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람쥐는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 짧은 순간, 카신은 다람쥐가 어딘지 히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다람쥐 따위가 히나를 닮았을 리가.’
카신은 방금 전까지 다람쥐가 머물고 있었던 창틀을 응시했다.
작은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창가로 내려앉고 있었다. 아마도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먹기 위해 들어온 것이리라.
‘이 기시감은 뭐지?’
그가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변을 훑었다.
어디로 간 건지 다람쥐는 이미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위험한 힘을 가진 당신을, 저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당장 나갈 것처럼 움직였으면서 그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세이나가 먼저 나갔다. 카신은 세이나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으며 방금 전 다람쥐가 앉아 있던 창틀에 손을 가져갔다.
아주 짧은 시간 앉았다 간 다람쥐는 차가운 창틀에 그 어떤 온기도 남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다람쥐와 같은 작은 초식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아무리 먹이에 홀려 왔어도 사람이 둘이나 있는 방 안에 온기를 남길 만큼 오래 있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한 힘을 가졌다라.”
세이나가 한 말을 되뇌던 카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세이나에게 위험한 기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 방 안에 다람쥐가 들어왔다고? 겁이 많고 경계심이 강한 다람쥐가 가장 강하고 위험한 힘을 가진 그의 적의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상하군.”
히나의 일로 예민해져서일까.
없던 두통마저 생기는 기분이었다. 카신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 * *
칼피온은 히나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히나는 침대에 멍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엄마?”
입에 익숙하지도 않은, 이제는 껄끄럽기까지 한 단어.
풀토 공작에게 모든 사실을 듣고 히나는 가족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렸다. 정확히는 리베리아 가에 들어오고 나서, 완전히 포기했다.
피가 이어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서 진정한 가족을 찾는 건 힘들었다.
“정말…… 내 엄마?”
아직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카신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순간 예전에 기숙사에 몰래 들어온 카신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가족이 있어서 좋으니?”
“네! 너무 좋아요.”
“진짜 가족이 아니라도?”
리베리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카신은 가족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귀족 사회에, 리베리아 후작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원한다면 평민 가족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를 남과 공유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루터와 붙어 있는 것도 못마땅해 하는 카신이 할 말이 절대 아니었다. 무조건 다정한 것처럼 보여도 카신은 그의 계획 안에 그녀를 가둬두었다.
카신의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었고, 대부분 그가 그녀에게 맞춰줬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카신의 옆에 계속 있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니 문제 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지?”
카신은 신녀를 싫어한다고 했다. 힘의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그는 세이나가 황궁에 왔을 때, 굳이 약속을 잡아 만났다.
“처음부터……. 처음부터구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신은 세이나가 황궁에 왔을 때부터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카신 님에 대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세이나에게 잔인하게 속삭이던 스산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이 카신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단 하나도 모른다는 거였다.
‘내가 아는 카신 님은 가짜인 걸까?’
그래, 상냥하고 다정한 카신은 세상에 없다. 그 누구에게나 냉철하고 이기적인 카신이 진짜인 거다.
엄마.
어느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프고 괴로운 단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게 카신의 탓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신이 원망스러웠다.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던 그가.
화아악―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수정구에 빛이 들어왔다. 히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구슬에 환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때 같으면 당장에 잡아 연락을 할 터였다. 하지만 수정구로 향하는 그녀의 손은 무척 더뎠다.
[히나?]
아까의 일이 꿈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카신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하고 평온했다.
“네.”
[목소리가 가라앉았구나. 무슨 일 있니?]
짧은 대답 한마디에도 카신은 자신의 기분까지 모두 알아채는데, 왜 자신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을까.
“오늘…… 너무 피곤해서요. 엄청 시달렸거든요.”
[많이 시달렸니?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우리 사이를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단다. 이해해 줄 수 있지, 히나?]
다른 때였다면 이 달콤한 목소리에 너무했다며 투정 한번 부리다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너를 위해서 숨긴 거란다. 이해해 줄 수 있지, 히나?’
히나는 쓴 미소를 웃었다. 지금 이 말을 듣게 된다면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많이 화가 났니?]
그녀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없자 카신이 심각한 어조로 물어왔다.
“아니에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보다 카신 님. 저 궁금한 게 생겼어요.”
[그러니? 언제든 물어보렴.]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굳이 지금 세이나와의 관계를 안다고 밝혀서 카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내게 한 가지라도 사실을 알려주세요. 제발.’
카신을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참았던 것들이 많았다. 히나는 그중, 그를 무척 곤란하게 할 것이 분명한 질문 하나를 꺼냈다.
“카신 님은 드래곤인가요?”
[드래곤이라니.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니?]
긍정도 부정도 나오지 않는 대답.
히나는 평소라면 절대 꺼내지 않을, 조금 더 집요한 질문을 던졌다.
“카신 님의 눈이 칼피온의 눈하고 닮았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수정구에서 답이 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무겁고 괴로운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히나였다.
