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25화 (125/128)

125.

“리베리아 백작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네.”

“황송하옵니다, 폐하.”

급한 정무가 많았지만, 루이스에겐 겨우 잡힌 히나와의 식사 자리가 더 중요했다.

“그보다 내게 알현을 청한 이유가 무언가?”

전쟁 후에는 히나와 따로 편지를 주고받거나 한 일이 없었다. 어차피 연락을 누가 먼저 한다고 해도 카신이 막을 것이 뻔했다.

“바쁘신데 제가 감히 알현을 요청하여 송구하옵니다.”

히나가 먼저 만나길 청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이 지난 후에야 볼 수 있었으리라.

“아니네. 나도 백작을 만나고 싶었으니, 마음 쓰진 말게.”

루이스는 정말 히나를 만나고 싶었다. 공적인 파티에서가 아닌, 이렇게 사적으로. 그는 히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네?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니…….”

“그보다 카신도 없이 어쩐 일이지? 카신의 눈을 속이고 왔을 리는 없고, 허락을 받은 거라면 합당한 거래가 있었을 텐데.”

카신은 원체 이기적인 데다,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거기다 그는 특히 히나의 일에 호락호락하게 굴지 않았다.

루이스는 히나가 혼자 이곳에 오기까지 카신과 엄청난 언쟁을 벌였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히나가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러 왔다는 것도.

“따, 딱히 거래라고 불릴 건 아니에요.”

“나는 백작을 그리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네.”

루이스는 오히려 요구사항을 가져온 히나가 반가웠다. 그래야 그가 원하는 것도 내밀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히나에겐 친우처럼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히나는 전과 달리 매우 성숙해졌고, 거기다 눈치도 빨라졌다. 제국의 성녀라는 칭호와 백작이라는 권위까지 가졌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히나의 뒤에는 카신이 있다. 이제는 히나와 공적인 관계도 유지해야 했다.

“편하게 말해보게. 나는 백작에게 그리 까다롭지 않아. 어서 서로 원하는 걸 확인해야 남은 식사 자리가 편하지 않겠나?”

“저 그럼…….”

히나는 은근히 독촉하는 루이스를 보며 겨우 입술을 뗐다.

“카신 님과 결혼을 서두르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 수 있나요?”

“그 일이라면 이미 내가 허락한다는 서명서를 쓴 걸로 아는데?”

“그게…….”

히나는 점점 달아오르는 뺨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카신 님과 약속을 했으니.’

다람쥐로 변한 채로 하루를 보냈다. 카신이 조금만 장난치다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끝까지 단호했다.

당연히 다음 날 세인트에 수업을 들으러 가지 못했다. 황당하게도 같이 있어줄 거라 생각했던 카신은 수업이 있다며 세인트로 홀라당 가버렸다.

종일 카신의 침실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다람쥐로 혼자 보낸 히나는 퇴근하고 돌아온 카신을 계속해서 간절히 바라보았다. 어서 몸을 되돌려 달라는 의미로.

“나는 너를 믿고 세인트로 보내준 것인데, 나를 믿지 못하고 이런 모습으로 엿들으러 오다니.”

카신이 손끝으로 뺨을 쿡쿡 눌러도 히나는 참고 그의 손에 달라붙으며 애교를 피울 수밖에 없었다. 다람쥐인 상태로 가둬진 채 혼자 있는 건, 솔직히 아주 많이 무서웠다.

“매번 이렇게 변장해서 어딜 가면 내가 불안해서 살 수나 있겠느냐.”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히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마치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인트에는 교수를 위한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지? 내 불안이 사라질 수 있도록 숙소를 내어달라 해서 네가 졸업할 때까지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

세인트의 교수들은 개인 연구실은 물론, 황궁에서 따로 지낼 수 있는 숙소도 제공해 주고 있었다. 세이나도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어서 히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저택은 바쁠 때 쉬는, 휴식 장소와 비슷한 곳이었다. 그 어떤 교수도 아내나 가족을 들이지 않았다.

“제국의 유일한 성녀의 부탁이다. 아무리 세인트를 졸업하지 않은 학생 신분이라 해도, 제국의 귀한 인재에게 응당 마땅한 대우를 해야겠지. 네 부탁이라면 폐하도 거절하진 않을 게다.”

