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세이나는 눈을 뜨자마자 제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 처진 몸은 전처럼 가볍지 않았고, 머릿속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탁했다.
“깨어났군.”
낯익은 목소리에 세이나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곧 머리가 띵해서 다시 드러누워야 했다.
바로 옆에 카신이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어두운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아직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카신을 보자마자 히나가 떠올랐다. 카신이 멀쩡하니 히나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여 무슨 일이 있었을까 봐 불안했다.
“히나는…….”
“덕분에. 아주 무사하지.”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이나는 눈을 감으며 히나가 무사하다는 것에 한시름 놓았다.
“당신이 날 살릴 줄은 몰랐군.”
귓가에 들리는 카신의 목소리는 꽤 덤덤했다. 죽음의 문턱을 건넜다 온 사람이라고 믿지 못할 만큼 너무 멀쩡해서 화도 나고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더 놓였다.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이 히나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목숨을 건다.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다른 감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세이나는 이런 남자에게 히나를 맡기는 것이 불안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어차피 그가 히나의 옆에 있는 것을 인정했으니.’
카신의 옆에 있을 때야말로 히나가 가장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히나에게 작은 미소 한 번 피게 해주지 못했던 세이나는 카신을 향한 히나의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히나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요.”
행복하면 된다. 선의 옆에서든, 악의 옆에서든, 히나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
“그보다 난…….”
점점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세이나는 몸의 이상 변화를 조금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카신의 앞에서 절대 울컥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길게 심호흡을 쉬고 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어떻게 된 거죠? 왜 난…….”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세이나는 떨리는 심장박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큰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의, 그리고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카신의 불쾌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정화되어 맑은 머리도 탁하고 어지러웠다. 신력으로 유지되던 건강한 몸도 축 늘어졌다.
“더 이상 신녀로 살 수 없을 거네.”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세이나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눈을 크게 뜨며 카신을 보았다.
“영혼까지 끌어내어 신력을 썼어. 아니, 그 이상을 썼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왜 날…… 살린 건가요?”
신력이 사라진다면 신녀로서의 생명은 끝이나 다름없었다.
“신력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난…….”
보통은 신력이 줄어드는 경우는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선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신전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대로 쫓겨나는 것이다. 어쩌면 신전의 노비로서 매일 건물 바닥을 쓸고 닦으며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본래 신력이 약했던 신녀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세이나는 대신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니, 그 죄는 무척이나 크리라.
신녀로서의 삶이 끝났다. 아무리 히나를 위해 기도하며 살았다지만, 신녀로 발탁된 순간부터 한평생을 대신전에서 살아온 세이나에게, 신녀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은 세상이 끝났다는 것과 같았다.
“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히나를 위해 기도조차 못 한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꿈일 거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운하지 않은 머리나 힘이 쭉 빠져 있는 몸이 말한다. 이제는 신녀가 아니라고.
“살아.”
옆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서 히나가 얼마나 행복한지, 세상을 얼마나 즐기며 사는지 지켜보도록 해.”
히나가 행복한지?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데? 이제는 곁에 남아 있을 명분도 없어지는데?
심장이 조여들었다. 가슴이 탁탁 막혀왔다.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냉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가슴에 또 한 번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원래부터 히나를 위해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히나는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 모두가 행복할 테니, 같은 하늘 아래에서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라.”
그래, 히나를 위해 살았다. 히나가 행복하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다고 여겼다.
카신을 살리며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히나의 행복을 지켜줄 카신을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난…… 쫓겨날 거예요. 대신녀로서 신력을 지키지 못했으니.”
세이나는 신전의 노비로서도 있을 자격이 없었다. 어쩌면 그 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을 맞으며 죽을지도 모른다.
“대신녀도, 뭣도 아니에요. 죄인처럼 평생을 살아야 해요.”
본래 대신전은 명예와 명성에 의해 유지되는 곳이다.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며 비난을 해댈 것이다.
“비참하고 처량한 삶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살라고 한다면 살겠습니다.”
그 모든 비난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 있음에도,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도 히나를 볼 수 없다면, 행복한 것인지 확인도 할 수 없다면 살지 못한다. 그러면 버틸 수가 없었다.
세이나는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켜 카신을 보았다. 단 한 번도 약해지지 않았던, 항상 강인한 대신녀의 껍데기로 무장하고 있던 그녀의 가면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만, 아니 오 년에 한 번이라도……. 그게 안 된다면 십 년에 한 번이라도 히나를 보게 해주십시오.”
그녀에게 히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단 하나의 빛이었다. 그런데 그 빛을 볼 수 없다면, 평생 확인조차 못 한다면 살아갈 수 없다.
세이나는 카신의 옷깃을 잡으며 간곡히 부탁했다.
