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86화 (86/128)

86.

“이게 그 시녀의 물건일세.”

제이스는 코반드 후작을 신뢰하게 되자마자 그의 요청을 빠르게 행동에 옮겼다.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풀토 공작이 없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꽤 있었다.

카신이 아꼈던 시녀에 대한 신상 조사와 물건이 필요하다는 코반드 후작의 말에 제이스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 히나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녀가 풀토 공작의 영지에서 살 때 쓰던 물건들을 꽤 많이 모아 가져왔다.

“지금은 리베리아 후작의 양녀로 있다고 하더군. 아, 리베리아 후작은 대대로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을 맡아온 가문이네.”

히나가 리베리아 후작의 양녀가 됐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제이스는 이제 막 알았다는 듯 설명했다.

“그 외에도 이번에 위험을 감수하고 그 시녀에 대해 많은 걸 알았다네.”

제이스는 왕위 자리까지 내어준다는 코반드 후작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여태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사실과 조금 더 파고들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차례로 털어놓았다.

“자네 말대로 대마법사가 확실히 그 시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더군.”

의기양양한 얼굴로 제이스가 알아온 정보를 모두 설명하자, 코반드 후작은 역시나, 하고 중얼거렸다.

“리베리아 후작가라. 리베리아 후작이 황궁 마법사단 수장이라면 전쟁에 무조건 참전하겠군요.”

“그렇지. 아마 후작의 두 아들도 전쟁에 참전할걸세. 리베리아 후작은 집안의 명예를 우선시하는 편이니.”

“그럼 전쟁 중 리베리아 후작의 집은 텅텅 비게 되겠군요. 노리기 딱 좋게 됐습니다.”

코반드 후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리베리아 후작가에 쳐들어갈 생각인가? 전쟁 중에? 후작은 수도에 기반을 두고 있네! 전쟁 중에 경비도 삼엄한데 거기까지 어떻게 갈 셈인가? 인원이 적어도 들킬걸세!”

제국의 경비는 제이스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수도가 얼마나 경비가 삼엄한지도.

“저 혼자 가면 들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후작가의 위치를 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 시녀, 제가 데리고 와야겠습니다. 전하께선 그때까지 군대로 화려하게 일을 벌여주시면 됩니다.”

자신만만하게 내뱉는 코반드 후작을 보며 제이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도대체 자네…… 뭔가?”

처음엔 코반드 후작을 비상한 머리만큼이나 영악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왕국의 일개 후작이 할 법한 행동이나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나 말은 이미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코반드 후작의 눈이 꽤 위험해 보였다.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위험한 눈초리가 보이는 듯했다.

“인간이긴 한 건가?”

루이스에 비해 많이 뒤처져서 빛을 발하진 못했지만, 제이스도 제국의 황자였다. 적어도 코반드가 평범한 인간 이상의 것을 이뤘다는 것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코반드는 단단히 무장하고도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이는 마법사 군대를 만들었다. 허수아비라고는 하나, 왕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갈아치울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전쟁 중에 적군의 수도에 쳐들어갈 생각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제이스는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코반드 후작에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인간이 아니라면, 여기서 손을 놓으실 겁니까?”

코반드 후작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제이스는 멍하니 그 눈을 보다 곧 크게 웃었다.

“자네가 인간이 아니라면 더더욱 손을 잡아야겠지. 이건 자네가 인간이고 아니고를 떠나 흔치 않은 기회가 아닌가.”

제이스의 말이 듣기 좋은지 코반드 후작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이건 일생일대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입니다, 전하. 그러니 제 손을 꼭 붙잡고 있으십시오.”

코반드 후작은 히나가 썼다는 물건을 하나씩 훑었다. 낡은 옷부터 시작해서 몇 가지 책도 있었다. 하나씩 손끝으로 물건을 매만지며 확인한 그에게 제이스가 말했다.

“아, 자네가 말한 그 시녀의 머리카락은 거기에 있네.”

후작의 눈이 제이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코반드 후작은 다급히 겹겹이 접혀 있는 낡은 천 자락을 폈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여러 가닥 있었다. 코반드는 숨을 멈추고 그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그걸 가져오기까지 무척 힘들었다네. 하지만 자네의 부탁이라면 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지.”

