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세상에 신기한 일은 아주 많다. 히나는 누가 볼까 초조하면서도 가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히나, 물을 길어 왔어.”
밖에서 들려오는 루터의 목소리에 히나는 벌떡 일어났다. 막사를 열어주자 루터가 들어왔다.
카신과 히나만이 묵는 막사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아델리아가 그렇게 배려해 주었다. 그나마 이곳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루터뿐이었다.
“교수님은?”
히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그보다 오라버니는 이렇게 움직여도 돼요?”
“응, 난 괜찮아.”
루터가 건강한 걸 보여주듯 이리저리 몸을 보여주다 아,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루터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직 조금 아프네. 그래도 괜찮아.”
“많이 나아서 다행이에요. 전 정말 다 죽는 줄 알았어요.”
화산 폭발이 일어났던 산에서 루터는 죽어갔고, 그때 칼피온을 만났다. 칼피온의 마법으로 어딘가로 이동이 됐고, 그리고 그녀는 카신을 만났다.
너무 무서웠고, 또 안심이 돼서 카신이 무리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 자리에서 기절한 히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하루를 잤는지, 이틀을 잤는지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어디선가 신성한 빛이 느껴졌고, 깨어나니 세이나가 눈앞에 있었다.
“히나, 깨어났나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이나는 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카신에게 신성한 빛을 주입한 듯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그 강하고 아름다운 빛을 멈추지 않고 뿜어냈다.
“그럼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요.”
세이나는 카신을 치료하고 있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았을 텐데도, 카신은 엉망이었다.
얼마나 피를 토한 것인지, 입가에서부터 카신이 입고 있는 옷까지 모두 피범벅이었다. 그의 옷은 피가 말라 검게 변해서 제 색을 잃은 지 오래였고, 가슴에는 아주 긴 상처도 깊이 있었다.
세이나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히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 주변엔 아무도 오지 못해요.”
세이나도, 루터도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히나의 시선은 오로지 카신에게로만 향했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당장 죽을 것 같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심장에서 나온 어둠의 독기가 주변을 계속 더럽히고 있어요.”
“심장……?”
“나는 이제 힘이 없어 정화할 수 없답니다.”
히나의 물음에도 세이나는 제 할 말만 했다. 그녀는 무척 힘겨운 얼굴이었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힘이 없다고 하기엔 세이나에게서 나오는 빛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더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 이게 현실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히나가 정화를 해야 해요. 그래야 대마법사를 살릴 수 있어요.”
“카신 님은…….”
카신을 살린다니? 그럼 죽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카신이 죽는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이건 꿈이다. 꿈이 아니고서는 카신이 피를 흘리며 죽을 수는 없는 거다.
“히나! 이건 꿈이 아니에요.”
세이나가 히나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다소 날카롭게 외쳤다.
“어떻게든 정화해야 해요. 그래야 대마법사가 데려왔던 드래곤이 히나를, 대마법사를 구하러 와줄 거예요. 그러니 어서…….”
그 말을 끝으로 세이나가 풀썩 쓰러졌다. 히나는 제 앞에 쓰러진 세이나를 잠시간 보고 난 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 공기가 점점 탁해지고 있었다. 카신에게 쏟아붓던 신력에 의해 그나마 정화되었던 어둠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다. 모두 진짜다.
히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력하고 치명적인 독기가 주변을 안개처럼 두르고 있었다.
‘내가 해야 돼.’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성력 폭주에 대한 후유증도 그리 크지 않았다. 히나는 주변의 어둠이 옅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성력을 내뿜었고, 그리고 곧 그 틈으로 칼피온이 그들을 구하러 왔다.
“야! 내가 그 말은 하지 말라고 했지?”
그때를 회상하던 그녀에게 루터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죽는 줄 알고 마지막에 했던 말이 그리도 부끄러운지, 루터는 몇 번이고 그 일을 묻자고 말했다.
“전 별말 안 했는데.”
하도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해서 굳이 떠올리지 않고 있었는데, 루터가 말하니 또다시 기억났다.
히나는 루터가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동생이라고 했던 말이나,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그런 부끄럽고 낯간지러운 말들 말이다.
히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루터를 보며 입술이 파르르 떨릴 만큼 힘을 주고 웃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티가 난 것인지 그녀를 본 루터의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그보다! 신녀님이 깨어나셨대.”
“정말요?”
루터가 길러 온 물에 수건을 적시던 히나는 당장에 세이나에게 가려 했다. 하지만 루터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우리는 못 가. 신녀님은 지금 다른 신녀님들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거 알잖아.”
세이나는 제국 소속이 아닌 대신전의 소속이었다. 그들은 제국군과는 별개로 지어진 막사에 있었다.
대신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세이나는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전력이자 보배였다. 하지만 그런 세이나가 폭주 후의 증상처럼 탈진한 채로 발견되었다.
당연히 세이나가 있는 막사에는 제국군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신녀들 사이에서도 엄별한 사람만이 들어가 그녀를 보호하고 치료하고 있었다.
“괜찮으신 거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깨어났다고 하니 괜찮지 않을까?”
히나의 얼굴이 자못 어두워졌다. 세이나가 걱정됐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얼굴을 보러 가는 것도 어려웠다.
히나가 성력을 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온 칼피온은 그들 모두를 공간이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카신의 상대를 자세히 살피더니 세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틀이 지났어. 아마 이틀 동안 이 신녀는 카신을 살리려 신력을 치유의 힘으로 쓴 것 같군.”
