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02화 (102/128)

102.

증거 하나 없이, 한 줌이 되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고?

카신은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하는 화염이 화산구를 덮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세상도 멈췄다.

“하하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면서 고작 계집 하나 죽은 게 그렇게 충격이더냐?”

주변에 머물러 있던 카신의 힘이 모두 사라졌다. 자유를 되찾자마자 칼피온은 고개를 돌려 화산구를 돌아보았다. 그가 급히 숨을 멈추었다.

한동안 활동을 멈추었던 화산이 갑자기 폭발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아까의 싸움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드래곤의 브레스는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다. 거기다 과거 장로의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코반드의 힘은 드래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했다. 그의 엄청난 힘과 상응하는 힘이 계속 부딪혔다.

두 힘이 상충하며 울리는 진동은 멀리 있는 지층까지 진동하여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화산 활동이 급격하게 일어나서 화염이 폭발한 거였다.

이런 변수까지는 코반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밖에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고, 다른 것에도 절대 영향을 받지 않을 화산구 안에 히나를 숨겼을 테지. 사나운 짐승도, 포식자도 다가오지 않을 곳이니 말이다.

‘어떻게 하지?’

누가 발견할 만큼 다가가지도 못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으며, 거기다 도망도 가지 못하는 곳.

화산구야말로 히나를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니 화산구 안에 넣어놓았다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카신에게 내건 최상의 조건까지 급히 마다한 걸 보니 말이다.

카신도 코반드의 말이 사실이란 걸, 히나가 흔적도 하나 남기지 않고 죽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큰일이야.’

허튼소리는 일절 하지 않는 카신이 히나를 그의 전부라고 했다. 그 전부가 사라졌다. 칼피온은 전부가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카신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내 심장을 갖고 싶다고 했지.”

세상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던 카신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담담했다.

“이 세상의 정점에 서고 싶다고도 했지.”

카신의 샛노란 눈이 천천히 코반드에게 향했다.

“네 소원을 이루어주마.”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은 무척 건조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너 혼자 남아 평생을 홀로 사는 것도 꽤 괜찮지 않겠나.”

그리 말한 카신은 가볍게 픽 웃었다.

“무, 무슨 소리야? 로티우스! 일단 정신 차리고……!”

“칼피온.”

카신이 고개를 돌려 눈꼬리까지 예쁘게 접어 웃었다. 초연한 카신의 모습은 세상과 너무 이질적으로 보였다.

칼피온은 카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이건 불길한 정도가 아니었다. 적색 신호가 그의 머릿속에 마구 울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미안한 일이 생겼어.”

“아, 안 돼, 로티우스!”

“이 세상을 없애야겠어.”

“세상을 없앤다니, 무슨 소리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사무친 외로움이지.”

카신은 자신의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끝에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듯,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이 세상을 없애고, 내 심장을 주마.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혼자 군림하며 죽지 못하는 몸으로 살아보거라.”

카신의 손끝이 새하얀 제복을, 가슴을 가르며 내려갔다. 심장을 앞에 두고 살점이 깔끔하게 양옆으로 갈라졌다.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건지,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가축의 살을 가르기라도 하는 듯,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가슴을 완전히 가른 그가 제 손으로 심장을 꺼냈다. 두근두근 고동치는 심장이 모두의 눈에 드러났다.

“잠깐, 로티우스! 세상을 없앤다니! 안 돼, 그건 안 된다고!”

칼피온이 그를 말리기 위해, 심장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칼피온의 손이 닿기도 전에 카신의 주변으로 둥그런 막이 쳐졌다. 얇고 투명한 막이었다.

칼피온이 다가가 그 얇은 막을 마구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을 쓰고, 부수려 해도 막에는 금도 가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네가 세상을 없앤다는 거야? 그것만은 안 돼! 안 된다고!”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냈지만, 카신은 멀쩡했다.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순간 그의 입에서 울컥, 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의 입가에는 스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심장을 빼낸 인간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네 세상에서 혼자 군림하며 살아가렴, 코랄드.”

카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코반드의 몸에도 그와 같이 둥글고 투명한 막이 생겼다. 코반드가 무어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소리까지 모두 차단된 막에 갇힌 코반드가 절규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 말이지.”

카신은 아주 오래전, 모든 생물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일지 연구했다. 뜻밖에 오랜 세월을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이 명제의 답은 아주 의외였다.

‘바로 영원한 고독이었지.’

처음에는 그도 정신적인 슬픔, 육체적인 고통이 가장 큰 괴로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서는 홀로 오랜 시간 살아왔던 그조차도 버티지 못했다. 카신은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을 지우며 그리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세상을 없앤다.”

영원한 고독만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건 없다.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없지만, 동시에 행복이나 성취, 꿈도 없이 살아야 한다면?

그의 심장이 지닌 힘이라면 적어도 앞으로 수천 년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탄생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무의 공간에서 코반드가 느낄 괴로움을 떠올리며 카신은 꽤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만! 그만두라고!”