루이스에게 가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람쥐가 된 상태로 세인트를 졸업하지도 못하고, 평생 인간이 아닌 채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카신은 죽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시녀에게 시켜 리베리아 백작이 알현을 요청한다고 당장에 전하라 일렀다.

원래 카신도 그녀가 루이스를 만나는 장소에 오려고 들었다. 하지만 최근 카신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나 사납게 구는지 알고 있는 히나는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았다. 꼭 허락을 받고 오겠다고.

“할 말은 그게 아니지 않아?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게.”

어째서 카신이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우겼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루이스는 모든 것이 다 능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는다면 루이스의 말에 바로 휘둘려 버리리라.

“카신 님과 결혼을 하면 가, 같이 살고 싶습니다.”

“같이? 하지만 세인트는 기숙사제가 아닌가.”

차마 제국의 성녀에게 응당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하지 않냐고 말할 수가 없었다. 히나는 식탁 밑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비벼대길 반복하며 겨우 말을 꺼냈다.

“황궁 안에는 세인트 교수에게만 내려지는 별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졸업을 하지 않았으니, 세인트의 교수 별관에서 신혼 생활을 하고 싶다?”

루이스가 히나가 차마 끝까지 내뱉지 못한 말을 이었다. 루이스가 흐음, 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히나는 몇 번이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흔치는 않지만, 세인트에 다니며 도중에 결혼을 하는 학생이 없진 않지.”

세인트 황궁 학교의 학생은 사교계 활동을 하는 것도 어려울 만큼 일정이 빡빡했다. 그래서 집안과 관련된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학기 도중에 결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예 전력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나 서로의 가문을 위해 대부분 정략결혼을 하는 귀족들은 간혹 급히 결혼을 할 때가 있었다.

“하나 신혼이란 이유로 세인트에서 특정 누군가를 봐준 적은 없네. 다들 졸업할 때까지 별거를 하거나 그게 싫다면 중퇴를 했지.”

딱 잘라 말하는 루이스를 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역시 돌아가서 카신의 다른 조건을 들어줘야겠다.

“하지만 히나 양과 친분이 있으니 조금은 혜택을 줄 수도 있네.”

“정말인가요?”

루이스가 일부러 그녀의 이름을 불러 친근함을 표현한 것도 모른 채 히나는 반갑게 되물었다.

“여성 최초로 백작이 된 것도 모자라, 제국 내에서도 전무후무한 성녀라는 칭호도 받지 않았나. 세인트 입장에서도 히나 양이 졸업을 해준다면 오히려 득이 될 테지.”

히나는 눈을 반짝이며 루이스를 보았다. 조금 싸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항상 루이스와 대화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카신 님과 함께 살 수 있을까요?”

“그거야 총장은 물론이고, 이사들과 상의를 해야 확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네.”

제국의 황제는 루이스였다. 그리고 세인트는 황궁 소속의 부속 학교였다. 거기다 현재 세인트는 리베리아 후작가가 맡고 있었다.

굳이 의논을 하지 않아도 황제의 명령이면 결정될 사항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꽤 곤란하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대신 백작에게만 혜택을 주었다고 큰 반발이 일어날 수 있으니…….”

루이스는 입가에 깊은 미소를 지으며 히나를 응시했다. 눈치가 빨라졌다고는 하나, 사람을 다루는 것에 능숙한 제 앞에서 히나는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특별 혜택을 받을 만큼의 명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백작이 해줄 일이 있네.”

“해줘야 하는 일이라면…….”

“어려운 건 아니니 걱정 말게. 그리고 일전에 부탁했던 데로 황자에게 성력으로 가호를 내려주었으면 하는데, 설마 황자가 태어난 걸 모르진 않겠지?”

황후의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는 전쟁 도중에 태어났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태어났지만, 황자가 태어나고 전쟁의 승패가 뒤바뀌었다.

다들 황자를 황실의 복덩이라며 치켜세우고 있었다. 루이스도 황후의 배 속에서 태어난 황자를 무척 아끼고 있었다.

“아닙니다! 늦었지만 감축드립니다, 폐하.”

전쟁의 승리와 함께 들린 황자의 소식에 지금도 제국이 떠들썩했다. 히나도 모르진 않는지 바로 말을 덧붙였다.

