얄미울 법도 하지만, 칼피온이 짓는 미소가 너무 유쾌해서 웃음이 나왔다. 히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물었다.

“저, 카신 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요.”

“직접 물어보지 그래?”

책으로 접했던 드래곤의 이미지는 와장창 깨진 지 오래였다. 히나는 친한 친구에게 부탁하듯이 편하게 말했다.

“물어봐도 자기 얘기는 잘 안 하시거든요.”

“뭐, 그럴 만도 하지.”

칼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히나, 로티우스의 과거는 모르는 게 좋을 거야.”

더 자세한 질문을 하기도 전에 칼피온이 바로 선을 그었다.

“뭘 좋아하는지 묻는 것도 안 돼요?”

“로티우스가 뭘 좋아하냐고?”

칼피온은 한 손으로 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지금? 그럼 옛날에 좋아했던 건요? 갖고 싶었던 거라든지, 원하던 거 없어요?”

“옛날이라면…….”

흉악한 과거가 떠오르자 칼피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의 로티우스는 더 강한 힘을 원했지.’

힘을 얻기 위해 뭐든 했다. 이미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가 되었음에도 카신은 끊임없이 힘을 탐할 때가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순한 양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거슬리는 걸 전부 눈앞에서 없애 버리는 성미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말이다.

“과거에 원했던 건 지금 원치 않을 거야. 아주 긴 시간이 흘렀으니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환경도, 상황도 많이 변했을 지금, 카신이 원하는 것도 당연히 변했을 것이다. 히나는 어쩐지 공감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는 절대 캐내려 하지 마. 아마 엄청 싫어할 테니.”

카신이 과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십여 년 전, 신녀가 황궁에 순례를 왔다며 매해 그의 레어로 도망 오던 카신은 가끔 농담 따먹듯이 과거의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히나 앞에서는 다르지.’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과거, 카신은 수많은 드래곤을 학살하고 다녔다. 그것도 단순히 제힘을 시험하고, 더 강한 힘을 추구하기 위해.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얘기였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인 그가 히나에게 과거의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냈다간 다른 이유로 카신에게 멸족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요?”

“응.”

농담을 건네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칼피온은 절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히나는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거를 캐내서 카신 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럼?”

“그냥, 카신 님이 뭘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 평소에 제가 없을 땐 뭘 하는지 정도?”

칼피온은 히나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지루한 시간을 살고 있던 드래곤이 내일을 기대할 만큼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인간을 만났다. 내일이 기대되니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에게 어디까지 말하고 알려줘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뭐 하나 잘못 말하면 로티우스가 바로 날 죽이려 하겠지.’

여기서 죽기엔 너무 아깝다. 죽더라도 로티우스가 히나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죽어야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럼 이러면 되겠다. 직접 보고 확인하는 거야.”

“직접이요?”

“그래, 직접. 로티우스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히나 네가 직접 관찰해서 답을 내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히나가 눈을 깜빡였다.

히나의 티 없이 맑은 커다란 눈동자와 한 번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고 싶은 오동통한 뺨,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칼피온은 비슷한 동물을 하나 생각해 냈다.

“자, 이 모습으로 보고 와.”

히나에게 가까이 온 칼피온이 검지를 펴서 손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작은 다람쥐로 바뀌었다.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갈색의 다람쥐를 보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볼, 한 번만 건드려 보고 싶다.’

인간 모습인 히나의 볼도 탐스러웠지만, 다람쥐가 되니 참지 못할 정도다. 크게 부풀어 오른 볼을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빵빵한 뺨을 잡았다 당겨봐야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피온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욕구를 애써 가라앉히며 말했다.

“어때? 이 모습이라면 로티우스도 절대 눈치 못 챌걸?”

칼피온이 갑자기 거대해지고, 시야는 한없이 밑으로 내려갔다. 히나는 칼피온 말고도 지나치게 커다랗게 변해 버린 주변을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났는지 칼피온이 손거울을 내밀었다. 히나는 거울 안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마법으로 잠시 모습을 바꾼 것뿐이야. 내 손을 잡으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그 모습이 불안하면 내 손가락을 잡아.”

언제든 바꿔주겠다는 듯, 칼피온이 검지를 쭉 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다람쥐로 변한 히나는 저보다 배로 큰 칼피온의 손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고민하는 히나를 보며 칼피온은 바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로티우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잡아도 되고. 선택은 레이디 마음대로.”

까만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던 히나가 뒤로 물러났다. 손을 잡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칼피온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는 히나를 보며 쭉 편 검지로 어느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로티우스는 저기에 있어. 2층 세 번째 방에.”

히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건물을 바라보았다. 항상 보던 건물이지만, 너무 커다래서 다른 걸 보는 기분이었다.

“너무 오래 있지는 마. 쉽게 들키진 않겠지만, 로티우스는 눈치가 빠르니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 와야 해. 알았지?”

