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23화 (123/128)

123.

전쟁 후 세인트에 처음으로 등교한 히나는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카신과 연인이 되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다행히 그녀가 있는 상급반은 건물도 따로 있었고,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다 히나는 마법 실습 관련 수업을 듣지 않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세이나의 수업을 들으며 한숨 돌린 히나는 앞으로의 일 년을 걱정했다. 이대로라면 세인트의 졸업장을 따는 걸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제국 여성 최초로 백작위와 성녀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요.”

세인트 교수가 된 세이나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히나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똑같았다.

“그보다 나는 앞으로 히나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어요. 당분간 제 수업 시간에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되니 미안할 따름이군요.”

미안한 표정을 지은 세이나는 방금 탄 차를 히나 앞으로 내밀었다.

신력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오랫동안 대신녀의 자리에 있으며 쌓아온 연륜과 감이 있어 히나가 성력을 잘 내고 있는지는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평범한 사람이 보는 것보다 조금 더 예민하게 보는 수준이었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줬어야 했는데…….”

쓴웃음을 짓는 세이나를 보며 히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교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요. 또 함께 있으면 다른 것들도 많이 배우는걸요.”

카신은 아주 많은,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오래되거나 히나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무척 어려운 지식이었다.

반면 세이나는 최근 십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다양한 곳을 직접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다.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알아듣기 편하게 설명해 주는 세이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게다가 성력을 조절하는 법은 다른 분께 배워도 돼요.”

“다른 분이라면, 그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요?”

누구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세이나가 바로 칼피온을 언급했다. 히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었다.

세이나는 카신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히나는 세이나가 칼피온의 존재를 마냥 못마땅해 할 것만 같았다.

‘거기다 카신 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밤중의 카신은 무척 온순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다는 아니었지만, 평소에는 끝까지 숨기던 것을 술술 말해주었다.

며칠 동안 카신과 밤을 보내며 히나는 세이나가 왜 카신을 싫어하게 됐는지 알게 됐다. 그가 가진 힘에 대한 것도, 또 칼피온이 같은 힘을 가졌다는 것도.

카신의 힘을 바로 알아보고 불쾌감을 느꼈던 세이나가 칼피온의 힘을 못 느꼈을 리가 없다. 그래서 히나는 세이나 앞에서 칼피온을 말하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그 드래곤은 믿을 만한가요?”

히나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치만 보자, 세이나는 한숨을 살며시 내쉬었다.

“대마법사께서 히나를 알아서 잘 보호하겠지만, 그래도 항상 경계를 늦춰서는 안 돼요. 알고 있지요?”

“네, 교수님.”

속성이 전혀 다른, 그것도 불길하다 치부되고 있는 전설의 블랙 드래곤에게 성력을 배운다는 것이 심히 걱정되었다. 하지만 세이나는 히나를 믿기로 했다.

히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강했다. 거기다 카신의 영향력이 상상 이상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싶었다.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던 그 블랙 드래곤이 카신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보다 세인트에서 움직이는 것이 많이 피곤하지요? 당분간은 이곳으로 자주 도망 오세요. 히나라면 환영이랍니다.”

카신과 함께하는 히나는 이제 사는 세계가 다른 거였다. 세이나는 히나가 선택한 삶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날 만났던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예고했던 것일 수도…….’

폭우가 내리던 날, 카신은 히나를 살려주었다. 어둠 속에서도 샛노란 눈동자가 이제 막 태어난 핏덩이에 아주 짧게나마 닿았던 때를 잊을 수 없었다.

‘그보다 왜 보자고 한 걸까.’

히나가 세인트로 돌아오자마자 카신도 바로 교수로 복직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짜증이 난 얼굴로 세이나를 찾아와, 오늘 수업이 끝나고 보자며 짤막하게 말하고 떠났다.

그 무례한 태도에 만나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용건이 히나에 대한 것이라 생각하니 안 나갈 수도 없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인 걸까.’

히나가 무엇을 하든 다 걱정이 되었다. 벌써 결혼을 얘기할 만큼 컸는데, 항상 어리게만 보였다.

“교수님?”

히나의 의아한 목소리에 세이나는 카신과의 일방적인 약속을 생각하며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그녀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히나와 사사로운 대화를 이어갔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단 말이에요.”

히나는 칼피온을 불러내자마자 다짜고짜 의구심을 토로했다.

“분명 둘이 만나는 걸 거예요.”

“아무런 증거도 없잖아? 진짜 둘이 만나는 거 맞아?”

“증거가 없다니요! 아무리 삐쳤다고 해도 나중에 보자니, 말도 안 돼요.”

“로티우스가 삐쳐? 왜?”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얼굴로 칼피온이 묻자 히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새벽녘에 일어난 히나는 여느 때와 같이 항상 그녀를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카신에게 이제 그만 세인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카신이 절대 안 된다며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일 년이란 시간은 어떻게 보면 멀지만, 또 지나고 나면 짧았다. 히나는 몇 번이고 카신을 설득했고, 카신은 절대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히나는 각방을 선포했다. 그러자 카신이 바로 백기를 들었다. 여러 조건과 더불어서.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요.”

