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난 이곳에 남겠어요. 더 이상 신녀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답변이었다.
“처음부터 신녀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신전에 있는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대부분이 꼴도 보기 싫었죠.”
세이나는 조금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내 신력이 돌아왔다고 하면 아마 난리가 나겠죠. 쫓아낼 때는 언제고 어떻게든 날 다시 붙잡으려 움직일 겁니다.”
아마 귀찮을 정도로, 어쩌면 평생을 쫓아다니리라. 그녀를 매정하게 내쫓았던 늙은 대신녀 둘은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세이나는 그만큼 대신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존재였다.
“신력을 잃고 꽤 힘들어 보이던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그릇이 넓은 사람이 아닙니다. 전부 다,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자리였지요. 그러니 미련을 버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력을 잃었을 때는 세상을 모두 잃은 것만 같았다. 아무리 싫어도 평생을 신녀로 살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 절망 같은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족쇄와도 같은 신력을 타고나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했다. 평생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하나뿐인 귀한 딸도 스스로 버려야 했다.
또 고작 신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히나를 버린 속죄를 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던가.
지위나 명예 따윈 바란 적도 없었다. 부족하게 살아도 좋으니, 소소하고 소박한 행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몰라준다 하여도 히나에게 어미로 인정받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합니다.”
지긋지긋해야 할 신전에서 먼저 버려주었다. 거기다 자신을 보호해 줄 나라도 생겼다. 아무런 힘도, 지켜줄 사람도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엔 쉬이 끌려가 억지로 신녀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를 쫓아낸 것을 후회하는 신전을 보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군요.”
“이제 보니 악질이었군.”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런 불순한 생각으로 똘똘 뭉친 여자가 알아서 대신녀 자리에서 물러났다니 말입니다.”
카신은 신녀에서 벗어난 세이나가 꽤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쌀쌀맞은 말투나 행동은 그대로였지만, 전과 달리 편안해 보였다.
남들을 몇 번이고 무너지고도 남을 힘든 일들을, 누구보다도 의연하고 침착하게 넘어갔다.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것처럼.
‘하여튼 대단한 여자야. 무서울 정도로.’
제국의 황제도 눈치를 보는 대신전을 곤란하게 했다며 즐거워하는 여자라니.
이렇게나 대범한 세이나의 그릇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카신의 눈에는 지금의 세이나와 가끔 생각지도 못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히나가 겹쳐 보였다.
‘정말 많이도 닮았구나.’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엊그제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무척 닮았다.
“그보다 신력을 되돌려 준다니, 그게 가능한 겁니까?”
“언제부턴가 내 힘에 이상한 것이 섞여 있어 확인했더니…….”
카신은 한 손에 어둠의 힘을 만들었다. 검고 깊은, 무엇이든 빨아들일 것 같은 어둠이 그의 손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둠의 마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이나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어둠의 중심에 한 줄기 빛이 있었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빛을 보며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그만.”
카신의 목소리에 세이나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평범한 인간에겐 위험한 힘이라.”
카신의 손에 뭉쳐 있던 어둠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되었음에도,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세이나에게 말했다.
“얼마나 전달이 될지, 또 어떤 형식으로 이동이 될지는 모르네. 하지만 적어도 대신전에서 배 아플 만큼의 능력은 갖추게 되겠지.”
히나의 성력을 증폭시킬 때, 카신은 자신의 힘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신비스러운 힘이 몸에서 흘러나왔다.
조금 더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거기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어서 시험을 한다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전과 달리 걱정을 시키면 안 되는 사람이 생겼으니.’
히나와 함께 있는 시간에 빠져 있던 카신은 최근에야 겨우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몸에 남아 있는 이상한 힘이 세이나의 신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힘을 분리시킨다기보다 불필요한 힘을 버린 적은 있었다. 과연 완전히 전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세이나가 제국 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면 했다.
“완전히 걸러낼 순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카신의 손 위에서 파지직, 하고 전류가 흘렀다. 영롱한 빛이 조금씩 뭉쳐지며 작은 구슬 모양을 형성했다.
작은 빛이 허공에 떠 있었다. 카신은 세이나를 향해 빛을 손가락을 튕겼다. 뭉쳐진 빛이 빠른 속도로 세이나에게 날아갔다.
“지금……!”
세이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카신을 부르다가 멈췄다. 빛이 몸 안에 스며들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에 그녀는 왼편 가슴을 붙잡았다.
마치 처음 신력이 발현됐을 때 같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떨려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서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어떻게 제어하는지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어쩔 줄 모른 채 숨을 헐떡이던 세이나가 천천히 호흡을 진정시키는 게 보였다. 세이나 주변으로 마구 흩어지던 신력이 차차 안정을 찾으며 모여들었다.
역시나 힘을 제어하는 능력이 무척 뛰어났다. 카신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세이나를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시선에 고개를 홱 돌렸다.
‘다람쥐?’
의자 뒤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다람쥐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람쥐가 쏙 하니 숨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설마…….”