껄껄거리며 웃는 제이스를 보며 코반드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카신 K 로티우스. 이제 넌 끝이다.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여자를 네 눈앞에서 없애주지.’

순간 붉은 눈동자의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하지만 제이스가 짐승과도 같은 그 눈동자를 발견하기도 전에 코반드 후작의 눈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 * *

“레베스톤 공작, 지금 뭐라고 했나?”

루이스가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베리아 양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폐하.”

심각한 루이스와 달리 아델리아는 변함없는 얼굴로 똑같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루이스는 아델리아 옆에 있는 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루이스의 시선에 히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히나, 자네가 얘기해 보게. 지금 뭘 하겠다고?”

“전쟁에 참전…….”

쾅!

루이스가 책상을 내리치는 바람에 히나의 말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히나. 이건 장난이 아니네. 레베스톤 공작도 마찬가지네. 갑자기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가? 지금 출정식을 앞에 두고 내게 찾아와 하는 말이 귀족 영애를 전쟁터에 데리고 가고 싶다고?”

“세인트의 상급반 학생은 전부 전쟁터에 의무적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히나는 마법사도, 기사도 아니야! 거기서 티타임이라도 가지며 수다라도 떨 생각인가?”

루이스가 아무리 빈정거려도 아델리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화가 얼마나 났는지 씩씩거리는 루이스를 보며 그녀가 입을 뗐다.

“리베리아 양의 성력을 확인했습니다. 그녀의 성력은 고통도, 괴로움도, 두려움도, 절망도 전부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더군요.”

아델리아는 히나의 성력을 보자마자 바로 시험해 보았다. 전쟁으로 가는 것이 두려워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병사에게,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친 환자에게.

두려움에 떨던 병사는 불안하던 정신이 치유되자 자신감을 되찾았고,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환자는 편한 미소를 지은 채 잠들었다.

그녀는 성력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히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히나를 루이스에게 데려온 거였다.

“성력을 넓게 분포시킬 수도 있다고 하니 아주 큰 힘이 될 겁니다. 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들에겐 특히나 많은 도움이 되겠죠.”

옆에서 듣고 있던 히나가 입술을 작게 벌렸다. 눈을 무시무시하게 뜨고 있는 루이스에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아델리아가 멋져 보였다.

‘그보다 아주 잠깐 내 힘을 본 걸로 이렇게까지 많이 파악했다고?’

모든 감각이 예민해서일까? 아델리아는 히나도 모르는 성력의 효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그걸 모두 시험해 봤다는 말은 알겠네. 하지만.”

루이스가 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신에겐 무어라 설명할 텐가?”

히나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걸 왜 대마법사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옆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델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보호자는 리베리아 후작이 아닙니까? 폐하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 알리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네!”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델리아를 두고 히나에게 물었다.

“히나. 카신과 연인이 되었다지?”

처음 안 사실에 아델리아가 눈을 찌푸리며 히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델리아는 히나와 카신이 각별한 사이라고만 알지, 자세한 상황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얼마 전, 카신이 정식으로 약혼을 올리고 싶다고 내게 허락을 받으러 왔네만, 알고 있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는 히나를 보며 루이스는 말을 이었다.

“역시 모르는 모양이군. 제국의 상황도 물론이거니,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을 맡고 있는 리베리아 후작가가 바빠 지금은 허락해 줄 수 없다고 하니, 전쟁이 끝나면 다시 허락을 받으러 온다며 돌아갔지.”

전쟁을 준비하는 중에 약혼 허락을 받으러 온 카신을 보고 루이스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철없는 카신의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어서 허락해 주라는 카신에게 히나의 집안은 전쟁 준비 중이라 힘들다는 말을 하며 달래서 돌려보냈다.

“카신은 당연히 전쟁은 신경도 쓰지 않아. 그러니 카신의 연인인 그대도 마찬가지여야 해. 알고는 있겠지?”

