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90화 (90/128)

90.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나마 적의 마법사 부대가 도망가는 제국의 퇴각군을 뒤쫓지 않아 도피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부하들을 많이 잃지 않았지만, 아델리아에겐 이보다 더 굴욕적일 순 없었다. 마찬가지로 리베리아 후작도 그녀의 앞에 처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마법사들은 어떻지?”

“그것이…….”

신호탄으로 퇴각 명령을 받고 후퇴한 리베리아 후작과 중간 지점에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가 뿔뿔이 흩어지는 최악의 경우는 그나마 면했다.

“적의 마법사 부대가 무너진 성벽을 뚫고 황궁 마법사단을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태제 전하께서 마법사 부대와 떨어지자 겁을 먹고 도망가서 피할 수는 있었지만…….”

마법사 부대와 떨어진 태제, 제이스는 당황하더니 다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 부대만 믿고 안일하게 진격하던 적의 병사들 일부는 대열도 잊고 달아났다.

그 틈이 아니었다면,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반격하는 마법사 부대에게서 제국군은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국과 연합해 제국을 침공한 이가 한때 제국의 황자였던 제이스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그가 침략군의 선봉장으로 선다는 것은 이미 정보통을 통해 들어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 부대의 무시무시함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적의 마법사를 죽여봤나?”

“부끄럽지만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고, 보호 마법도 쉽게 깨어버려서…….”

검기를 다루는 범위가 넓은 아델리아와 말을 타는 것이 능숙한 기사들은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둔한 마법사들은 그 어떤 보호도 없이 제대로 도망가지 못하고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리베리아 후작은 부하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보며 통탄을 금치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마법사 부대와 상대의 마법사 부대의 실력 차이는 어떻던가?”

“안타깝게도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공격 마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보호 마법으로는 그들의 발을 조금 묶어놓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아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짐작했던 그대로였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위풍당당하게 출정했던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때로 떨어졌다.

“대승을 거둔 적군이 이 기세를 살려 더 빠르게 진격할 걸세. 그 전에 어서 후발대와 만나 새롭게 작전을 짜야겠군.”

아델리아는 최정예 부대로 직접 적군의 위세를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후발대와 거리를 두고 작전을 세웠다.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 짧았고, 마법사 부대를 앞세워 쳐들어오는 적군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적군의 위세가 아무리 맹렬하다고 해도 연달아 성문을 돌파해서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름길로 후발대와 만나 작전을 세울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적군이 계속 진격하다니요? 연달아 성문이 몇 개가 함락된 줄 아십니까? 적군도 지쳐 쉴 타이밍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무조건 진격할 걸세.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든 후발대와 빨리 만나 작전을 세워야 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지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쉴 틈은…….”

더는 들을 시간이 없다는 듯, 아델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리베리아 후작을 보며 빠르게 말했다.

“내 손으로 적군 마법사를 여럿 죽였네. 마법사가 입은 갑옷의 속은…….”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

적군의 마법사를 떠올린 아델리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잠시 말을 멈췄다.

“짐작은 하겠지만, 적군의 마법사는 이미 평범함을 벗어났어.”

마법사의 단단한 갑옷을 가르며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제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시험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었어야 할 깊은 상처도 빠르게 붙어 곧 멀쩡하게 움직였다. 완전히 몸이 갈라지지 않는 이상은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체력도 끝이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진격할 가능성이 컸다.

특히나 연달아 승전보를 울린 제이스는 어서 전쟁을 빠르게 끝내, 위대한 역사를 새로 쓰고 보다 강력한 황제가 되고 싶을 것이리라.

“나머지는 가면서 말해주겠네. 그래도 마법사인 자네가 나보다는 적의 신체 구조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아델리아는 그 모습을 함께 보았던 최정예 기사들의 입을 곧장 단속시켰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수많은 탈영병이 생겨 군대가 와해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적의 마법사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것이 알려지기 전에, 대비책을 마련해서 병사들이 당황하지 않게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자네의 수양딸에 대해서도 자세히 듣고 싶네만.”

다급히 이동 준비를 하면서 아델리아는 묘한 힘을 쓰던 히나를 떠올렸다. 히나가 얼마나, 어디까지 성력을 다룰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최악의 경우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리라.

* * *

“히나,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세이나가 목소리를 떨며 당황한 얼굴로 히나를 바라보았다. 현실이라 믿어지지 않는지 세이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저도 전쟁에 참전하기로 했어요, 신녀님.”

“제가 그렇게나 말렸는데……!”

드물게 언성을 높이는 세이나를 다른 신녀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주변의 시선에 세이나는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

“히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요.”

진지하게 돌아가라 말하는 세이나를 보며 히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신녀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돌아가지 않아요.”

친모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세이나는 자신을 아주 많이 아껴주었다. 히나는 세이나가 자신에게 지어주는 미소가 다른 학생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망보다는 그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컸다.

