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루터는 뜨겁게 펄펄 끓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옆에 정신을 잃은 히나를 확인하고는 겨우 사태를 파악했다.
“히나? 히나!”
루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히나를 흔들었다. 다행히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었는지, 몇 번 콜록거리던 히나가 깜빡이며 눈을 떴다.
“오라버니? 여긴 어디예요?”
주변에는 뜨거운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들은 그 한가운데에 그나마 움푹 솟아 있는 작은 지표에 표류되어 있었다.
“그, 글쎄.”
루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화산구?’
둥그런 사방에는 단단한 벽이 높게 솟아 있었다. 출구라고는 높은 벽 위로 보이는 뻥 뚫린 하늘뿐이었다. 얼마나 높은지 고개를 아프도록 뒤로 젖혀야 끝이 보였다.
용암을 건너 벽 근처까지 가는 것도 무리지만, 어찌해서 간다고 해도 직각의 경사를 올라야 했다. 저 벽을 타고 오르다가 만약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럼 끝이야.’
아래는 펄펄 끓는 용암이었다. 숨을 쉬기조차 어려운.
“오라버니…… 우리 왜 여기 있어요?”
“나도 몰라.”
“라우너 오라버니는 괜찮은가요? 카신 님은 어떻게 됐죠? 그 커다란 드래곤은요?”
차근차근 아는 것만 대충 설명을 해준 루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용암을 보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히나에게 물었다.
“히나, 일어날 수 있겠어?”
루터를 잠시 보던 히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일어났다. 당장에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했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버텼다.
“그보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히나는 카신이 커다란 레드 드래곤과 대치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용암의 열기로 이제는 몸이 따끔거렸다. 오래 있으면 이대로 익을 것 같았다.
루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히나는 답이 없는 루터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위아래로 들었다 내리며 출구까지의 높이를 계산하는 듯했다.
“마법. 마법으로 나가야 해.”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루터가 대답했다.
“마법으로요?”
루터는 마력이 약했다. 거기다 히나는 과도하게 성력을 쓴 탓에 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힘이 있다고 한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쓸모가 없었다.
“저기까지 가능하겠어요?”
바닥은 펄펄 끓는 용암이었다. 만약 올라가다가 마력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인 것이다.
“부양 마법은 교수님께 배웠어.”
루터는 카신의 스파르타 교육으로 부양 마법은 확실하게 배웠다. 제 몸을 공중에 띄울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하지만 두 사람을 저 높은 곳까지 올릴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이 남아 있을까?’
전쟁터 후방에 있어 그나마 마법을 마구 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마법을 안 쓴 건 아니었다. 완전한 상태도 아닌데 불확실하게 마법을 쓰는 건 그로서도 무척 불안한 일이었다.
“저기까지 올라갈 순 있을까요?”
히나의 물음에 루터는 침묵을 지켰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마법을 아예 쓰지 않았다고 해도 루터에겐 자신과 히나 모두 저 높은 곳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이 없었다.
‘평소보다 더 마력이 적게 남았어. 두 사람은 무리야.’
그럼 만약 한 사람만 올라간다면?
아래에서는 막연한 높이라 확실히 계산할 순 없지만, 한 명도 끝까지 올라갈 수 있나 싶을 만큼의 까마득한 높이였다. 하지만 두 명이 아닌 한 명이라면 확률이 확실하게 올라갔다.
‘누가 올라가야 하지?’
루터는 히나를 보았다. 체구가 작은 만큼 가벼운 히나라면 허공에 띄우기가 조금 더 쉬울 것이다.
대신 저 벽을 다 올라갔을 때, 그는 시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히나를 안전한 곳에 내려주기 힘들다.
‘그럼 내가?’
하지만 히나를 이곳에 혼자 두고 올라가는 것은…….
“오라버니 혼자 올라갈 수 있겠어요? 만약 갈 수 있다면 올라가서 주변에 도움을 청해주세요.”
히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루터가 히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히나, 아직 힘 있지?”
이곳에서 혼자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냐고 묻는 걸로 생각한 히나가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
“그럼 같이 나가자.”
히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어차피 둘이 나가나 혼자 나가나 자신 없어. 그럴 바에 같이 가자, 히나.”
어차피 혼자서 올라가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나간다고 해도 밖에 도와줄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용암이 들끓는 화산구 안에 오래 있다가는 살이 익어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중간에 마력이 떨어지면 벽에 매달려야 돼.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오라버니 혼자 가는 편이 낫지 않아요?”
“내가 나갔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우릴 여기에 보낸 건 그 나쁜 드래곤이잖아. 널 언제 찾으러 올지 모른다고!”
멀리서 봐서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순 없지만, 위급 상황이었다. 적의 목표는 히나이니, 히나를 이곳에서 빨리 빼내야 했다.
‘이동이 된 건 빛이 솟아오를 때였으니까. 어쩌면 나도 함께 이동된 걸 모를지도 몰라.’
눈을 뜰 수도 없게 환한 빛이 사방에 번졌다. 그러니 적도 대충 히나를 향해 이동 마법을 건 걸 수도 있다.
펄펄 끓는 용암으로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체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둘 다 이 뜨거운 열기에 온몸이 익어 죽을지도 모른다.
“가자, 히나.”
“알겠어요, 오라버니.”
어떻게든 히나와 함께 나간다. 루터는 여전히 하늘처럼 멀고 먼 출구를 보며 빠르게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빛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카신은 마법사들이 강한 빛을 뿜어내며 자폭하는 것을 막기는커녕 가짜 히나를 다급히 잡느라고 휘청거려 진짜 히나가 있는 방향까지 잃었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강렬한 빛 속에서 카신의 눈을 따돌린 코반드는 전속력으로 히나가 있던 방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히나가 쓰러져 있었던 곳을 향해 공간이동 마법을 시현했다.
