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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108화 (108/128)

108.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서로를 알 수 있어 기쁘기도 했던 목욕을 마치고 둘은 함께 침상에 누웠다.

히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조금 민망해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눈을 마주치라면 할 수 있겠지만, 조금 야릇한 기분에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카신의 목소리가 꽤 진지했다. 히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날 살린 대신녀는 어떻게 됐지?”

어떻게 알았냐는 듯, 히나가 눈을 크게 떴다. 카신은 제 심장이 뛰고 있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편안하게 뛰어대는 심장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목욕을 할 때도 보았지만, 오랜 상처라도 되는 듯이 붉은 선처럼 옅은 상흔만 남아 있었다. 아마 며칠 후면 그 상처도 완전히 사라지리라.

‘누군가가 내 심장을 집어넣고 폭주를 막았어.’

신력을 제외한 모든 속성의 힘을 통달했을 때, 어둠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의지가 있는 그의 힘은 꽤나 광폭하여 다루기 험하였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그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물론 쉽게 반항할 기회를 줄 만큼 그는 무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결코 없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디선가 피어난 빛이 광포한 어둠을 억눌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하고 가벼웠다.

“알고 계셨어요?”

“짐작만 했을 뿐이다.”

살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심장도 주인이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폭주를 시작했고, 심장의 폭주로 주변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도와줄 수 있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아니, 그 누군가가 들어온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내 몸에 다른 힘이 들어왔으니까.”

어둠을 완벽하게 정화하는 광대한 신력을 가진 세이나라면 이제 막 오염되기 시작한 곳을 뚫고 들어올 수 있다. 거기다 그녀의 신력을 모두 쏟아붓는다면 죽어가는 한 사람쯤은 살릴 수도 있으리라. 과거의 갓난아이였던 히나가 폭우 속에서도 살았듯이.

“신녀는 어디에 있지?”

하지만 카신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는 어둠 그 자체라고 불려도 무방했다. 폭주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죽어가는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쉽지 않았으리라.

“혹시…….”

카신은 차마 끝까지 질문할 수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죽음의 늪에서 끌어 올릴 정도의 힘을 썼다면,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히나의 어머니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몇 번이고 죽이려고도 했다.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세이나에게 도움을 받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몸 안에 감도는 새로운 힘이나 당시의 상황을 따지면 세이나밖에 없다.

“세이나 신녀님은 카신 님이 깨어나기 전날에 정신을 차리셨다고 들었어요.”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카신은 혹시나 세이나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었다. 이 모든 상황을 세이나가 정리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묻지 않았던 건 어쩌면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상태는……?”

살았다고 한들 멀쩡할 리가 없다. 그를 살리기 위해 폭주를 한 것과 다름없는 광대한 신력을 썼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묻자, 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저도 몰라요. 신녀님은 신전 쪽에서 데려가서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고 있어요. 이것도 걱정하는 절 위해 레베스톤 공작 각하께서 루터 오라버니를 통해 말해주신 거예요.”

카신은 꽤 지쳐 보이는 히나를 끌어안았다.

“네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히나.”

모든 건 그가 직접 마무리 지으리라.

내일이면 마법을 쓰는 데 큰 지장이 없어진다. 물론 광대한 마력을 쓰는 건 무리겠지만, 지금 일을 처리하는 데 많은 힘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오늘은 나와 푹 쉬자꾸나. 내일이면 이 모든 악몽이 끝날 게야.”

이제 막 시작한 전쟁이었지만, 그가 겪은 그 어느 전쟁보다도 길었다. 아주 질리도록.

히나가 가만히 안겨왔다. 정말 지친 건지, 쉬자는 말에 그녀가 그의 품에서 눈을 꼭 감았다.

“카신 님이 돌아와서 너무 기뻐요.”

히나는 그렇게 편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모든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니면 카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편히 잠이 든 건지 그녀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 * *

잠든 히나의 옆에서 하룻밤을 꼬박 잠들다 깨어난 카신의 몸은 원상태로 거의 돌아와 있었다. 그는 아침에 막사에 들어와 깜짝 놀라는 루터에게 히나를 맡긴 다음, 가장 먼저 아델리아를 만났다.

“전쟁은 제가 끝내도록 하지요.”

“대마법사님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아델리아의 심기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아들인 라우너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부상을 당했고, 대부분의 기사들도 중상을 입었다. 그나마도 히나의 성력으로 마법사들이 큰 타격을 입어서 덜 다친 거였다.

적의 마법사 부대가 전부 이상한 빛을 내며 사라지자, 제이드는 일반 병사들과 함께 도망갔다. 하지만 피해가 컸던 아델리아는 그들을 쫓는 걸 포기하고 며칠째 이곳에서 병사들을 추스르고 있었다.

“‘인간의 전쟁’엔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전쟁엔 드래곤이 개입해 있습니다. 병사들을 추스르면 돌아가시지요.”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거기다 패잔병이 도망가는 걸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싸우던 마법사들이 사라졌으니 제대로 된 승리를 이룬 것도 아니었다. 찝찝해도 이렇게 찝찝할 수가 없다.

아델리아의 마음을 간파한 카신이 바로 말을 바꾸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적의 이상한 마법사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머지는 공작께서 처리하십시오. 하지만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병사들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적의 마법사는 대체 정체가 뭐지요?”

