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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122화 (122/128)

122.

히나는 답답하게 조여오는 허리에 눈을 떴다. 가끔 흥분하면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카신이 또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안고 있었다.

그와 초야를 보내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밤낮 가리지 않고 살았으니, 날짜를 대충 측정해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만큼 카신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어서 그런지, 시간도 모르고 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아파요, 카신 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그는 그녀가 눈을 뜬 것도 모르고 있었다. 히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카신은 다른 손으로 서신으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아, 미안하구나.”

카신의 손에 있던 서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로 보낸 거였다. 아마 연구실 책상에 누가 정돈한 것처럼 고이 포개져 있을 것이다.

히나는 그 전에도 카신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카신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밤낮으로 함께 있다 보니, 또 달랐다. 대마법사이면서도 평소에 마법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카신은 의외로 사사로운 곳에 마법을 무척 많이 썼다.

“누구에게 온 서신이에요?”

대답하기 싫은지 카신이 침대 속으로 깊이 들어와 그녀를 꼭 안았다.

어른인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아이 같은 면모를 많이 보였다. 히나는 웃으며 그의 허리에 두른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아직도 몸에 닿는 남자의 단단한 몸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감촉이 너무 좋았다.

“또 말씀해 주지 않는 거예요?”

히나는 쌜쭉하니 물었다. 여전히 그는 잠을 자거나 식사를 잘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식사를 할 때는 옆에서 깨작거리는 수준으로 같이 먹어주었지만, 그게 다였다.

“제게 온 서신도 있을 것 같은데.”

함께 음식을 먹지 않아도, 잠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나는 자신이 잠들 때마다 카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금은 불안했다. 그녀 또한 그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처리할 일이란 게 있는 거였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 직접 찾아오겠지.”

심드렁하니 말하는 카신을 보며 이제는 웃지도 못하겠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가 계속 숨기려 드니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잘 때마다 카신이 몰래 확인하는 서신이나 시종들에게 내리는 명령 속엔 아마 무척 중요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카신 님의 별궁에 누가 직접 찾아오겠어요.”

카신의 눈치를 무시하고 별궁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루이스와 세이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현재 가장 바쁜 상태였고, 세이나 또한 새로운 직위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날 찾아올 용기도 없다면, 중요한 일도 아닌 게다.”

카신은 갈수록 눈치가 빨라지는 히나를 보며 일부러 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히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한숨에 그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보다 씻고 싶은데…….”

히나는 카신이 기분 나쁘지 않게 그의 가슴을 살며시 밀치며 조심히 일어났다. 그의 품에서 홱 하니 벗어나면, 그는 무척 서운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일어날 때마다 히나는 무척 조심히 움직였다.

상체를 일으키자 다리 사이로 전날의 흔적이 느껴졌다. 가장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함께 씻을까?”

“시, 싫어요!”

시트를 잡고 가슴 위로 올리며 히나는 세차게 거부했다. 카신이 못마땅한 눈치를 보였지만,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같이 씻는 건 싫어요. 치, 약속해 주셨잖아요.”

서로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가릴 것 하나 없는 욕실은 아직 부끄러웠다. 그녀는 몇 번이고 함께 목욕을 하는 것만은 피하려 들었고, 카신은 수긍하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어차피 카신 님은 씻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카신의 몸은 목욕을 막 하고 나온 그녀보다도 더 산뜻하고 깨끗했다.

예전에 얼핏 칼피온에게 무슨 마법인지 물어봤지만, 그도 잘 모른다고 했다. 아마 오래전, 그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제조한 약물로 몸이 그리된 것 같다고만 했다.

‘몸에 있는 마력이 저절로 소모되며 몸을 깨끗하게 유지시키는 거라고 했던가?’

그래서 카신이 위험했을 때, 몸에 걸려 있던 마법들이 유지되지 않은 거였다. 그때의 카신은 남들처럼 씻지 않으면 지저분해지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말라갔으며, 잠을 자야 몸이 쉴 수 있었다.

칼피온은 카신의 마법은 마력이 넘치는 마법사라도 쉽게 따라 해서는 안 될 만큼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몸에 걸어놓은 잡다한 마법을 멈출 능력이나 정신이 없다면, 마력이 메말라 정말 큰일이 난다고.

그래서 칼피온도 관심은 있지만, 절대 물어보거나 따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굳이 안 씻을 건 없지.”

당장에라도 함께 욕실로 들어갈 것처럼 카신이 말을 이었다. 히나는 거절의 의미로 카신의 얼굴에 시트를 덮으며 침실에 달린 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어서 씻고 올게요.”

곧 들어온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히나가 쌩하니 도망갔다. 카신은 히나가 나가고 텅 빈 침실에 홀로 누운 채 아쉬운 탄성을 흘렸다.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로군.”

정작 본인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히나는 얼마 전에 작위를 받았다. 그 일도 겨우 처리할 수 있었다.

루이스가 몇 번이고 히나를 위한 작위식을 열겠다고 그녀를 부르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카신은 루이스의 서신을 시종일관 무시했다.

급기야 루이스가 하루에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 끝까지 귀찮게 굴었다. 카신은 무시하는 것을 멈추고 결국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약식으로 알아서 처리하라는 짧은 내용의.

‘이번 황제만큼이나 날 피곤하게 만들 인간은 앞으로 없을 테지.’

작위식을 제대로 열겠다는 루이스와 절대 그녀를 별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은 결국 기 싸움으로 이어졌다.