“멀리서라도 좋으니, 한 번씩 얼굴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히나는 귀족의 영애였다. 거기다 대마법사의 아내가 될 것이다.
평민, 아니 죄인이 되어버린다면 그녀는 결코 히나를 볼 수 없게 되리라. 평생을 멀리서도 볼 수 없는 신세가 된다.
“내가 당신을 살렸으니, 제발 그 정도는 해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카신이 얼마나 냉정하고 단호한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히나를 맡긴 거였다. 그라면 히나에게 다가오는 그 어떤 위험도 다 막아낼 테니까.
그래서 두려웠다. 카신은 은인이고 말고를 떠나 죄인인 그녀가 히나의 곁을 맴돌아 평판이 깎이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못할 남자였다.
카신이 세이나의 손길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뻗어 다급히 그를 붙잡으려 했다.
“히나는…….”
그를 잡으려던 세이나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카신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딸입니다. 그러니 못 볼 이유가 없지요.”
지금껏 카신은 그녀를 히나의 생물학적 어머니 외의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히나를 그녀의 딸이라 칭하고 있었다. 심지어 히나의 어머니로 대우하며 경어를 썼다.
“당신은 히나의 어머니입니다.”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심지어 딸인 히나가 몰라주어도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신이 그녀를 향해 히나의 어머니라 하는 순간 여태 힘들었던 모든 것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히나의 어머니라고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떠나가는 카신을 보며 세이나는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 * *
코반드는 제 몸에 흡수되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실험체를 지나 다음 실험체를 보았다. 그는 제 살에 연결된 기묘한 선을, 채 다 만들어지지 않은 다음 실험체의 육체에 연결했다.
“으으…… 으아악!”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연구실에 울렸다. 살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는 제 몸에 연결된 선을 뽑지 않았다.
“하아, 하아.”
앞에 있는 실험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가죽만 남았다. 코반드는 고통스러운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다음 실험체에 선을 연결했다.
또다시 괴로운 음성이 연구실에 울렸다. 하지만 실험체의 힘을 빨아들이는 그의 입가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 힘이라면…….”
몸에서 힘이 흘러넘쳤다. 너무 넘쳐서 컨트롤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조금만 마력을 흘려도, 주변의 모든 시설이 전부 파괴될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나라 하나도 우습겠군.”
작은 나라쯤은 손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제국까지도 전부 날려 버릴 수 있으리라.
“조금은 로티우스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아.”
이렇게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였겠지. 한때 지상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들을 학살하려 했던 것도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리라. 지금의 그처럼 말이다.
코반드는 제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 본능을 전부 끌어내어 마구 힘을 휘둘러보고, 수많은 생명이 그의 손에서 사라지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 이 정도 힘이라면 죽일 수 있어.”
카신도 큰 타격이 있었을 것이다. 재수가 없게도 지극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심장을 빼내자 피를 뿜어냈다. 격하게 뛰어대는 심장과 달리 몇 번이고 기침을 하며 피를 흘리던 몸은 분명 정상이 아니란 말이었다.
이길 수 있다. 카신이 정상이라도, 지금의 힘이라면 전혀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 힘이라면 얌체같이 카신을 졸졸 쫓아다니며 드래곤들의 크나큰 야망을 짓밟아 버린 칼피온까지 없앨 수 있으리라.
“큭큭큭, 전부 다 죽여 버리겠어.”
코반드는 흉측하게 부풀어 올라 꽉 조여진 안대를 벗었다. 오래전에 죽어 있던 눈알이 살 위로 솟아오르며 번뜩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눈에 초점이 맞춰졌고, 결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눈동자가 움직이며 앞에 있는 것을 비추었다.
완성되지 않은 실험체였지만, 코반드는 연구실에 있는 대부분의 실험체를 자신의 몸에 흡수시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몸에서 힘이 넘쳐 났다. 이미 제 기능을 잃은 눈까지도 살아났다.
“지금 당장…….”
그때였다. 코반드는 살이 울긋불긋 솟아오르자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기분 나쁘도록 볼록볼록 치솟는 몸이 점점 부풀고 있었다. 그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근육이 주체되지 않을 만큼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게 무슨…….”
방울처럼 보글거리며 솟아오른 살이 온몸을 뒤덮었다. 코반드는 제 얼굴을, 팔을, 다리를 뒤덮는 살덩이에 꺽꺽거리며 가는 신음을 흘렸다.
“사, 살려…….”
얼굴이 완전히 뒤덮였다. 시야 속에 보이는 길게 뻗은 손까지 모두 먹히는 게 보였다
부풀어 오른 살덩이에 코반드의 몸이 전부 삼켜졌다. 의지가 없지만, 살덩이는 계속해서 부글부글 끓으며 점점 더 커져 갔다. 누군가의 살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