‘신녀님을 갑자기 엄마로 받아들이기엔 무리도 있으니.’

부모가 살아 있다고 믿었을 땐, 친모를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세이나를 보니 그렇지 않았다.

세이나는 히나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스승이기도 했다. 그 이미지가 너무 박혀 있어서 그런지 그녀가 친모라는 사실이 쉽게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생각도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도 있고.’

가족을 원했던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옆에는 진짜 오라비보다도 더 오라비 같은 루터도 있었고, 나름대로 가족 노릇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기들도 있고, 그녀를 인정해 주기 시작한 교수님들도 있다.

거기다…….

‘카신 님도 내 곁에 있어.’

히나는 피로 이어진 혈육이라도 카신처럼 자신을 그리 아껴줄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한결같은 사랑을 믿고, 그에 보답하고 싶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요, 신녀님.”

세이나와는 더는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볼 때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싫었다. 이제 그만 됐다고도 생각은 했지만, 막상 마주치면 아니었다. 아직은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히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그러게, 내가 전쟁에 참전하지 말라고 했잖아. 신녀님도 저렇게나 걱정하시는데.”

멀리서 세이나와의 언쟁을 본 건지 루터가 혀를 찼다. 그의 눈에도 그녀가 지금 당장 돌아갔으면, 하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히나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에 차마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가 없던 건지 루터가 인상을 찌푸리다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 마! 히나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내 옆에만 꼭 붙어 있으라니까?”

라우너가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외쳤다. 루터가 눈치 없이 떠드는 라우너를 짜증스럽게 보다가 히나를 보고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멀리서 선발대가 오고 있습니다!”

후발대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선발대와 만나기로 한 시일이 꽤 남아 있었다. 이제 막 자리를 잡은 차에 연통도 없이 달려온 선발대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 벌써 오지?”

계획이 변경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틀어지는 건…….

라우너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다가오는 선발대의 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 * *

제이스의 탐욕은 이용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코반드 후작은 리베리아 후작의 저택을 보며 감격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어!’

코반드는 한쪽 눈과 뺨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를 매만졌다. 안대 속 화상에 흉측해진 피부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날의 끔찍한 고통과 참혹했던 좌절감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크고 화려한 저택 주변에 붉은빛이 감도는 투명한 결계를 친 코반드는 저택의 정문으로 당당히 침입했다. 그리고 누가 그를 발견할 새도 없이 문 앞에 있는 하녀 한 명을 붙잡았다.

“히나. 히나 피안 리베리아는 어디에 있지? 이곳의 수양딸 말이다.”

“아, 아…….”

붉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기운에 하녀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침입자다! 저택에 침입자가 들어왔다!”

스산한 기운을 뿜으며 갑작스레 쳐들어온 코반드를 이상하게 여긴 집사가 다급히 외쳤다. 저택을 지키는 사병들이 순식간에 몰려와 코반드 주변을 에워쌌다.

“꺄악!”

겁에 질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하녀를 집어 던진 코반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 중 섞여 있는 시종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으아악!”

허공에 손을 뻗었을 뿐인데, 시종의 몸이 딸려 왔다. 사병들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시종이 발끝에 힘을 주며 버티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 시종을 놓아줘라!”

코반드에게 사병들의 위협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끌려온 시종의 목을 움켜쥔 채 허공에 높이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발을 휘저으며 시종이 고통을 호소하는 걸 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히나 피안 리베리아. 그 여자는 어디에 있지?”

“으으윽!”

“말한다면 당장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코반드가 시종의 목을 쥐고 있는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종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떠 있는 그대로였다. 겨우 숨이 쉬어지자 시종이 컥컥, 거리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히나 피안 리베리아. 그 여자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사병들이 눈짓으로 서로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심상치 않은 남자를 한 번에 처치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달려들기 직전,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우두둑, 우두둑.

뼈가 부서지는 잔혹한 소리와 함께 시종의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시종이 거품을 문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코반드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시종을 보고만 있었다. 마법을 쓴 것 같았지만 그 어떤 마법진도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 마법사가 숨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법 주문이나 마법진도 없이 기이한 마법을 쓰는 마법사.

사병들 사이에 있던 마법사들은 코반드가 보통 실력의 마법사가 아닌 것을 깨닫고 다급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마법사들의 공격을 시작으로 사병들도 코반드에게 달려들었다.

와장창!

코반드가 달려드는 인간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에게 달려들던 공격 마법과 더불어 사병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이었다. 정도를 모르는 코반드의 힘에 벽에 금이 가거나 부서지고, 창문이 깨어졌다.

“히나 피안 리베리아. 지금 어느 방에 있나?”

코반드가 팔다리가 비틀린 채 숨을 헐떡이는 시종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던 시종은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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