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내가…… 먹을 수 있단다.”
“하지만 아직 몸이 불편하시잖아요?”
히나는 수프를 먹기 좋게 떠서 호호 불어 식힌 다음 그에게 내밀었다. 잠시 오묘한 표정을 짓던 카신이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어서 나으려면 많이 드셔야 해요.”
평소엔 차를 제외하고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도 멀쩡했던 카신이 지금은 삐쩍 말라 있었다. 며칠 잠들어 있는 동안 하루하루 말라간 탓이었다.
‘아마 그에 대한 마법이 풀린 것이겠지.’
사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부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아사해서 죽을 거라는 불안에 초조하던 차였다. 그렇지 않아도 다친 몸이 회복하느라 영양분이 필요할 텐데 말이다.
“속이 괜찮으면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라 할까요?”
먹는 것이 어색한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 카신밖에 없으리라.
히나는 어색하게 수프를 받아먹는 카신을 보며 겨우 웃음을 참고 말했다. 그녀가 내미는 수프를 아이처럼 넙죽넙죽 받아먹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모습인 걸 즐기고 있군.”
카신의 얼굴이 살짝 뚱해졌다. 결국 히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카신이 다소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전 엄청 즐거운걸요? 이렇게 제 손으로 카신 님을 돌보는 일도 있고 말이에요.”
“즐거워?”
“그럼요. 거기다…….”
키득거리던 히나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카신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법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신 님의 이런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한쪽 눈썹을 찡그리던 카신은 입 앞에 내밀어진 수프를 또 넙죽 받아먹었다. 확실히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상황이 좋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잔뜩 헝클어진 것도 모자라 무척이나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모습을 말끔하게 바꾸고 싶었다.
“지금을 실컷 즐기거라. 내일부터는 나의 이런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도 제가 돌봐 드릴 거예요.”
“그게 아니다. 내일이면…….”
카신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일이면 더 괜찮아질 게다.”
주인을 다시 찾은 심장은 그의 몸에 걸려 있는 모든 마법을 멈추고, 생명에 위협이 되는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는 데 온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오로지 살고자 하는 본능에 의해서.
하지만 오늘로서 하루만 더 지나면 심장 주변에 있는 상처부터 모든 것이 낫는다. 그러면 그의 몸은 알아서 먹지 않아도, 씻지 않아도 변함없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는 있다. 이제는 상처가 그리 깊지 않으니, 굳이 상처를 회복하는 데 모든 초점을 두지 않아도 된다. 아니, 위험하다고 해도 이제 그의 의지가 깨어났으니 원하는 대로 힘을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히나가 이렇게 보살피는 것을 좋아하니, 하루쯤은 그냥 놔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부끄러웠지만, 히나는 이미 그를 며칠 동안 보살폈다. 흐트러진 모습을 모두 보았을 히나에게 하루 더 보여준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오래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벌써요?”
“아쉬운 게니?”
히나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완연했다.
“조금……. 하지만 카신 님이 빨리 회복하는 게 더 좋아요. 이런 건 카신 님이 다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말갛게 웃는 히나를 보며 카신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대신 오늘은 제가 시키는 대로 하셔야 해요.”
“시키는 대로?”
때마침 누군가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들어오는 병사들에 카신의 눈이 꽤 날카로워졌다.
“여기다가 준비해 주시면 돼요.”
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비어 있는 바닥을 가리켰다. 두 병사가 히나가 가리키는 곳에 커다란 나무 욕조를 조심히 두었다.
잠시 뒤, 욕조 안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물이 가득 받아졌다. 히나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카신을 돌아보았다.
“매일 닦아드렸는데, 그래도 찝찝하실 것 같아서요. 목욕 시중을 해드릴게요.”
“히나, 목욕 시중이라면…….”
“걱정 마세요! 카신 님을 돌보는 일이라면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두 팔을 걷어붙인 히나는 카신이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카신의 겉옷을 앞섶만 풀어 몸을 닦아주었지만, 그때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카신이 보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던 그는 곧 픽 웃으며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매일 하면서 괜찮아졌었다. 아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카신의 옷을 벗기던 손이 잠시 멈췄다. 조금, 어쩌면 그보다 더 부끄러웠다. 지금 잡고 있는 옷을 벗기면 그의 맨몸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직접 벗겨주는 것이 아니었나? 내가 벗어도 좋다만.”
“아, 아니에요! 제가…… 벗겨 드릴게요.”
방금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조용한 공기 속에서 옷이 스윽, 벗겨지는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 그래서 더 얼굴이 뜨거워졌다.
매일 별궁에 있거나 연구실에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주 좋은 몸이었다. 남자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처음 카신의 몸을 닦아줄 때 옷을 벗기고 많이 놀랐었다.
이제는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히나는 도저히 눈을 똑바로 뜨고 카신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목소리 끝이 떨려왔다. 카신이 일어나 나무 욕조 안에 들어갔다. 물이 살짝 넘치며 출렁거리는 걸 보고 히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는 것마저 야하게 느껴졌다.
