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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85화 (85/128)

85.

진짜로 전쟁이 벌어졌다. 아직 전쟁터를 본 게 아니라서 그런지 현실로 와 닿지 않았다. 그나마 리베리아 후작가가 매우 분주해져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인지 히나를 제외한 세인트 황궁학교의 상급반과 졸업반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중급반에도 선택 지원으로 참전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저도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요.”

모든 사실을 알고 세이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담담해서 히나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죠, 히나?”

세이나가 답지 않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저도 전쟁에 참전하고 싶다고 했어요, 신녀님.”

마법사가 아닌 히나는 일부러 아버지인 리베리아 후작이 아닌 세이나를 찾아갔다. 어차피 루이스와 카신의 손아귀에 있는 리베리아 후작에게 부탁해 봐야 거절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히나, 전쟁은 장난이 아니에요.”

“알아요, 신녀님. 하지만 제 힘은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아직 제대로 힘을 다루지도 못하잖아요?”

“다룰 수 있어요. 충분히요. 집에서 조금 더 넓게, 고르게 분산시키는 법을 터득했거든요.”

세이나는 히나의 완고한 태도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인트 상급반은 전쟁 참가가 의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저도 가게 해주세요. 저도 상급반이잖아요.”

결코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히나를 보며 세이나는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수단을 말했다.

“대마법사님께서도 아시는 건가요?”

“결정이 나면 직접 말씀을 드릴 생각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하는 히나를 보며 세이나는 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황궁에는 히나의 힘이 전쟁에 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이미 말해놓았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세요, 히나.”

“하지만 다시 가서 말씀을 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히나는 다소 간절함을 담았다.

세이나가 아니면 전쟁에 데리고 가줄 사람이 없었다. 물론 세이나가 저를 데리고 가줄 확률 또한 매우 적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심하게 그녀를 막으리라.

“곧 출정식이 시작해요. 전 고작 몇 시간 안에 말을 번복할 만큼 히나를 전쟁에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고요. 이미 늦었어요, 히나. 그러니 포기하세요.”

전에 없던 단호한 얼굴로 세이나가 거절했다. 차갑고 냉한 세이나를 보며 잠시 몸을 움찔한 히나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녀님.”

히나는 작게나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이나가 전쟁터 후방에서 병사들을 치료하러 간다고 하니, 어쩌면 제 얼굴을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데려가 주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아무리 버린 딸이라고 해도 전쟁터에 데리고는 못 가는 건가.’

핏덩이인 채로 버려졌다는 것엔 아직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세이나가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애정을 알기 때문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역시 사정이 있었겠지?’

완전히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나 서로 목숨을 위협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은 카신을 들먹이면서까지 저의 출정을 막으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뭉클하기도 했다.

“알겠어요, 신녀님.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결코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세이나를 보고 히나는 물러났다. 세이나가 끝까지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를 붙잡진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세인트를 나온 히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탔다. 그나마 기대했던 유일한 희망이 무너진 것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력은 전쟁을 멈추는 것에도 도움이 되는데.”

주변에선 전부 히나가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카신의 눈치가 보여 성력이 전쟁에 큰 도움이 된다는 칼피온의 말을 전할 수도 없었다.

히나 역시 전쟁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었다. 그녀도 전쟁이 무서웠다. 개미 목숨처럼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전쟁터에 가야 했다. 칼피온의 말대로라면 성력은 전쟁을 멈추게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줄리아와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녀의 적의를 가라앉히기도 했다.

‘적의가 없어진다면 대화도 잘될 테니 전쟁이 금방 끝날지도 모르는 건데.’

그게 아니더라도 성력은 부상을 당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있었다.

히나는 한 손에 성력을 모았다. 손안에 희미한 빛이 생성되더니, 순식간에 강한 빛을 뿜어냈다.

“카신 님한테 말하면 안 되겠지?”

성력으로 전쟁을 멈추게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카신은 그녀가 성력을 쓰는 걸 싫어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결코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다.

똑똑.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히나는 갑자기 멈춘 마차에 의아해하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히나? 히나 맞지?”

커튼을 걷자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말을 타고 있는 라우너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라우너의 모습에 히나가 잠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라우너 오라버니.”

마차 문을 열며 히나가 라우너에게 인사했다.

“방금 뭘 한 거야?”

라우너가 마차 내부에 시선을 두는 것이 보였다.

“방금 여기서 엄청 기분 좋은 느낌이 났는데.”

“아,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차에 멀리서 라우너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우너! 너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갑자기 사라지고…….”

출정식을 위해 황궁 중앙으로 향하던 차에 사라진 라우너에게 한 소리를 하려 직접 따라온 레베스톤 공작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라우너와 얘기하고 있는 히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게, 아는 사람을 만나서요. 지금 갈게요, 어머니.”

