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네. 안 돼요. 이건 키스라고 하는 건데요, 엄청나게 중요한 거예요. 특별한 거. 아무랑 하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앤은 여자 앞에서 고개를 수십 번도 넘게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사래도 쳐 가며 방금 한 건 안 되는 일이라고 계속 강조한다.
“왜...?”
그렇게 나쁜 짓인가. 왜, 뭐가 안된다는 거지. 남자가 그녀에게 밤새 그러는 동안 좀 아프긴 했지만, 통증 같은 건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묘했다.
“키스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니까요.”
서로... 좋아.
앤의 속삭임에서 아주 달콤한 바다 내음이 났다.
잠잠해졌던 여자의 가슴이 다시 콩닥이며 뛰기 시작했다.
여자는 뭍에 다녀온 자매들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잊지 못한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과 입술로 함께 밤을 보낸 인간 남자가 얼마나 근사했는지를 쉴 새 없이 자랑하던 모습도.
아무도 자세한 건 알려주지 않았지만 반짝거리는 눈동자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뭔가 굉장한 걸 경험하고 왔다는 걸.
어쩌면 전부 그녀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늦은 밤까지 베르세즈를 불러주고 서로 입을 맞췄을까. 한 침대에서 잠들고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함께였을까.
짙게 내리쬐던 남자의 금빛 눈동자를 떠올리니 가슴께로 보드라운 물보라가 지나가는 것만 같다.
멜루시네. 여자는 남자가 가르쳐준 낯선 발음을 입 안에서 계속 굴려 봤다. 혀끝이 괜스레 간질거린다.
이름이 뭘 뜻하는 건지 이젠 그녀도 어렴풋이 알았다. 옆에 있는 앤을 이곳 사람들은 누구나 앤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앤의 이름은 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이제....
“멜...루시네.”
“네?”
알아듣지 못하는 앤이 답답하다는 듯 여자가 좀 더 한 자 한 자 힘주어 발음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해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앤을 가리키며 이름을 불렀다.
“나... 멜루시네.”
이번엔 같은 손가락을 휘어 제 쪽을 향하게 한 뒤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한다.
“아! 그게 이름이에요? 인어님 이름? 멜루시네?”
“응! 응!”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입꼬리가 연하게 휘어 오른다. 앤이 지금껏 본 중 가장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곧 욕조 물의 표면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기에도 눈에 띄게 상기된 얼굴이 뜨거운 물의 온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인, 아니 멜루시네님. 여기 목덜미에 이 불그스름한 건 뭐예요?”
여자의 목과 어깨 부분을 문질러 닦던 앤이 문득 물었다. 어떻게 보면 멍 같기도 하고 그냥 예민해진 피부가 부풀어 오른 듯도 보였다.
하지만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장난을 치는 멜루시네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앤은 더 묻지 못하고 목욕을 도울 뿐이었다.
멜루시네는 자꾸만 다시 흘러나올 것만 같은 베르세즈를 꾹 참고 삼켰다.
그의 앞에서 오래된 인어의 노래를 불렀을 때, 차갑게만 보이던 눈동자에 처음 보는 이채가 어른거렸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도, 베르세즈를 멈출 수도 없었다. 심장이 아릴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밑바닥에 도사렸던 일말의 두려움조차 긴장과 묘한 흥분으로 바뀌어 그녀를 자극했다.
백상아리 같은 남자는 바다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모든 걸 손에 쥔 듯 여유롭고 당당해 보인다. 언제나 의외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인어에게 그런 키에론은 완벽한 세렌히데 그 자체로 다가왔다.
아까 남자에게 졸린 목에 미세하게 붉은 손자국이 남았는데도, 물이 닿을 때마다 아랫입술이 자꾸 따끔거리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빨리 또 밤이 왔으면 좋겠다.
그녀는 이제, 멜루시네니까.
***
이안은 제 상관이 검토 후 휙휙 내던지는 서류를 받아 정리하다 말고 자꾸만 그를 흘끔거렸다.
항상 어두컴컴하던 집무실이 훤한 것도, 햇빛이 사령관의 흑발에 내리쬐며 반짝거리는 장면도 지나치게 어색했다.
활짝 걷힌 커튼과 열린 창문 틈으로 빵 굽는 고소한 버터 향 같은 게 진동했다. 배가 진짜로 고픈 걸 보면 이게 꿈은 아닐 텐데. 모든 게 낯설다.
“뭐.”
“예... 예?”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유령이 따로 없다. 분명 서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언제 들킨 건지.
“전하 얼굴에요? 아, 아니요? 그냥 오늘따라 좀 빛이 나시기는....”
쯧. 키에론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날카로운 금안이 이안을 가볍게 쳐다봤다. 무감한 시선인데도 노려보는 것 같아 지레 뜨끔했다.
“아, 각하. 송구합니다. 그게 아니라.”
키에론은 업무 중에 황족 대우받는 걸 극도로 꺼렸다. 전쟁터에서 그를 대공 전하라고 불렀다가 보급조로 좌천된 기병이 있었을 정도다.
“어젯밤에, 혹시.”
“혹시?”