루이스는 카신이 전쟁에 참가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갖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만 있어주면 된다. 그건 황제인 루이스나 다른 귀족들도 다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히나가 전쟁에 참전한다면 말이 달랐다. 히나로 인해 카신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만약 전쟁에서 히나가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카신과 제국은 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판국에 카신이 절대 등을 돌리게 할 순 없지.’

루이스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세인트 학생 중 유일하게 히나만 참전에서 제외시켰다.

“저는 제국인이에요, 폐하. 카신 님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해서 저도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히나도 전쟁은 무서웠다. 무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성력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불공정한 방법으로 세인트에 들어갔지만, 저도 세인트의 상급반 학생입니다. 제 힘이 도움이 된다면 전쟁에 꼭 참전하고 싶습니다, 폐하.”

루이스가 한 손으로 머리를 짚는 걸 보며 히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카신 님께는 제가 설명을 드릴게요.”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루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델리아가 조금 변경된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1차 출정 때 함께 가기로 한 라우너를 두고 가겠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델리아는 라우너를 데리고 함께 선두에 서서 군대를 지위하려 했다. 라우너가 선두에 서길 너무나도 원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우너의 실력이라면 히나를 충분히 지켜낼 것입니다.”

다행히 히나가 합류함으로써 라우너를 후발대에 넣을 수 있었다.

‘역시 라우너를 선두에 세울 순 없어.’

라우너는 누가 뭐라 해도 실력이 출중한 기사였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라우너를 선두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

라우너가 전쟁 중에 큰 공을 세우리란 건 두말할 것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선두에 서게 된다면 엄청난 공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실력은 충분하지만, 너무 일러.’

그러나 라우너는 너무 어렸다. 거기다 대련에서도 거의 무패를 자랑했기 때문에 자만하는 정도가 지나쳤다.

‘전쟁에서 지휘를 하면서 싸우기엔 라우너는 너무 제멋대로야. 실력은 확실해도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적의 실력을 아직 정확히 모른다. 확실한 건 단단히 무장한 마법사 군대가 계속해서 성벽을 부수고 영토를 침략할 만큼 만만치 않다는 거였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마법사 군대를 상대로 전쟁 중에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아들까지 신경 쓸 순 없었다. 혈기 왕성한 라우너는 뒤에서 조금 지켜보고 냉정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라우너를 선두에 넣은 건 제멋대로인 아들의 성격을 무척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선두에서 억지로 뺐다가 진형도 무시하고 튀어나오면 곤란하지.’

전쟁은 대련이 아니다. 어떠한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아델리아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라우너가 진형도 뒤로한 채 무작정 앞으로 튀어나올까 불안했다.

그렇게까지 제멋대로가 아니라고 믿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들의 돌발 행동을 생각하면 옆에서 제재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 판단했었다.

‘역시 라우너는 선두에 맞지 않아.’

자신이 죽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다면, 확실히 라우너를 최선두에 세우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

제아무리 그녀가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해도 아들의 목숨이 언제 위험할지 모르는 곳에서 냉정하게 싸울 순 없었다.

기사라고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는 어미의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유분방한 라우너가 실수라도 해서 목숨을 잃는다는 상상을 할 때마다 그녀는 부끄럽게도 아들을 전쟁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 다행이군.’

히나를 좋아하는 라우너의 마음을 이용한 건 조금 미안하지만, 이건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라우너 경이라면 믿을 만하지.”

라우너의 실력을 익히 들었던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한데 선두에 서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나?”

“히나 양을 지키라고 하니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선두에 서고 싶어 미치겠다는 갈망과 히나를 실력이 어중간한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다는 불안을 두고 꽤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라우너는 히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할까 봐 불안했었던 아델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그렇군.”

“리베리아 후작의 차남도 2차 출정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히나 양은 그때 라우너와 함께 오기로 하지요.”

아델리아는 이미 계획까지 모두 짜놓은 상태였다. 루이스는 히나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카신에게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 안 되네. 알겠나?”

과연 카신이 허락을 해줄까?

히나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야 해!’

전쟁에 참전하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히나는 결단이 서린 얼굴로 대답했다.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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