라우너가 어머니라 말하자 히나가 다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치마를 잡고 고개를 숙이며 레베스톤 여공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히나 피안 리베리아라고 합니다.”

“리베리아라면…….”

리베리아에 양녀가 들어왔다는 말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소문이었다. 양녀가 들어온 지 꽤 됐음에도 여전히 히나에 대해 소곤거리는 귀족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대마법사가 애지중지했던 시녀라.’

외교 활동과 기사단 훈련으로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그녀도 히나에 대해서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소문이 아니더라도 라우너를 통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아델리아 휴스 레베스톤이라 하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님.”

라우너만 찾고 바로 가려고 했던 아델리아는 목적을 잊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바로 눈을 내리까는 히나와 그녀가 타고 있었던 마차를 번갈아 주시했다.

“이 마차는 자네 건가?”

아델리아가 턱짓으로 히나가 타고 왔던 마차를 가리켰다.

“예.”

히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델리아는 마차에 다가가 내부를 훑었다. 그리곤 마차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묵직한 공기가 주변을 짓눌렀다.

“어머니, 곧 출정식이 있으니 어서 가요.”

긴장되는 분위기를 느낀 건지 라우너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아델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히나에게만 닿아 있었다.

“라우너가 전부터 좋은 느낌이 나는 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히나의 앞까지 다가온 아델리아가 그녀의 턱을 잡고 올렸다.

“바로 너인 모양이구나.”

히나는 눈을 크게 뜨며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여자치고는 큰 키였지만,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했음에도 선이 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가는 체구로도 남자 기사 이상의 기백을 보여주고 있었다.

“방금 무얼 했지?”

확신을 담아 묻는 목소리였다. 히나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어떻게 하고 싶었지만, 아델리아 앞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강한 여자.

부드러운 분위기의 세이나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듬직해서 안심이 됐다.

“히나?”

히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라우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라우너지만, 감히 제 어머니 앞에서는 그도 함부로 까불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이 너무 멋지셔서, 넋을 놨어요.”

아델리아는 히나의 솔직한 말에 짧게 쿡 웃었다.

“멋지다고 해주다니 고맙구나. 그보다 방금 전에 무얼 했지?”

“뭘 하다니요?”

아델리아의 시선이 마차 안과 히나에게 번갈아 닿았다. 어리둥절한 히나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물어본 거란다. 라우너, 그만 가자.”

“예, 어머니.”

익숙한 자세로 단번에 높은 말에 오르는 아델리아를 멍하니 보던 히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성력!”

말을 몰아 돌아가려는 아델리아에게 히나가 다급히 외쳤다.

“성력을 썼어요!”

고삐를 움직이려던 아델리아가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 성력은 전쟁에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아픔도, 고통도 전부 없애주니까요!”

마지막 희망이었다. 히나는 간절함을 담아 빠르게 설명했다.

제국의 공작이자 최고의 기사라고 칭해지는 아델리아는 분명 전쟁의 지휘권을 맡으리라. 황제 다음으로 발언권이 가장 강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적의 전의를 상실하게 할 수도 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성력은 부정적인 감정을 전부 치유해 준다. 성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면 전의를 상실시키고, 양국의 화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난 절대 폭주하진 않을 거야.’

칼피온에게 ‘성력을 가진 아이’의 최후를 듣고 겁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력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유일한 힘이었다. 결국 버림을 받긴 했지만, 성력은 적어도 세이나가 딸인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힘으로 더 당당해지고, 강해지고 싶었다.

“성력에 그런 힘이 있다고?”

라우너에게 얼핏 성력에 대해 듣긴 했다. 하지만 라우너가 히나의 성력에 대해 설명했을 때는 그녀가 아직 자유자재로 성력을 끌어내지 못했을 때였다.

“네!”

히나는 두 손을 모은 채 성력을 끌어냈다. 아델리아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있자니 긴장이 되어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히나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성력을 어서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인지 시간이 무척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기다리다 지친 아델리아가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어쩌지? 왜 안 나오는 거야?’

초조하다 못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던 아델리아가 말 위에서 움직임을 보였을 때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말을 몰고 돌아가는 대신, 말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히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을 풀렴.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버리지 않는 이상, 네 힘은 널 버리지 않을 거야.”

강직하면서도 유연한 목소리에 히나는 바짝 힘이 들어간 어깨를 풀었다.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히나의 두 손이 내려가는 걸 보며 아델리아가 가볍게 웃었다.

“자, 다시 해보렴.”

아델리아가 히나의 두 손을 다시 모아주었다. 히나가 그녀와 제 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방금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히나는 두 눈을 감은 채 두 손에 성력을 모았다.

위이잉―

아주 작은 빛이 만들어졌다. 히나는 감긴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작지만 환한 빛을 내는 성력을 보며 히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며 힘을 모았다. 손톱만큼 작았던 빛은 점점 커져 갔다. 히나의 얼굴에 성력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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