카신은 다람쥐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힐끔 고개를 돌린 다람쥐가 그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쌩하니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가 놓칠 줄 알고?”
그는 이리저리 복잡한 곳으로 도망가는 다람쥐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휙 저었다. 네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도망가던 다람쥐가 허공에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다람쥐는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긴 손가락을 두 번 까딱이자, 허공에서도 발을 열심히 구르던 다람쥐는 뒤로 쏙 날아가 카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졌다.
“내가 어찌 못 알아봤을까.”
다람쥐는 손바닥 위에서도 발을 구르며 도망가려고 아등바등했다. 카신은 다람쥐의 등가죽을 잡아 올리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심히 버둥거리는 다람쥐와 눈을 마주쳤다.
“범인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고.”
급격하게 들어와 퍼지는 힘에 겨우 안정을 찾은 세이나는 다람쥐 한 마리를 잡아다가 대화하고 있는 카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언제부터 대화를 엿들은 거지, 히나?”
세이나는 눈을 크게 뜨며 네 발을 허공에 마구 휘젓는 다람쥐를 다시 응시했다.
“그 다람쥐가 히나라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히나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아?”
확신해서 말하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멈췄다. 몸에서 힘을 축 빼자, 등가죽을 잡고 있는 카신의 손이 살며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카신이 웃음을 찾고 있는 게 보였다.
“히나, 언제부터 이런 짓을 한 거야?”
카신은 손끝으로 다람쥐가 된 히나의 오동통한 뺨을 조심히 톡톡 건드렸다. 히나의 모습이 어떻든 그녀의 오동통한 뺨이 좋았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점점 젖살이 빠져 히나의 양 볼이 야위는 게 아쉬웠다.
히나가 다람쥐로 변해 엿들으러 온 것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위험한 짓을 저지른 히나를 혼내야 했지만, 다람쥐의 귀여운 자태에 그는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날 계속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카신이 손끝으로 볼을 두드리자 히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거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다가오는 그의 손가락에 히나는 가늘고 작은 네 발로 그의 손을 막으며 밀어냈다.
“이런, 그렇게 싫으면 다람쥐로 변하질 말았어야지.”
아무리 밀어내도 카신의 손을 막을 순 없었다. 히나는 뺨을 매만지다가 배를 긁는 그로 인해 간지러워 몸을 뒤틀었다.
“나는 너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이거 큰일이구나. 칼피온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카신은 히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투명하고 동그란 막 안에 넣어두었다. 막 안에 갇힌 히나가 몸을 구르며 어떻게든 나가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잠깐만! 히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겁니까?”
세이나는 다람쥐가 히나라는 말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카신도, 칼피온도 상식과 완전히 벗어난 인물들이었다.
“히나를 놓아주세요!”
카신은 히나를 둘러싼 투명한 막을 꼭 잡은 채로 세이나를 응시했다. 그가 픽 웃었다.
“몸이나 잘 챙기시길.”
요상한 빛이 순식간에 카신을 둘러쌌다. 히나와 함께 카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세이나는 카신이 히나를 데리고 도망친 걸 깨닫고 뒤늦게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카신과 함께 별궁 침실로 이동한 히나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패닉에 빠져 있었다.
‘되돌려 줘요!’
히나는 급기야 카신의 손가락 끝까지 물어뜯었다. 하지만 간지럽지도 않은지,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상태라면 세인트도 더는 못 가겠지? 수업 일수가 부족하면 이대로 퇴학을 당할 텐데.”
카신은 침대에 몸을 뉘인 채 나른하게 말했다. 다람쥐에서 벗어나지 못한 히나가 침대 위를 돌아다니며 그의 몸 여기저기를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칼피온이 돌아오지 않는 널 기다리며 꽤 걱정하겠구나.”
히나가 그의 손가락 끝을 몇 번이고 물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다람쥐로 변했어도, 그녀의 표정은 훤히 드러났다.
“걱정 말거라. 너를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면, 내게 걸린 걸 눈치채고 바로 줄행랑을 칠 테니.”
다람쥐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긴 꼬리를 내리며 몸을 축 늘어뜨리는 걸 보고는 카신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참에 나도 다람쥐가 되어도 괜찮겠군. 같이 다람쥐로 살까?”
충격에 빠진 듯,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히나가 곧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는 말을 몰래 엿듣고 무사히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나를 얕본 모양이구나.”
다람쥐의 검은 눈동자가 세차게 일렁였다. 카신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도 다람쥐가 좋거든 이대로 별궁에서 계속 다람쥐인 채로 살거라.”
히나가 빠르게 다가와 그의 손등을 두 팔로 살살 긁었다.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는 한 번만 봐달라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뭐, 한번 봐줄 수도 있다만.”
카신은 일부러 더 말끝을 흐렸다. 그의 손등을 마구 긁던 히나가 이번엔 뺨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피웠다.
“세인트 졸업 관련 일은 일절 건드리지 않으마. 하지만 그 외의 조건은 조금 더 수정했으면 좋겠구나.”
카신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히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 전에는 눈치가 보여 결코 하지 못했던 조건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