“이러면 된 것이냐?”
“네? 아, 네!”
카신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히나는 마른 수건을 들고 서둘러 다가갔다. 시야에 옅은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꽤 널찍하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선이 들어왔다.
히나는 수건을 꽉 잡은 채 카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수건을 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내 몸을 매일 닦아줬을 텐데, 그리도 부끄러운 게냐.”
“부, 부끄럽다기보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히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한번 쓸었다.
“조금 떨려요.”
카신은 가끔 히나에게 목욕 시중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녀의 목욕 시중을 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가 물속에 잠겨있던 한 손을 들어 같은 부위만 연신 닦아대던 히나의 손목을 탁 하고 잡았다. 히나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지려 했다. 카신은 떨어지려는 가는 손목을 꽉 잡으며 그녀가 도망가는 걸 막았다.
“같이할까?”
“어떻게 같이…….”
히나가 채 묻기도 전에 카신은 그녀의 손목을 당겼다. 히나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나무 욕조 안으로 풍덩 하고 빠졌다.
어디 부딪혀 다치지 않도록 그녀를 잡으며 카신은 금세 젖어버린 히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너무…….”
히나는 말을 하다 말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눈앞에 있는 카신의 나신에 눈 돌릴 곳을 찾기 힘들었다. 차마 그 단단하고 너른 가슴을 계속 보지 못한 그녀는 시선을 올려 그와 마주 보았다.
“짓궂으세요.”
카신이 작게 웃자 맞닿아 있는 그의 가슴도 살며시 떨렸다.
눈을 계속 마주치는 것이 부끄러웠다. 히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도로 눈을 마주치게 했다.
“그래서 싫으니?”
어떻게 싫을 리가.
히나는 대답 대신 상체를 살짝 올려 카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카신이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그녀의 허리를 잡고 조금 더 깊게 키스했다.
뜨거운 물에서 올라오는 수증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카신의 키스가 너무 달콤해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금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했다.
“으응…….”
잇새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히나는 그 신음이 제 입에서 흘러나온 것을 뒤늦게 깨닫고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러자 맞대고 있는 그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가고, 몸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뜨자 그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리에 둘러진 그의 단단한 팔이 점차 올라왔다. 히나는 그의 손이 가슴에 닿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의 반응을 모두 훤히 꿰고 있던 카신이 한숨과도 같은 아쉬운 탄성을 내뱉으며 입술을 뗐다. 그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히나, 돌아가면 바로 결혼을 하자꾸나.”
“결혼…….”
히나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결혼하면…….”
사실 전쟁이 끝나면 카신에게 결혼을 해달라 했지만, 크게 와 닿진 않았다. 결혼 상대로 카신 외에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카신과의 결혼 생활을 상상하는 것도 조금 어려웠다.
“카신 님은 제 것이 되는 거죠?”
감히 넘볼 수 없는 남자라 생각했다. 연인이 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는 것부터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 질문을 하는 것도 조금 무서웠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가질 자격이 있냐고 물을까 봐.
“그래, 네 것이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하렴.”
카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불안을 한순간에 없애주었다. 히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쿵쿵, 하고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히나는 그가 살아 있다는, 깨어났다는 안도에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여태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뭐든 마법으로 해결하시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함께 씻지 않겠어요?”
“그거 좋구나. 너와 함께 씻는다면 매일 같이 씻어도 좋단다.”
“함께 산책도 자주 할래요. 오전에 차를 마시고, 또 식후에도, 그리고 캄캄한 밤에 별을 보며 걸어도 볼래요. 매번 같은 곳도 좋지만, 가끔은 카신 님의 마법으로 아무도 가지 못하는 색다른 곳도 가고 싶어요. 카신 님의 이동 마법은 아주 먼 곳까지 단번에 갈 수 있으니까요.”
감히 카신에게 마법을 쓰라고 하다니, 이전의 그녀였다면 절대 하지 못할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그녀의 것이 되는 남자다. 남편에게 이 정도 부탁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싶었다.
“돌아가면 좋은 산책길을 찾아봐야겠구나.”
“같이…… 식사도 자주 했으면 좋겠어요. 굳이 드시지 않아도 가끔은 마주 보고라도 앉아주세요.”
“그것도 좋다.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런 건 얼마든지 하고 싶구나.”
히나는 조금 더 편한 자세로 카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카신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대신 한 가지만 알아두렴.”
어느새 그의 품에 거의 잠이 들 것처럼 편히 기대고 있던 히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샛노란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 위험하게도 보였다.
“평소에는 네 말을 전부 들어주겠지만.”
붉은빛이 감도는 머릿결을 따라 아래로 내려온 손이 뜨거운 물 속에서 발그레해진 뺨을 타고 내려와 턱을 짚었다.
“밤에는 내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카신의 입술이 다가왔다. 히나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입술에 닿는 그를 받아들였다.
마음이 놓인다. 불안했던 순간들이 전부 아무렇지 않아질 만큼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