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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103화 (103/128)

103.

주변의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나둘 떨어지던 화염과 화산재는 이제 셀 수 없이 늘어나 주변을 뒤덮었다.

푸르른 풀과 나무들이 타들어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동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 나갔다. 하나둘 붉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생명들을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 히나는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이제 한계야.”

루터가 털썩 주저앉았다. 카신에게 죽을 위협을 느끼며 배운 방어 마법은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버텨주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였다.

방어 마법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루터는 헐떡이면서도 히나가 걱정이 되었다.

“히나, 미안해.”

갑작스러운 루터의 사과에 히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처참한 배경 앞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가 보였다. 루터의 우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히나는 당황스러웠다.

“오라버니?”

루터는 긍지 높은 귀족이었다. 그의 드높은 자존심은 절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느 때라도 항상 의연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본분을 지키려 노력했다. 때로는 그 모습들이 어눌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함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오라비가 못나서, 널 지켜주지 못했어. 미안해, 히나.”

히나가 리베리아 가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아니, 인정은 했지만, 쓸데없는 자존심에 히나를 구박하고 나무랐다.

처음엔 정말로 미웠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순수한 히나가 좋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귀엽고 예쁜 동생이었으니까.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절…….”

위잉.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던 보호 마법이 사라졌다. 루터가 일어나 두 팔을 벌려 히나를 보호하듯 꽉 안았다. 여기서 함께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히나를 지켜주고 싶었다.

화산재와 함께 뜨거운 불덩이가 루터의 몸 위로 떨어졌다. 숨 막히게 조여오는 주변 공기보다도, 보호 마법이 사라지자마자 내리치는 쇄설물에 온몸이 뜨겁게 타는 것 같았다.

“넌 내 동생이야, 히나.”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루터는 적어도 히나가 좋은 가족,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 뜻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히나가 그토록 바라던 거였으니까.

‘어째서 이 말을 계속 해주지 못했던 걸까.’

가족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히나를 알면서 계속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도 그의 속뜻을 알아주고는 있었지만, 직접 듣는 건 아마 다르리라.

이제 와 히나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것도, 지금에서야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이기심으로 그녀가 마지막 순간,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충분했다.

“오라비가 되어……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히나에게 쏟아지는 불덩이를 막는다고 해도, 그녀가 죽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못난 오라비가 되어 동생을 조금이라도 지키지 않고 죽을 순 없었다.

“오라버니…….”

뜨거운 용암 덩어리들이 루터의 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히나는 다급히 루터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힘인지, 루터는 그녀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두가 붉은 어둠에 침식된다. 풀도, 나무도, 숲도, 동물도, 모두.

그녀를 꼭 안고 있던 루터의 몸에서 힘이 탁, 하고 풀렸다. 그 순간, 그녀에게 세상이 모두 사라진다는 끝없는 공포가 휘몰아쳤다.

“아아…… 안 돼!”

히나의 몸에서 엄청난 힘이 폭발했다. 찬란한 빛이 그녀의 주변 일대를 모두를 뒤덮었다. 세상을 모두 비추기라도 할 만큼 슬프고 가여운, 그래서 더 아름다운 빛이었다.

“히, 히나…….”

죽어가던 루터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숨이 막히던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히나가 이상해.’

평소 히나의 성력과는 달랐다. 따뜻하고 편안하지만, 무척 슬펐다. 너무 슬퍼서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다. 지금의 위급 상황 모두를 잊을 만큼 가슴 아픈 힘이었다.

힘겹게 눈을 뜬 루터가 겨우 고개를 들어 히나를 보았다. 그리고 히나의 온몸에서 성스러운 빛이 나는 걸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신 교수님을 불러야 하는데…….’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히나가 폭주했을 때도 그녀의 온몸에서 빛이 났다.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빛이 말이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루터는 카신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 나 죽고 있었지.’

지금 죽어가던 와중이란 걸 깨닫자 루터는 허탈해서 픽 웃었다. 히나를 계속 지켜보고 싶었지만, 한계에 다다른 그는 이내 고개를 툭 떨구며 눈을 감았다.

* * *

“히나!”

공간이동으로 순식간에 화산구 근처에 오자마자 히나의 힘이 폭주했다. 성력을 지녔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쏟아냈던 힘처럼 참으로 가슴 아픈 성력의 힘이었다.

칼피온은 다급히 폭주한 힘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산을 헤집으며 성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빠른 속도로 향했다. 그는 몸을 원래 본체로 되돌렸다.

머리부터 발톱 끝까지 시커먼 블랙 드래곤이 커다란 날개를 파닥였다. 쏟아지는 화산재와 화염이 그의 날갯짓으로 반대편에 날아갔다. 강한 빛이 나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하강하며 그가 강력한 보호 마법을 펼쳤다. 칼피온은 다시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히나! 히나, 정신 차려!”

히나의 얼굴이, 몸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녀는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폭주하다간 온몸이 말라비틀어지며 끝내는 죽어버린다.

제아무리 카신의 심장이라곤 하나 세계를 멸망시킬 강한 힘을 끌어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이 세상을 잡아먹는 속도가 더뎠지만, 그 힘은 금세 빨라질 것이다.

‘그 전에 카신에게 히나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면 돼!’

하지만 여기서 히나가 폭주해 버린 걸 막지 못한다면?