“소식은 들었으나 인사할 때를 놓쳤습니다. 그보다 제가 그런 일을 맡게 해주시다니, 광영입니다.”

루이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히나를 흐뭇하게 보았다.

‘카신, 네 마음대로 될 줄 알고?’

히나와 카신의 급한 결혼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큰 변동에도 불구하고 나머지는 전부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 * *

카신은 이럴 것 같아 히나를 루이스에게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우겨서라도 루이스에게 함께 갔어야 했다.

‘아니야, 지금 황제에게 찾아가?’

하지만 이미 전부 다 결정된 사항이었다. 갑자기 말이 바뀐다면 히나에게 의심을 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가 빨라진 히나로 인해 더는 무언가를 감추거나 숨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은 것 하나만 숨겨도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녀는 어떻게든 그 비밀을 파헤치려 들었다. 같잖은 도마뱀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감히 도마뱀 주제에 히나에게 붙다니.’

칼피온을 거두어 키운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괘씸하게도 최근 칼피온은 히나에게만 나타나고, 그의 앞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만 보면 히나도 너무해. 무작정 칼피온의 편만 들다니.’

칼피온을 찾으려고 하면 히나가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그래서 꽁꽁 숨어버린 칼피온을 찾아 멀리 나갈 수가 없었다.

“카신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루이스를 만나고 주말을 보내러 별궁에 온 히나가 목욕을 하고 발그스름한 뺨을 한 채 다가왔다. 카신은 심각했던 표정을 풀며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또 남을 괴롭힐 궁리를 하고 계셨죠? 그렇게 못되게 굴면 안 돼요.”

“괴롭힐 궁리라니. 히나, 요즘 날 너무 나쁘게 본다고 생각하지 않아?”

카신은 억울했다. 그녀를 위해 열과 성을 다 바치고 있는데, 남을 괴롭힐 궁리라니.

“제국의 성녀는 저 하나밖에 없잖아요. 폐하께서 제게 시키신 일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다시 생각해도 괘씸했다. 루이스는 성녀라는 이유로 히나에게 여러 일을 떠안겼다.

가장 큰 일로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대신녀가 없어진 대신전의 신녀 대신 히나가 제국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하게 됐다.

아직 축복 기도를 할 시기는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루이스는 전쟁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제국인들이 빨리 마음의 상처를 벗을 수 있도록 성녀, 히나를 통해 위로를 할 셈이었다.

그 외에도 히나는 이전에 세이나가 수행했던 일을 대부분 맡게 되었다. 루이스는 대신전에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형식적으로 했던 모든 행사를 히나에게 맡기고 싶어 했다.

‘대신전에 아쉬울 게 없어지면, 평등한 관계에서 제국이 우위가 되게 될 테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대마법사의 마음까지 훔친 성녀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아마 세이나가 계속 대신전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히나는 그 이상의 믿음과 인기를 갖게 되었으라.

‘같은 제국인인 데다 미지에 휩싸인 대마법사와 결혼할 성녀라니, 당연히 관심이 엄청나겠지.’

암암리에 대마법사와 성녀가 된 히나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고 있었다.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보였다. 카신은 시끄러울 미래를 상상하며 암담한 얼굴을 했다.

“거기다 제국을 위한 축복 기도는 아마 제가 계속하지 않을 거예요. 카신 님이 세이나 교수님, 그러니까…… 엄마가 곧 신력을 회복할 거라고 했잖아요?”

아직은 ‘엄마’라는 단어가 어색한지 히나가 조금 뜸을 들이며 말했다.

“세이나가 제국 소속의 신녀가 된다면 넘길 수는 있겠지.”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때까지 임시로 맡을 뿐이니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세이나는 신력을 차차 회복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가 완전히 회복하게 된다면 카신은 히나에게 맡겨진 일을 전부 세이나에게 떠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곧 결혼식을 하고 신혼 생활이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세인트 공부를 따라가야 하는 히나가 다른 직책까지 맡았으니 더 바빠질 것은 뻔한 일. 거기다 명성이 높아지면 인기도 늘어나면서 더더욱 여기저기 불려 다닐 일이 많아질 것이다.

‘같이 살면 뭐 하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파리가 꼬이지 않도록 바짝 긴장을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무척 능력 있고 인기 있는 유명인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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