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길고 긴 모녀 상봉이 끝나고, 카신은 겨우 진정한 두 사람을 응접실 소파에 앉게 했다.
서로 눈도 쳐다보지 못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이게 또 마냥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참으로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었다.
“신녀님을 그만두었다고요? 그럴 수도 있는 건가요?”
세이나가 신녀를 그만두고 제국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히나가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안 되지. 한번 신녀는 죽을 때까지 신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심하는 세이나 대신 카신이 설명했다.
“하지만 신녀가 아니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신전을 나와야겠지.”
“신녀가 아니게 된다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시에 세이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를 살리기 위해 모든 신력을 다 소진했어. 그러니 신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히나에게는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가 별궁을 나가게 되면, 신력이 사라진 이유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금방 알게 될 일이었다.
“카신 님을 살리기 위해?”
카신의 내상이 심각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이나의 신력과 바꾸어 목숨을 살려야 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작게 중얼거린 히나는 세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히나, 그건…….”
세이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히나가 신녀 세이나를 얼마나 우러러봤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는 왠지 히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 내가 부족해서야. 나는 네가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강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다.”
조금이라도 더 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세이나는 쓰게 웃었다. 하필이면 가장 최악의 모습일 때 정체가 들통나 버렸다. 히나에게 엄마 소리를 듣는 건 기뻤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거라는 세이나의 예상과 달리 히나가 바로 감사를 표했다.
“카신 님을 살려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직 엄마 소리가 어색한지 히나가 쑥스럽게 웃었다.
“카신 님을 살려주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히나 네 말대로 날 살리는 일은 여태 그 누구도 한 적 없지. 네 어미는 아주 대단하구나.”
카신의 말에 히나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신녀를 그만두었다면……”
“얼마 전에 세이나는 제국 소속이 됐고, 세인트의 정식 교수가 됐단다. 가르치는 학생은 당분간 너밖에 없겠지만, 신녀 생활을 오랫동안 활발하게 하면서 쌓인 지식이 많으니 다방면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겠지.”
세이나는 히나에게 친절히 설명하는 카신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신전에서 쫓겨난 그녀가 며칠 사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카신의 덕이었다. 그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그럼 계속 제국에 있는 건가요? 그것도 세인트에?”
“그래, 세인트는 황궁 소속이니, 그녀 또한 황궁 소속이 된 거지.”
모든 설명을 들은 히나가 감격에 찬 눈으로 세이나를 보았다. 히나의 얼굴에 쓰여진 감정이 너무 잘 보여 세이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보다 내가 있는 별궁까지는 왜 왔는지 모르겠군. 아직 한창 파티 중일 텐데.”
여전히 카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히나의 모친이란 것이 밝혀졌어도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세이나도 이제는 카신의 냉랭한 시선이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았다. 전처럼 카신을 보며 불쾌하거나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니, 불쾌하지 않은 건 신력이 사라져서인가.’
카신을 볼 때마다 심연의 어둠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신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그간 모두가 카신을 볼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싶었다. 그러니 모두가 카신을 존경하고 떠받든 것이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명?”
“히나는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입니다. 파티가 끝나기 전에 얼굴을 한 번이라도 비추라고 하시더군요.”
카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히나가 깨어난 것을 이미 모두가 알아챘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히나를 찾아 그의 별궁에 직접 올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여튼 황제는 능구렁이였다. 그가 가장 불편해하고 꺼려 하는 세이나를 보낸 걸 보면.
루이스도 세이나와 히나의 관계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카신이 거절할 수는 없을 거라 짐작하고 그런 명을 내린 거였다.
“히나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제 입장에서도 대마법사님의 별궁에 히나가 있는 것이 불편하군요.”
더 이상 신녀가 아닌데도 세이나는 여전히 그에게는 신랄했다. 카신은 턱을 괴고 삐딱하게 세이나를 보기만 했다.
이제 와 어미 노릇을 할 생각이냐며 비수를 꽂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이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히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리베리아 후작께서 히나를 아주 걱정하고 있단다. 그러니 히나 너도 어서 후작가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
카신에게 수백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 것인지, 염장을 지를 때로 지른 세이나는 이번에 히나에게 말했다.
카신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세이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당연히 카신은 히나가 알겠다고 순순히 대답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히나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그는 미간을 풀고 그녀의 의중을 살폈다.
히나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속 감격에 겨운 눈으로 세이나를 보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저는 카신 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카신은 히나가 한 말에 처음엔 놀랐다가 곧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세이나를 보았다. 히나에게 항상 1순위는 자신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그러면 안 될까요?”
히나가 작은 목소리로 세이나에게 부탁했다. 허락을 맡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세이나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엄마 자격도 없는데, 허락하고 말고에 대해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세이나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히나도 눈치챈 것인지 다급히 버벅거리며 말했다.