“코랄드!”
코반드의 마력에 반응한 카신이 다가왔을 무렵에는 마법이 이미 시현된 후였다.
곧 눈을 뜰 수 없을 만큼의 강한 빛이 사라졌다. 카신은 빛이 사라지기 무섭게 코반드의 몸을 덥석 잡고 움켜쥐었다.
“히나는 어디 있지?”
코반드는 목이 졸리는 상태에서도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카신의 눈이 더 사나워졌다.
“당장 말해!”
카신은 코반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동시에 코반드의 몸 주변으로 어둠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를 덮쳤다.
“큭큭, 내가 말할 것 같나?”
코반드는 주변의 어둠에 온몸을 맡겼다. 마치 지금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세였다.
“어디 한번 죽여보거라. 네 여자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헤매고 싶다면 말이야.”
“히나를 어디로 보냈지?”
“날 고문이라도 해서 알아내 보지 그런가? 아, 그사이에 네 여자가 죽어버려도 난 모르는 일이네.”
코반드를 옭아매던 어둠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신이 그 앞까지 걸어갔다.
세로로 찢어진 샛노란 빛의 눈동자는 드래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특히나 그에게서 뿜어지는 흉포한 살기는 말이다.
“원하는 게 뭐지?”
코반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스윽 지었다. 동시에 멀리서 허망하게 히나를 놓치고 눈치를 보고 있던 칼피온은 불길한 예감에 인상을 구겼다.
“네 심장. 네 심장이 거래 조건이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기 마련이었다. 칼피온은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그것만은 안 돼!’
카신의 심장은 특별했다. 카신도 그걸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심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절대 빼앗기지…….
“그러지.”
“로티우스!”
군더더기 없는 카신의 대답에 칼피온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무미건조한 카신의 눈이 잠시 칼피온을 향했으나,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카신은 코반드를 보며 오른손을 들어 제 심장이 있는 곳에 가져갔다.
“거래 조건은 내 심장과 히나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고,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히나의 주변을 위협하여 건드리는 것도 금지, 까지 하면 되겠군.”
너무나도 순순히 거래에 응하는 카신을 보고 코반드가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그가 입가에 계속 미소를 건 채 대답했다.
“그러지.”
“안 돼! 그 심장은 안 된다고!”
정말로 제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칼피온이 다급히 다가와 가로막으려 들었다. 카신은 칼피온을 향해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칼피온이 몸이 우뚝 멈췄다.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그는 검은 눈동자를 일렁이며 카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거래 조건에 대한 언령을 채우도록 하지. 서로의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의지를 갖고 있는 어둠의 힘이 지키지 않는 자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카신의 앞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장에 둘을 집어삼킬 것처럼 솟구친 어둠에서는 크기를 잴 수 없는 무한한 힘이 느껴졌다.
“여기다 약속해. 네 입으로, 언령을 채우는 거야. 그러면 내 심장을 네게 주지.”
브레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력화시키고, 최강의 종족 중에서 정점의 힘을 가진 블랙 드래곤까지 손짓 하나로 제압한다. 그러고도 드래곤인 자신을 압도하는 무한한 힘도 내보였다.
넋을 놓고 카신의 힘을 체감하던 코반드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며 광적인 웃음을 흘렸다.
‘곧 저 힘이 내 것이 되는 거야.’
무한한 힘이 응축되어 있다는 드래곤 하트를 수백 개는 삼켜서 만들어진 최강의 심장이 바로 카신의 드래곤 하트였다.
카신의 심장만, 그의 힘이 모두 응축된 드래곤 하트만 가진다면 세계 최강, 현재 카신과도 같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심장을 잃어버린 카신을 처치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카신처럼 약점도 없다. 칼피온처럼 종족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최강이 되는 거였다.
언령이라는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마법으로 묶어놓는다고는 하지만, 히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거였다. 코반드는 호선을 그리던 입술을 벌리며 카신을 향해 대답하려 했다.
“아, 안 돼. 야, 약속, 약속, 했잖…….”
눈의 깜빡임 외에는 완전히 멈춘 줄 알았던 칼피온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어떻게든 카신의 행동을 막으려 들었다.
카신의 스산한 눈이 잠시 칼피온에게 향했다. 평소와 달리 절망에 찬 칼피온의 얼굴은 아주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무표정했던 카신의 입가 사이로 픽, 하고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안.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군, 칼피온.”
상처투성이의 어린 블랙 드래곤이었던 칼피온과 어엿한 드래곤 로드가 된 칼피온이 겹쳐 보였다.
“히나는 내 전부야. 그러니 한 번만 봐줘.”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막 성체가 된 풋풋했던 칼피온과 했던 약속은 아직도 생생했다. 카신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그의 동정심을 가장 크게 불러일으킨 존재는 우습게도 최강의 생명체라 불리는 드래곤들의 로드, 칼피온이었다. 처음 본 그의 외양은 무척 가엽고 처참해서, 여전히 생생하게 카신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마음이 약해졌던 걸까, 아니면 들끓는 변덕이 또 올라왔던 걸까.
아주 오래전, 카신은 칼피온과 두 가지 약속을 했다. 한 가지는 드래곤을 이유 없이 학살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내 드래곤 하트를 그 누구에게도 건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만약 내가 생을 다해 죽는다면, 내 심장을 갖고 함께 죽을 테니 울지 말렴.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어리고 가여운 블랙 드래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