폭주 중인 히나를 공간이동 마법으로 데리고 갈 순 없었다. 그러면 두 개의 힘이 충돌하여 이상한 세계로 빠져 버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데리고 간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카신의 앞에 도착하는 순간 힘이 빠진 히나가 죽는 걸 보여주게 된다. 그러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

“히나!”

아쉽게도 칼피온에겐 히나의 성력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그는 아까 보았던 대신녀 세이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과거에 세이나가 히나의 폭주를 막은 것도, 그녀가 히나의 모친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칼피온은 바로 포기했다. 정신을 놓아버린 세이나를 데려온다고 해도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아, 오…….”

이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칼피온은 히나의 가녀린 음성을 들었다. 잘못 들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분명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빛나는 몸에서 작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히나?”

“오라…… 오라버니를…….”

“뭐?”

히나는 입술을 벌려 어떻게든 소리를 내려 집중했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녀는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도 들었던 칼피온의 선명한 목소리를 놓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

생각 자체를 하기가 힘들었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히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환한 빛으로 가득한 곳에서 세상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오라버니를…… 살려줘요.”

눈을 뜨기도 힘들 만큼 강한 빛 사이로 칼피온의 윤곽이 보였다. 히나는 몇 번이고 더 눈을 깜빡이며 앞을 보려 애썼다.

“여길…… 제발 어떻게 해줘요.”

루터가 죽는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눈을 찌르는 빛이 사라져 갔다. 두 눈에 칼피온이 들어왔다. 손 하나 까딱이기 힘들었던 몸이 점점 뜻대로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그렇다고 칼피온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히나는 눈앞에 있는 칼피온을 붙잡고 사정했다.

“제발요, 칼피온.”

“아…… 응.”

칼피온은 폭주를 스스로 제어한 히나를 멍하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라고 여겼는데, 히나가 극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폭주를 스스로 제어하다니, 말이 안 되지.’

그 어디에서도 폭주를 제어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보다도 세상을 밝힐 만큼 이렇게 강한 힘을 뿜어내고도 멀쩡하게 말을 하는 히나가 더 믿어지지 않았다.

“칼피온!”

히나가 소리를 질러 그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칼피온은 모든 것을 꿈이라 여겼을 것이다.

“오라버니가……!”

칼피온은 그제야 히나의 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간 히나의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루터가 그녀의 품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다급히 루터의 목에 있는 맥을 짚었다.

‘살아 있어.’

희미하지만, 살아 있다.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을 뿐, 상태가 심각했다. 지금의 루터는 희대의 명의나 신녀를 만나더라도, 절대 살지 못하리라.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히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루터의 등은 처참했다. 뜨거운 용암에 살점이 다 녹아내렸다. 용암의 열기에 안의 장기도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 여태 무한한 힘을 보였던 카신도 루터를 살릴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카신이 멀쩡해진다면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는 어떻게 하지 못하니, 그나마 살릴 수 있을 법한 카신에게 보내어 손을 써봐야 했다.

“다, 전부 다 죽어가고 있어요. 제발 살려줘요, 칼피온.”

히나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애원했다. 사고가 돌아온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히나를 포함하여 둘밖에 보지 못했지만, 성력을 가진 아이는 대체로 맑고 고운 성품을 가졌다. 남을 잘 믿으며 고통에 찬 모습을 쉽게 보지 못했고, 마음도 무척 여렸다.

진짜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히나는 고작 눈앞의 숲이 죽어가는 것에 폭주한 거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우습기도 하면서 고마웠다.

“내가 다 해줄게.”

멀리서도 카신의 검은 어둠이 빠르게 넓어지는 게 보였다.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어둠에 비하면 이깟 용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 내게 맡겨.”

화산 폭발을 몇 번이고 막아줄 수 있다. 이미 떠나 버린 생명은 어떻게 할 순 없었지만,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것 정도는 그의 힘으로 충분히 억제가 가능했다.

“대신 너도 카신을 막아줘.”

더 이상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어둠이 더 퍼지기 전에 그녀를 카신의 품에 되돌려 놔야 했다.

‘되돌려 놓기만 하면, 어떻게든 힘을 멈추겠지.’

칼피온은 눈을 깜빡이는 히나에게 루터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카신의 바로 앞으로 공간이동 마법을 걸었다.

카신이 세상을 삼키는 어둠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앞으로 공간이동이 된 히나는 순식간에 먹힌다. 하지만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칼피온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세상의 전부를 돌려줄게, 로티우스.’

남과는 절대 교류하지 않는 카신에게 있어, 자신이 유일한 친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약속도 깨버리고, 미안한 짓도 서슴지 않고 해버린 카신에게 조금은 서운하긴 했다.

하지만 카신이 히나가 세상의 전부라고 했다. 카신의 오랜 친구이자 아들 같은 존재인 칼피온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껍데기로 살아왔던 카신이 그만 행복했으면 했다.

‘오늘 서운했던 건 나중에 모두 갚아주마.’

행복은 행복이고,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이 모든 사태가 진정되면 히나를 통해 모두 갚아줄 걸 상상하며, 칼피온은 산을 뒤덮는 화염으로 몸을 틀었다. 꽤 거친 방법밖에 모르지만, 화산 폭발을 못 막을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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