카신을 중심으로 주변이 까맣게 변했다. 그 어둠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땅도, 하늘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주변의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칼피온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며 뒤로 물러났다.

“안 돼! 로티우스!”

칼피온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카신은 투명한 막에 갇혀 어둠에 삼켜지지 않는 코반드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심장이 만들어낸 어둠은 코반드를 제외한 세상을 삼킨 다음, 마지막으로 그도 삼킬 것이다.

‘생명력이 강한 심장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육체인 코반드를 주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그 무엇도 만들어지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코반드는 생명력이 강한 심장을 가진 채 평생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 누구도 없는 곳에서 홀로 군림하며 말이다.

카신의 주변에 생성된 어둠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해 갔다. 칼피온이 카신의 행동을 막기 위해 여러 종류의 마법을 부렸다. 하지만 어둠은 공격 마법도, 심지어 방어 마법도 모두 빨아들였다.

“그만둬! 정말 세상을 파멸시킬 셈이야?”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겁먹은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칼피온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인지 홀로 말을 몰고 온 세이나가 넋을 놓은 채 카신과 그 주변의 어둠을 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신녀?’

칼피온은 다급히 세이나에게 다가갔다.

“당신, 신녀지? 당장, 지금 당장 신력으로 저걸 막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드래곤에게 히나가 잡혀가고, 또 떨어지는 걸 멀리서 보았다. 그녀를 찾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 무시한 채 세이나는 말을 한 필 빼앗아 무작정 달려왔다. 신녀들의 중축인 그녀를 붙잡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히나만이 가득했다.

후방에 있던 루터와 달리 전방에 있던 세이나는 히나가 어디로 떨어졌는지까지는 잘 보지 못했다. 그저 강한 어둠, 카신의 힘이 느껴지는 데로 말을 몰았다. 카신이라면 히나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 알 것이니.

“뭐 하는 거야? 당신 대신녀잖아! 신력을 쓸 수 있지? 내가 증폭할 테니까…….”

“저걸…… 막는다고?”

세이나는 이곳에 온 목적도 잊은 채 휘몰아치는 어둠을 멍하니 쳐다봤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잠식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둠은 계속 부풀어져 갔다. 무한대로 불어나는 어둠의 기운이 지금처럼 쉬지 않고 퍼진다면,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저런 것에 삼켜지면 끝이다. 순간 세이나는 찰나 동안 잊어버린 히나를 떠올렸다.

“히, 히나! 히나는 어디에 있죠?”

“히나는…….”

칼피온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자 세이나는 저 멀리 있는 카신을 향해 소리쳤다.

“히나는 어디에 있냐고요!”

카신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잠시 세이나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히나는……!”

“이봐, 신녀! 로티우스는 지금 그 여자를 잃고 이 세계를 지우려고 한다고!”

칼피온은 다급히 세이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세이나의 신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카신의 어둠의 기운을 막아볼 시도라도 할 셈이었다.

‘과연 막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정화하는 신력을 증폭시키는 건 어려웠지만, 못 할 건 없었다. 칼피온은 희대의 대신녀라고 불리는 세이나의 신력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시도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 죽는 것보다 뭐라도 하나 해야지 않겠어?’

카신의 어둠을 막을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여자를 잃다니 무슨 소리지요? 지금 히나가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래, 히나는 죽었다고! 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어서 신력을 내보내라고, 이 망할 신녀야!”

카신의 힘은 무엇이든 빨아들이고 있었다. 칼피온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힘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신력이라면, 조금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아…… 히나…….”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세이나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큰 충격에 빠진 듯, 세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칼피온은 맥을 못 추린 채 정신을 놓아버리는 세이나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이봐, 신녀! 신녀!”

어둠이 그가 있는 곳까지 번지며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별다른 시도도 하지 못한 채 세이나를 데리고 그 자리를 피했다. 순식간에 퍼지는 어둠을 보며 칼피온은 빠른 속도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저 미친놈.”

카신이 손톱만큼 작아질 정도로 멀어져만 갔다. 그만큼 어둠이 크게 번지며 그 주변을 모두 삼켰다.

“젠장!”

칼피온은 세상이 사라지려는 것도 모른 채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는 세이나를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신 차리라고, 신녀!”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도 세이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이건 붕괴됐다고 봐야 했다.

칼피온은 결국 세이나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놓았다. 바닥에 털썩 쓰러진 그녀는 초점도 없는 눈으로 황망하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세상이 사라지는 걸 보기만 해야 돼?’

아무런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코반드를 제외한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이건……!”

칼피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천천히 화산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성력.”

살아 있다. 희미하지만, 분명 느껴졌다. 성력에 예민한 그의 몸이 아주 희미한 히나의 기운을 잡아내고 있었다.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칼피온은 다급히 저 멀리 눈에 보이는 화산구 쪽으로 공간이동 마법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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