칼피온의 말에 따르면 그가 그들에게 가려는 순간, 엄청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했다. 블랙 드래곤인 그조차도 견디지 못할 만큼 너무 강해서 도저히 가까이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위치라도 알면 이동이라도 할 텐데, 검은 안개가 그조차도 방해했다. 애가 탄 칼피온은 계속 주변을 서성이며 기회를 엿보다가 성력으로 공기가 조금 정화되자 목숨을 걸고 독기를 뚫으며 날아온 것이었다.
“나중에 신녀가 깨어나면 고맙다고 해. 깨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칼피온의 말처럼 세이나는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세이나뿐만 아니었다. 처음엔 히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깨어나지 못했다. 히나도 당장에 쓰러질 것처럼 몸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겨우 정신력으로 버텼다.
루터의 몸에 난 상처는 응급 처치로 칼피온이 어느 정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군대의 의사에게 맡기자, 금방 회복이 되어 깨어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카신 님만 남았어.’
세이나도 깨어났으니, 정말 카신만 남았다. 히나는 고개를 돌려 카신을 보았다.
“신녀가 넣은 건가? 심장이 안에서 제대로 뛰고 있어. 몸이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잘 이해되지 않을 말만 혼자 중얼거리고 칼피온은 바로 사라졌다. 아직 거둬지지 않는 검은 안개 속에 꼭 찾아야 할 게 있다며 말이다.
“신녀님은 걱정하지 마. 굳이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세이나 신녀님이라면 신전에서 엄청 심혈을 기울여 치료하고 있을걸?”
“역시 그러겠죠? 신녀님은 신전의 보배이시니까요.”
“그보다 히나, 넌 괜찮아? 이제 조금 쉬어. 너 계속 쉬지도 못했잖아.”
루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고.”
“전 정말 괜찮아요.”
“안색이 이리도 좋지 않는데, 괜찮을 리가.”
히나는 대답 대신 살며시 웃었다.
루터의 말대로 괜찮지 않았다. 한계를 넘어 성력을 부리기도 했고, 짧지만 폭주를 했다. 거기다 깨어나자마자 또 성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카신 님이 깨어났을 때, 제가 없으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그러니 이대로 옆에 있고 싶어요.”
카신이 곧 깨어날 것 같았다. 히나는 카신이 깨어나 처음 보는 세상 속에 자신이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아마 오랫동안 잠을 잔 적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오래 자는 게 아닐까요?”
히나는 물에 적신 수건을 꽉 짜서 카신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젖은 수건으로 카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씻지 않아도 항상 말끔했던 것과 달리, 지금 카신의 몸은 계속 닦아주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처럼 더러워지거나 살이 짓무르기도 했다. 몸에 걸어둔 어떤 마법이 풀린 듯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히나는 매번 물을 길어 와 하루에도 여러 번 카신의 몸을 닦아주었다. 매일 상쾌하고 깨끗한 모습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카신의 피부는 의외로 무척 연약해서 자주 닦아주지 않으면 쉽게 짓물렀다.
“이렇게 마음 편히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일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도 돼요.”
아직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 많이는 힘들겠지만, 지금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전 계속 기다릴 수 있어요.”
올 때마다 몇 번이고 히나에게 쉬라며 설득하고 있지만, 루터는 이번에도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완강하게 카신의 곁을 고집하는 히나를 억지로 떼어놓는다면 더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럼 히나, 필요한 거 있으면 꼭 사람 불러. 알겠지?”
“고마워요, 오라버니.”
배시시 웃는 히나를 보며 결국 루터는 막사를 나왔다. 카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은 되었지만, 밝은 히나를 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 * *
“으읏…….”
카신이 누워 있는 침상 옆에서 졸고 있던 히나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나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악몽을 꾸는지 카신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신 님, 괜찮아요.”
히나는 한 손으로 카신의 손을 꼭 잡아주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진정이 된 건지 카신의 얼굴이 한층 편안해졌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엔 놀랐지만, 며칠 사이에 익숙해져 버렸다. 카신이 잠결에 눈물을 흘리는 것도, 괴로운 목소리를 흘리는 것도. 히나는 카신이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을 모두 지켜보며 말했다.
“제가 옆에 있으니, 괴로워하지 마세요.”
히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몇 번이고 물을 적셔주어도 말라 버리는 카신의 입술에 제 입을 살포시 포갰다.
카신의 거친 입술이 이제는 익숙했다. 오히려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 그녀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여 그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해지기도 했다.
남의 손이 전혀 필요 없던 카신을 도울 수 있어 기쁘기도 하고, 너무나도 완벽한 카신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 슬프기도 했다.
‘카신 님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다니.’
이 상황에서 조금 우습지만, 히나는 카신의 이런 면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맞닿았던 입술을 떼려고 했던 히나는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 카신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는 감촉이 생생히 났다.
“히나……?”
아주 거칠고 탁한 목소리였다. 아주 작지만, 분명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히나는 꼭 감겨 있는 카신의 눈을 멍하니 보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이 올라가며 샛노란 눈동자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카신 님.”
흐릿한 초점이 조금씩 맞춰지고, 그 신비로운 눈동자에 그녀가 뚜렷하게 들어섰다. 잠시 숨을 죽이고 그 미묘한 변화를 지켜보던 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잤어요?”
카신은 눈이 부시도록 예쁘게 웃는 히나를 보며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꿈은 길고 지겨웠던 과거일 뿐이다.
‘어쩌면 신은 존재할지도…….’
다시 한번 입을 맞춰오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이 꼭 가엽고 불쌍하지만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