아델리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실 아델리아는 카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드래곤이 유희를 나왔다가 눌러앉은 거라든가, 아니면 다른 신비로운 존재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카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무심한 카신의 성격을 익히 들어 알뿐더러, 도와달라 청한다고 들어주지 않을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께서 평소 말을 많이 아끼는 걸 압니다. 하지만 드래곤까지 개입한 전쟁이고, 도와주기로 마음먹으셨다면 물어도 되는 질문이라 여기고 여쭙는 겁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적군에 있었던 붉은 드래곤은 카신을 잘 알고 있었다. 원한 관계에 있는 듯했다.

“절대 이번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드래곤의 개입과 그 기이한 적군 마법사에 관한 건 대마법사께서도 책임을 지고 협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카신은 한쪽 눈썹을 스윽 올리며 아델리아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여자임에도 위풍당당한 기세를 보니 역시 히나가 반할 만했다. 너무 반해서 문제지만.

그는 지나가며 봤던 적군의 마법사를 상기했다.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니요?”

“유전자를 조작하여 인간의 한계를 극한까지 올린 것 같지만, 확실히는 저도 잘은 모릅니다. 이제부터 조사할 테니, 알게 되면 알려 드리지요.”

옛날에 그런 비슷한 연구를 했던 것도 같다. 얼핏 본 것만으로는 잘 기억나진 않았지만, 어떤 원리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아는 척 말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보는 것들인데, 아무리 저라도 바로 알 수는 없습니다.”

코반드가 만든 마법사는 분명 자신이 과거에 연구하고 미처 폐기하지 못했던 자료로 만들어진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코반드가 이번 일을 저지르는 데, 그가 일조를 한 것이었다.

카신은 히나와 제국에서 오랫동안 편안하게 함께 살 생각이었다. 그러니 나중에 불리할 만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된다. 앞에 있는 레베스톤 공작은 꽤나 엄격하고 빈틈이 없으니, 시치미를 떼려면 완벽하게 떼야 했다.

“저도 처리할 것이 많으니, 그만 일어나지요.”

아델리아는 감이 너무 좋았다. 그러니 그녀와 더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제 이 사건의 원흉을 찾으러 가야겠지.”

바로 그 자리를 나오자마자 카신은 자신이 죽음을 예견했었던 장소로 이동했다. 많이 옅어졌지만, 그곳은 여전히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심장의 폭주가 꽤 심했던 모양이야.”

이 정도의 독성이라면 칼피온도 제대로 탐색하기 힘들다. 히나의 성력으로 만들어진 작은 틈으로 들어가 바로 이동을 하는 것이 다였으리라.

카신은 검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자 넓게 퍼진 검은 연기가 그의 입으로 그 짧은 순간 동안 모두 빨려 들어갔다.

“여긴 당분간 못 쓰겠어.”

연기가 사라진 곳에는 풀 한 포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의 땅이었다. 오염된 땅이 다시 숨을 쉬고 생명이 깨어나려면 아마 시간이 꽤 오래 지나야 할 것이다.

카신은 황폐한 지면을 천천히 훑으며 쓰게 웃었다. 히나를 잃자마자 망설임 없이 세상을 파괴했다.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약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카신은 조소를 흘렸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또 이 끔찍한 일이 반복되리라.

“다시는, 히나를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겠지만.”

어느 한 곳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카신은 공간이동 마법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그가 움직인 곳은 드래곤 장로들이 모인 회의실이었다. 로드인 칼피온과 열댓 명의 장로들은 전 장로였던 코반드의 이탈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로티우스!”

칼피온이 카신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다른 장로들이 카신을 보며 수군거렸다. 몇몇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보기도 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안 거야? 아니, 그것보다 언제 깨어난 거지?”

드래곤 로드와 장로들만이 아는 회의실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모르겠으나, 몇 겹의 보호 마법을 꿰뚫고 단번에 공간이동을 한 카신이 놀랍기만 했다. 위치 탐지를 막는 보호 마법이 있음에도 말이다.

“코랄드는?”

카신은 대답 대신 코반드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칼피온이 침묵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방금 전의 죽은 땅을 보고 코반드가 도망갔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멀쩡한 몸은 아니었겠지만.

“잠깐, 로티우스. 일단 나와 대화를…….”

카신은 몸을 돌려 열댓 명의 장로를 둘러보았다. 그를 보자마자 장로들이 잔뜩 경계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드래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하고 다니던 인간이었다. 우습게도 카신이라는 단 한 명의 인간이 드래곤을 멸족시키려 들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아마 칼피온이 카신과 어떤 조약을 맺고 그를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정말 멸족되었을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로드를 통해 들었을 테지.”

순간 회의장에 묵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카신이 일전에 칼피온을 통해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거나 자신을 건드린다면 언제든 멸족을 시킬 거라며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카신이 죽을 뻔한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종족 최대의 적인 카신이 죽을 위기였음에도, 칼피온이 로드로서 그냥 둔 것도 모자라 살리려 도움을 준 걸 알면 종족의 배신자가 된다. 그래서 칼피온은 편의상 카신이 코반드로 인해 그저 크게 다쳐 분노했다고만 설명했다.

조금이라도 어디가 불편해 보인다면 전부 힘을 합쳐 어떻게든 물리치려 들겠지만, 크게 다쳤었다고 하기엔 지금 카신의 외관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원래도 괴물 같았으니, 회복도 괴물 같은 속도로 했으리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카신은 겁에 질려 언제든지 공격할 태세로 있는 드래곤 장로들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내 화를 돋운 그놈.”

몇 번을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놈이다. 카신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그놈을 내놓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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