백기를 든 사람은 루이스였다. 이 모든 사태가 히나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팔 아프게 편지를 쓰고 사람을 보내도 헛수고란 건 그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카신의 살벌한 답장을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후작가 영애인 걸로도 넘치는데, 그딴 작위가 뭐라고. 그런 귀찮은 걸 받는 의식을 치른다고 시간을 허비할 순 없지.’

애초에 히나가 후작가의 영애가 된 건, 그의 곁에 있을 위치와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후작가 영애 이상의 직위는 모두 쓸모없었다.

작위식에 참석할 바엔 작위를 거절하겠다고 하자, 루이스는 제국이 어수선하니 약식으로 따로 소소하게 처리했다고 알리며, 히나에게 백작위를 준 것을 발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기 싸움은 끝이 났다.

하지만 지금 두 번째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세인트 황궁 학교였다.

‘승급 시험을 치르는 건 그렇다 치고, 일 년이나 학교를 더 다녀야 한다니.’

제국이 안정을 찾아가며 세인트는 다시 수업을 재개했다. 당연히 모든 학생들도 기숙사로 돌어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단 한 명, 히나를 제외하고.

세인트에서, 그리고 또다시 루이스에게서 히나를 학교로 다시 돌려보내라며 계속 서신이 오고 있었다.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세인트의 규율상, 수업 일수 부족으로 퇴학을 당할 수도 있다며.

‘처음부터 졸업반에 넣었어야 했어.’

앞으로 일 년.

세인트는 기숙사제였다. 그리고 히나가 지내고 있는 기숙사는 남자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그딴 학교, 굳이 졸업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애초에 세인트에 들어가 졸업장을 받으려던 이유는, 아무도 히나를 후작가 영애로 인정해 주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작위까지 받았다. 성녀라는 칭호도.

“히나는 피곤하게 사니까, 어쩔 수 없으려나.”

뭐든 열심히 하려고 드는 히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리라. 아마 우수한 성적으로 세인트를 졸업하길 바랄 것이다.

여자 기숙사에 몰래 들어가 히나를 만나는 일은 그에게 있어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몰래 하루에 한두 시간 얼굴을 보는 것에 만족하라고?

‘결혼을 해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이대로 결혼식을 치른다고 해도,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히나를 여자 기숙사에 빼앗긴다.

‘거기다…….’

문제는 세인트만 있는 게 아니었다. 히나가 별궁에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알려진 건지, 백작이 된 히나에게 연달아 오는 초대장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마 리베리아 후작가에는 이보다 더 많은 초대장이 보내졌으리라.

귀족이 된 이상, 최소한의 초대장에 수락하여 사교계에서 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그가 무시하라 말해도, 본분을 중시하는 히나는 듣지도 않을 게 뻔했다.

“카신 님, 아까 나가면서 식사를 준비해 두라 했어요. 같이 식사해요.”

씻고 나온 건지 히나가 문밖에서 그를 불렀다.

당분간 히나가 혼자인 시간을 최대한 줄일 생각이었다. 갈수록 눈치가 빨라지는 그녀는 혼자인 시간이 길어지면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 가마.”

카신은 바로 일어났다. 이제부터 식사 시간에 히나의 옆에 앉아 차를 마시며 계속 말을 붙여야겠다.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하도록.

* * *

“히나 님, 루터 님께 답장이 왔습니다.”

목욕을 하던 중, 히나는 시녀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고마워.”

히나는 별궁 물자를 공급하는 시녀에게 따로 일러두었다. 루터에게서 오는 서신은 따로 빼두라고.

별궁에 있는 고용인들과 거의 대화 한 번 하지 않는 카신과 달리 히나는 시녀들의 이름까지 대부분 꿰고 있을 만큼 친했다. 따로 명령을 내려 서신을 받는 일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아, 퇴학이라니. 어쩐지 요즘 나한테 시선 한 번 떼지 않으시더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루터의 다급한 필체가 담긴 편지를 읽으며 히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승급 시험부터 졸업까지, 세인트에 대해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뭐든지 다 알고, 할 줄 알 것만 같은 대마법사는 의외로 단순했다.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 제아무리 카신이라도 모든 사실을 꽁꽁 숨길 수는 없는 거였다.

“답장을 보내시겠습니까?”

“응.”

히나는 간결한 문체로 곧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답장을 보냈다.

주변에 사람 한 명 얼씬거리지 않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하루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별궁에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 서신 하나 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물론 카신은 가만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신비한 마법으로 많은 걸 알아내는 편이니 조심해야 했다. 히나는 시녀에게 절대 편지만 보내러 밖을 나가선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

“난 정말 첩자에 소질이 있는 걸지도.”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카신에 대해서는 자신 있었다. 항상 그녀에게 애가 타 있는 카신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니, 더 그랬다.

‘세인트에 돌아가기 싫다.’

세인트는 무조건 졸업을 해야 했다. 후작가의 양녀로 들어갈 때부터 히나는 세인트를 꼭 졸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인트를 졸업하면 여인의 몸으로, 후작가의 수양딸이라도 황궁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거기다 세인트의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카신 님과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니.’

작위를 받고 제국의 유일한 성녀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신은 너무나도 높은 존재였다.

히나는 자신이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카신도 조금은 밖에 나왔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 또한 절대 게을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밤은…….’

하루라도 더 아무런 걱정 없이 카신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내일 꺼낸다고 해도 상관없으리라.

히나는 내일 있을 폭풍을 완전히 잊은 채 오늘 밤을 즐기기로 했다. 그녀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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