“어, 엄마를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전 정말 카신 님과 함께 있고 싶었어요. 이제 막 전쟁도 끝나서 마음 편히 함께 있게 됐거든요.”
카신은 꽤 조급해졌다. 여기서 세이나가 안 된다고 하면 히나는 정말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이나의 서글픈 표정에 카신은 기가 찼다. 평소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히나 앞에서 처연한 연기라니. 카신은 당장 그 가식적인 가면을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히나 앞이라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모진 고생을 했으니, 당분간 마음이 편한 상대와 있으면 좋겠지.”
히나는 보지 못한 것 같지만, 카신은 보았다. 세이나가 마치 봐줬다는 식으로 그를 힐끗 보며 짓는 미소를.
“거기다 아직 후작가는 어수선할 테니, 대마법사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이곳에서 쉬는 것이 좋겠구나.”
“어수선하다니요?”
전쟁 중, 리베리아 후작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모르는 히나가 되물었다.
“전쟁이 막 끝났으니, 어수선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니? 특히나 리베리아 후작께선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이시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 무척 바쁘시겠지.”
히나의 반응에 세이나가 눈치껏 얼버무렸다.
그렇지 않아도 리베리아 후작가로 인해 카신은 골치가 아팠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그가 바빴던 이유는 리베리아 가의 문제가 가장 컸다.
‘다행히 후작 부인은 무탈했지만,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으니.’
코반드로 인해 리베리아 가의 고용인 반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대부분도 중상을 입었다. 그가 남아 저택의 불을 끄지 않았다면, 리베리아 후작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공신 중 한 명이었음에도 아주 큰 슬픔에 잠겨야 했으리라.
지금도 리베리아 후작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카신은 전쟁이 끝나고 저택의 복구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죽은 고용인들까지는 되살릴 순 없었다.
한 가문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죽음을 애도하느라 전쟁이 끝났음에도 리베리아 가는 마냥 기쁨을 표출하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전통 깊은 가문이었으니, 그 슬픔도 크겠지.’
보통 귀족가에서는 고용인이 죽은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대량 학살에 가까웠고, 죽은 고용인들 중에서는 오랫동안 대대로 후작가에서 일해온 이들이 많았다.
여전히 후작 부인은 충격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후작이 황실에서 훈장을 받을 때도 리베리아 후작과 장남인 베라미만 그 영광의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히나에게도 충격일 테니, 집안의 분위기가 차차 괜찮아지거든 보내야겠어.’
히나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데려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살아남은 고용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히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 날카로운 감정이 사그라질 때까지, 카신은 히나를 계속 그의 별궁에 둘 참이었다.
‘그래도 일이 빠르게 수습되어 다행이야.’
이번 전쟁의 시발점은 코반드였지만, 원망의 대상은 제이드에게로 향했다. 전쟁과 관련된 모든 일이 제이드의 책임으로 넘어갔다.
황족이지만, 모반을 일으킨 죄로 제이드는 곧 처참하게 처형당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모두가 그로써 위안을 찾게 될 것이다. 피해에 대한 충분한 보상까지 받게 된다면 소란스러운 분위기 또한 순식간에 가라앉으리라.
“그래도 파티에는 꼭 참석하렴. 폐하께서 전부터 널 아주 예뻐하셨는데, 네가 계속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속상하시지 않겠니.”
“네, 그럴게요.”
“거기다 폐하께서 네게 특별한 선물을 주시려 하니, 마음 단단히 먹고 가렴.”
“특별한 선물이요?”
“그건 폐하를 만나 뵙게 되면 알게 될 거란다.”
웃으며 말을 잇던 세이나의 얼굴에서 곧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히나를 보더니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세이나가 무슨 얘기를 할까 싶어 카신은 꽤 긴장했다.
“밖에서는 비밀로 하자꾸나. 네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지만, 나의 존재는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인 네 평판에 흠이 될 거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카신도 같은 생각이었다.
히나가 세이나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둘의 관계를 어떻게 숨길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만약 히나와 세이나가 모녀지간인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면 문제가 될 테니까.
“그렇게나 노력해 왔던 길이잖니? 나는 너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이나는 무척 냉정했다. 하여튼 강단이나 결정은 확실해서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아주 얄미울 정도로.
카신은 히나와의 오붓한 시간을 본격적으로 방해하는 세이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 * *
승전 파티 마지막 날, 그것도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히나와 카신이 함께 회장에 들어섰다.
“마지막까지 얼굴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와주어 고맙군.”
루이스는 히나를 보며 카신의 음흉한 속내를 비꼬았다.
“늦게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폐하.”
역시나 그의 말에 찔끔한 사람은 히나였다. 그 점이 더 못마땅한 루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태연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는 카신에게 눈치를 줘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루이스는 작은 체구로 아주 큰 일을 해내고 온 히나를 보았다.
“아주 보고 싶었다네, 리베리아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