툭. 대공이 들고 있던 서류를 아예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별것 아닌 동작인데도 맞은편의 이안은 흠칫 놀랐다.
키에론이 그런 부하를 응시한 채 트레이에 놔뒀던 시가를 집어 들었다.
“그... 인어가...어... 그러니까.”
“잤어. 아주 푹.”
남자가 입에 문 시가를 느릿하게 빨아들였다. 문득 전날 밤 제 입술에 닿았던 물기 어린 감각이 되살아난다.
“오오, 그러셨군요. 주무셨군요. 그쵸, 밤이니까 뭐 다 그렇.... 네에?”
이안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책상 위를 짚었다.
키에론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입 안에 고인 연기를 이안의 얼굴로 뱉어냈다. 눈앞이 뿌옇게 된 부사령관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침했다.
“지, 진, 콜록, 짜로. 콜, 록. 주무셨다고요?”
“그래.”
“아니, 대체 어떻게 말씀입니까?”
“글쎄.”
키에론도 그게 궁금했다. 독한 약이나 술로도 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겨우 물고기가 부른 노래에 넘어가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이해를 떠나 솔직히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 오늘도 부르실 거죠?”
“...왜?”
남자는 시가를 입에 물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하루 잠을 잘 잔 건 맞지만 굳이 또 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제 잘 주무신 게 진짜 그 여자 때문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각하 지금 ... 피부에서... 광이.”
“요즘 헤스날 후작은 어때.”
한마디로 닥치라는 소리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안이 자리에 앉아 따로 준비해뒀던 서류를 건넸다.
“작년보다 사병을 2배 정도로 증원했습니다. 올해 말까지 3배 가까운 규모로 키울 것 같고요.”
“황궁이나 수도 쪽은.”
“말씀하신 것처럼 선황제 폐하 측근이었던 귀족들 제외하고는 대부분 작업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의 뜻을 같이하기로 했고요.”
서류를 빠르게 넘기는 키에론의 미간이 깊이 팼다. 그의 예상보다 후작의 동태가 빨랐다. 아무리 황제의 정세파악이 느리다 해도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면 어디서든 누수가 생길 수 있었다.
“전에 의논했던 것보다 급한데.”
키에론이 손에 든 시가를 트레이 위로 툭, 툭 쳤다. 까맣던 시가의 풋 부분에 얼핏 얼핏 빨간 불똥이 맺혔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후작 쪽에 사람을 보내 볼까요?”
“됐어. 어차피 두 달 뒤면 볼 테니까.”
“아, 그렇죠. 벌써.... 그럼 지금처럼 계속 정리해서 보고만 드리겠습니다.”
예정된 업무를 끝낸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키에론의 눈은 여전히 서류 위로 꽂혀 있었다.
“이안 폰 루테른 백작.”
하지만 뒤돌아 나오려던 발목을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가로챈다.
“예...?”
“괜찮겠어?”
맞부딪친 대공의 금안이 가늘게 좁혀 든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굳이 합세하지 않아도 돼. 자네가 내 부사령관이지 가신은 아니지 않나.”
“각하.”
“보다 신중하라는 뜻이야.”
키에론이 가죽 등받이에 몸을 더 기대며 눈을 스륵 감았다.
“아뇨! 각하의 뜻이 곧 제 뜻입니다. 끝까지...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피식. 주먹까지 불끈 쥐고 토해낸 진심을 들은 키에론의 입 새로 바람이 샜다. 그를 오래 봐 온 이안이기에 알 수 있는 미세한 입가의 변화까지. 오늘의 대공은 정말 평소와는 다르다.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에 남자의 새카만 앞머리가 슬쩍슬쩍 흐트러진다. 방금 침을 삼킨 건지 두꺼운 목 한가운데 두드러진 울대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어느 유화에서나 본 것 같은 모습이라 이안이 멍하니 서서 상관을 쳐다봤다.
원래도 비범한 외모의 남자이긴 했으나 오늘은 유독 돋보인다. 대체 이유가 뭔지 몰라 이안은 멀뚱히 선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가 봐.”
“네, 넵.”
그러고도 대공의 앞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 건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멜루시네.
파란 눈을 멍청하게 끔뻑대던 그 물고기와 생각할수록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베르세즈인지 뭔지를 밤새 들었는데 정작 그는 한 소절도 기억나지 않았다. 멜로디를 복기해 보려 하면 머릿속이 뿌예진다. 정말로 홀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키에론이 엄지로 제 아랫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건조한 피부가 손끝에서 바스락댄다.
특별할 건 없었는데도 자꾸만 거기 와닿던 여자의 감촉이 떠오른다. 벌린 틈으로 거칠게 파고들어 머금었던 부드러운 살덩이도.
도망칠 곳도 없는데 숨으려던 혀를 그가 찾아내 마음껏 깨물었을 때, 속에서 노랫소리가 과즙처럼 터져 흘렀다.
지나치게 달아서인지 해갈되지 못한 갈증이 목구멍에서 계속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처음은 깊은 잠이었으니 두 번째야말로 깨어나지 못하려나.
대공이 시가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오후의 나른한 빛에 쌉싸름한 연기가 뒤섞이다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