히나는 처음으로 카신이 얼마나 속이 좁은지를 깨달았다.

세인트를 다니는 걸 허락하는 대신, 그는 딱 일 년만 기다려 주겠다고 못을 박았다. 도중에 시험에 떨어져 승급을 못 한다면 기한이 지나는 것이므로 바로 포기하라고. 끝까지,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언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졸업을 하게 도와준다더니.’

거기다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식은 미루지 않겠다고도 했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세인트는 기숙사제이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한다. 하지만 카신은 주말에 그녀가 외출을 나왔을 때, 돌아올 집은 후작저가 아닌 그의 별궁이어야 한다며 결혼을 미루지 않겠다고 했다.

‘그 외에도 하루에 한 번 식사를 함께하고 티타임을 가진다거나, 수업이 끝나면 두 시간 이상은 함께 보내야 한다고도 했지.’

그 모든 조건을 내걸었음에도 카신은 토라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가야겠냐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런 카신이 수업이 끝나고 바로 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용무가 생겼으니 나중에 만나자고 했다. 의심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흐음, 살면서 로티우스가 삐쳤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아무튼 분명 뭔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 그 다람쥐,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요?”

세이나의 태도도 조금 이상했다. 공교롭게도 세이나의 오늘 마지막 수업이었던 히나는 그녀가 종이 울리자마자 바로 황급히 떠나는 걸 보았다.

“분명 두 분이 만나는 거란 말이에요.”

히나는 카신이 세이나를 껄끄러워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나와 만나는 걸 그녀에게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것도.

전처럼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걱정이 되었다. 카신이 그녀가 없는 장소에서, 특히 세이나에게 얼마나 험하게 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로티우스는 엄청 예민하다고. 들키면 나라고 해도 무사하진 않을 텐데.”

칼피온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 전에 일족으로 인해 그 큰 문제가 있었다. 칼피온은 로드인 그를 포함하여 드래곤 일족에게 당분간 절대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걱정 마세요! 절대 안 들킬게요. 들키더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할게요!”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재미있는 건 해야 했다. 짧게 고민하던 칼피온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동맹 관계니까. 절대 날 버리지 말라고, 동지!”

“그럼요, 동지!”

칼피온은 히나와 알게 모르게 쌓아온 것들을 믿었다. 성력을 발산하고 제어하는 걸 도와주면서부터 지금까지, 히나와는 카신이 모르는 은밀한 무언가를 교류했다.

“금방 갔다 올게요.”

“갔다 와서 무슨 얘기 했는지 알려줘, 알겠지?”

방관자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칼피온은 카신이나 히나에 관련된 사실이 꽤 흥미로웠다. 거기다 놀랍기만 한 히나의 출생도.

“당연하죠. 칼피온과 전, 동지잖아요.”

히나의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칼피온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히나의 몸이 점점 작아지고, 뺨이 오동통한 다람쥐로 변해갔다.

“로티우스와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알지?”

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날 때부터 다람쥐인 것처럼 그녀는 거침없이 네 발을 움직였다.

벽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제 모습이 여전히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람쥐가 된 것을 감상할 틈이 없었다.

‘그래도 내 엄마인걸. 카신 님이 엄마를 함부로 대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무조건 숨기려고만 하는 카신과 세이나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이제 자신은 모든 걸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니 말이다.

이리저리 건물 안을 기웃거리던 히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바짝 세웠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문틈 사이로 들어가자, 카신과 세이나가 마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신력을 돌려 드릴 방법을 찾았으니, 그만 돌려 드리지요. 전처럼 방대한 힘을 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전의 이력과 노력이 합쳐진다면 다시 대신녀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거요.”

조심히,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던 히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혹여 소리가 안 들릴까 싶어 숨까지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다시…… 대신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기존의 신력이 워낙 방대했으니, 이 정도 양의 힘이면 시험해 볼 만하지.”

카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반만 돌아간다고 해도 대신전에서 복귀해 달라며 야단을 떨 테지. 그래도 원체 빈틈이 없는 신녀 노릇을 제대로 할 테니.”

세이나가 신녀로 돌아간다. 그러면 다시 제국인이 아니게 된다. 세인트에도 계속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세이나는 신력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태 쌓아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났다. 그러니 다시 신녀가 되어, 최고의 대신녀라는 명예를 되찾는 것이 더 좋으리라.

“다시 신녀가 되면 제국 유일한 성녀지만, 아직 힘이 불안정한 히나를 도와줄 수 있겠지. 선택은 알아서 하시오.”

히나는 홀린 듯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뇌에 휩싸인 세이나에게 닿았다.

“난…….”

세이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콩닥콩닥 빠르게 뛰고 있는 히나의 심장도 강하게 떨고 있었다.

‘가지 마요. 제발.’

돌아가는 것이 세이나에게 있어 가장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세이나가 가지 않았으면 싶었다.

히나는 살며시 벌어지는 세이나의 입술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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