건물과 칼피온을 번갈아 보던 히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래부터 네 발로 걷고 뛰어다녔던 것처럼 빠르게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2층 세 번째 방.

카신이 그의 연구실이 아닌 본관 건물에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급한 용건이 있었다.

‘아무리 카신 님이라도 이 모습이면 절대 모를 거야.’

평소에 카신이 어떤 얼굴로 있는지 궁금했다. 그저 자리에 앉아 가만히 책을 읽는 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앞에서가 아닌 카신이 보고 싶었다.

작은 몸이어도 속도가 빨라서인지 멀게만 보이던 건물까지 금세 도착했다. 히나는 고작 2층이어도 작은 다람쥐의 몸으로 까마득히 높이 있는 창문을 보고 잠시 발을 멈췄다.

‘어쩐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어떤 높은 나무라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히나는 까만 눈을 껌뻑이다 곧 빠른 속도로 벽을 타고 올라갔다.

‘보인다!’

창문이 작게 열려져 있었다. 벽을 등지고 있던 히나는 앞발을 들고 창문 틈새로 들어가는 꽃잎을 따라 고개를 빼꼼 집어넣었다.

드높은 키에 익숙한 잿빛 머리카락과 대마법사만이 걸치는 새하얀 제복.

카신이 분명했다. 히나는 카신의 뒷모습을 보다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신녀님?’

세이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두 사람의 말소리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히나가 성력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하냐는 말입니다.”

세이나의 격양된 목소리는 무척 날카로웠다. 절대 큰소리를 치지 않을 것 같은 세이나가 잔뜩 흥분한 고성을 내는 것이 놀라웠다.

‘카신 님께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거지?’

세이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히나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창문 틈새로 주변을 엿본 그녀는 근처에 있는 책상을 발견하곤 빠른 속도로 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뒤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살짝 내밀고 두 사람을 관찰했다.

“신녀께서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요.”

세이나에 비해 카신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히나는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카신도 이 상황을 꽤 불쾌해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설마 히나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노력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겠죠?”

안타깝게도 카신은 뒤돌아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멀리서도 세이나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녀에 대한 걸 모를 리가.”

히나는 한기가 도는 카신의 목소리에 작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내겐 그보다 히나의 안전이 더 중요해. 그러니 그만 물러나도록 해.”

무척 낮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이건 포기할 수 없어요. 내가 제대로 가르칠 겁니다. 절대 자멸하지 않도록, 그 힘을 완벽히 다룰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

카신이 기가 찬 듯,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 짧은 웃음소리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히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자신에게만 다정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남들에겐 냉정하게 칼을 긋는다는 것도.

하지만 카신은 대체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더라도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진 않았다. 이건 정도가 심했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카신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하지만 히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카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내가 당신에게 이 사실을 알린 건 허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야.”

카신이 세이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검지를 쭉 뻗으며 긴 손가락으로 세이나의 턱을 받치고 올렸다.

“히나의 개인 지도를 그만두고 당장 떠나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라고.”

휙.

세이나가 카신의 손을 뿌리쳤다. 자애롭고 상냥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두 눈에 강한 적의가 보였다.

“그건 내가 허락 못 합니다.”

“하, 이제 와서 어미 역할을 할 셈인가? 히나를 낳자마자 버린 주제에?”

“나는 히나를 한시도 잊은 적 없어요! 히나를 내 마음에선 절대 버리지 않았다고요!”

“대신녀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미친 듯이 폭우가 내리던 날 그 작은 핏덩이를 공작가에 버리고 간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버리지 않았다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제 와 엄마이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아.”

“히나에게 엄마이길 바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히나의 성력은 내가 준 겁니다. 나의 모든 걸 바쳐 만든 거란 말입니다!”

난 도대체 뭘 듣고 있는 거지?

“당신은 히나를 버린 순간부터 히나의 인생에 개입할 자격을 잃은 거야. 안 그런가, 세이나 대신녀?”

카신이 대신녀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것도 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세간에 어미라 밝힐 용기라도 있다면 조금은 인정해 주도록 하지. 물론 그따위 일을 벌이기 전에 내 손에서 재도 남지 않고 사라지겠지만 말이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히나는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건 꿈이었다. 그래, 꿈.

그 생각까지 미치자 히나는 빠르게 다시 창가로 올라갔다.

“나는 히나를…… 내 딸을 당신에게서 지킬 겁니다.”

슬픔에 찬 목소리는 무척 작고 여렸다. 강하고 당당했던 대신녀의 목소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창문 틈새로 나가기 전, 히나는 빠르게 움직이던 네 발을 멈췄다. 그리고 한없이 여린 세이나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요, 대신녀.”

한껏 비웃은 카신이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창문 틈새에 멈춰 선 히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나는 더없이 빠른 속도로 창문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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