“카신 님이 가끔 강한 마법을 쓸 때 변하는 눈동자가 칼피온의 눈하고 비슷했어요.”
절대 도망가지 못하도록 히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폭우가 내리는 날 처음 카신을 봤을 때, 그리고 풀토 공작에게서 그녀를 구했을 때.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었어, 분명.’
카신의 눈은 무척 사납고 위험했다. 아주 짧은 순간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히나는 그때의 그 눈을 잊을 수 없었다.
칼피온을 처음 봤을 때, 히나는 저도 모르게 경계하며 바로 그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카신이 대답을 회피할 것도 예상했지만, 집요하게 물어볼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히나. 난 드래곤이 아니야.]
한참 후에 카신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사실상 대답을 아주 늦게 한 건 아니었지만, 히나에겐 무척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히나의 심각한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것 같았던 카신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드래곤의 힘이라면 갖고 있단다.]
“드래곤의 힘을 갖고 있다고요?”
[그래. 그게 다란다. 대답이 됐니?]
궁금증이 전혀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 인간이 드래곤의 힘을 가졌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가르쳐 주지 않겠지.’
더 물어볼 힘도 없었다. 오늘은 너무 지쳤다.
“네, 카신 님.”
히나는 힘없이 웃었다.
설사 이제껏 본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도 상관없었다. 이미 카신을 놓을 수 없었다.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밉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쌓여도 그 감정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뭉개지길 반복했다.
“그보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카신 님.”
정말 사랑의 묘약을 먹기라도 한 걸까.
“저, 당분간은 집에 머물고 싶어요.”
카신의 사늘한 말에 아프고 괴로워하던 세이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로 그녀를 본다면 마음이 약해져 버릴 것이다.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아주 잠시만이요.”
그사이에 마음을 굳게 다지고 나와야 했다. 세이나를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인사를 할 만큼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슬퍼진 히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편한 대로 하렴.]
다정한 카신이 가짜라고 해도 놓고 싶지 않았다. 카신으로 인해 심란해진 마음이 카신의 목소리로 안정되는 모순에 히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다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자고 싶었다. 아주 길게. 이 모든 혼란스런 상황이 지나갈 때까지.
* * *
코반드 후작은 2미터가 넘는 장신의 병사들을 눈으로 쭉 훑어보았다.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렬로 서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모두 마법사라고?”
제이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겉보기엔 단단히 무장한 기사들로 보였다.
“어째서 마법사가 이렇게 무장을 한 거지? 거기다…….”
마법사들 모두가 이렇게 키가 크고 우람하다고?
보통의 마법사는 신체가 허약했다. 그래서 마법사를 좋지 않게 보는 일부 기사들은 마법사를 향해 약골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의 마법사들은 기사보다도 더 크고 우람했다. 거기다 마법을 쓸 때 불편할 것이 분명한 갑옷으로 무장까지 하고 있었다.
“조금 신체 개조를 했습니다.”
“신체 개조?”
“제 연구로 이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 겁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갑옷을 입고도 문제없이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죠.”
“그런 것도 가능하단 말인가?”
코반드 후작이 한 연구를 오랫동안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스는 마법사보다는 가치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마법 연구사의 연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매 순간을 공들여 겨우 성공한 연구입니다. 하지만 단점이 있죠.”
“단점?”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쟁은 한 달, 그 안에 끝내야 합니다.”
한 달? 그건 너무 짧은데…….
그의 생각을 모두 읽기라도 한 것처럼 코반드 후작은 뒷말을 덧붙였다.
“대신 다들 제국의 황궁 마법사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실력은 제가 확실히 보증하죠.”
체통도 잊은 채 제이스는 입을 쩍 벌렸다.
제국의 마법사를 지망하는 코흘리개까지 모두 합쳐도 이 수를 결코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코반드 후작의 말대로 여기 있는 마법사 모두가 황궁 마법사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한 달로도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넘치고도 남았다.
“감사하게도 코랄 왕국에서도 병력을 내어주었습니다.”
“코랄에서? 정말인가?”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코랄 왕국은 제국 옆에 있는 왕국이었다. 제국 다음으로 크고 강한, 그래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이스는 놀란 눈으로 코반드 후작을 관찰했다. 고작 작은 나라의 후작인 주제에 놀라운 외교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플로라 왕국, 그리고 5개의 연합국, 거기다 코랄 왕국까지 합친다면 압승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날 황제에 올리기 위해 이 수많은 병력을 끌어온다고?’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의심이 갔다.
‘후에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이겠지. 아니면 제국을 쪼개서 나눠 갖든가.’
이미 그를 지지하는 제국의 귀족들은 거의 처형당했다.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이스는 제국을 짓밟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제국을 팔아먹으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하나,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이스의 의심 어린 눈빛을 바로 눈치챈 코반드 후작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 이번 전쟁의 총괄 지휘권을 드리지요. 전하께서는 전장의 길이 남을 영웅이 되는 동시에 제국의 황제가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