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에 멜루시네-17화 (17/117)

#17.

여기 정원이 있는 줄이야 알았지만 안쪽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다.

느른한 걸음으로 장미 넝쿨 사이를 가로지르는 키에론의 뒤에서, 때론 옆에서 여자가 계속 조잘거렸다. 뭐가 그리 기쁜지 눈이며 얼굴 전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음... 프리지아. 이건... 메, 메리골드.”

마주치는 꽃마다 멈춰서 이름을 외워 보는 멜루시네는 부산스럽게도 굴었다. 몇 개는 금방 떠올리더니 어떤 건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을 골똘히 보고도 모르겠는지 입만 벙끗거렸다.

그도 모르는 하찮은 식물의 이름을 벌써 이렇게나 아는 걸 보면 생각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나 보지.

“멜루시네.”

충동적으로 여자를 돌려세웠다. 그를 올려다보는 투명한 눈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내 이름은.”

“아....”

꽃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쓸 때처럼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 사이에 주름이 살풋 진다.

“주, 주인님?”

픽. 휘어 오르려던 제 한쪽 입꼬리를 남자가 힘주어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애완용 물고기가 제 주인 이름도 제대로 몰라서 되겠는가.

“아니. 키에론.”

“키...에...론.”

모든 발음을 혀끝으로 말아 동글게 내는 멜루시네에게 남자의 이름은 지나치게 거셌다.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자꾸만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그녀가 듣기에도 남자가 가르쳐준 것과 제 입에서 나온 소리는 차이가 많이 났다.

“연습해, 제대로.”

여전히 찌푸린 여자의 미간에 키에론이 손가락 끝을 가볍게 튕겼다.

“아야! 응... 연습... 해.”

겨우 그게 아팠던 모양인지 이젠 온 얼굴을 찡그린 채로 멜루시네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양새가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의 뒤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각하,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 아.”

뛰어다닌 건지 이마에 땀이 잔뜩 맺힌 이안이 제 상관 앞에 선 여자를 보곤 다가오던 발걸음을 멈췄다. 꽃이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 서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인어가 아니라 무슨 요정처럼 보였다. 눈이 부신 것 같기도 했다.

“왜.”

“훈련 시작한 지 좀 됐는데 평소보다 늦으셔서.”

이곳, 별관 근처에는 대공의 병사들을 위한 훈련장이 있다. 전시가 아닐 때에도 그의 사령관은 단 하루도 강도 높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키에론이 코끝에 걸리는 낯선 꽃향기를 들이마시다가 숨을 멈췄다.

아주 잠시 동안의 침묵 후, 본래의 표정을 되찾은 대공이 날카롭게 답했다.

“가자.”

멍하니 서 있던 멜루시네가 인사도 없이 뒤돌아서는 남자의 너른 등에 대고 그제서야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나도... 같이.”

따라가고 싶어.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그녀의 입 안에서 맴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와 함께 풀 냄새에 둘러싸여 햇살 아래 서 있으니 떨려서 가슴이 콩닥였다. 얼마 전 꿈같이 흘렀던 입맞춤이 다시 떠올라 입술이 간질거린다.

어젯밤에도 그녀의 곁에서 그림처럼 잠들었던 남자이지만 이젠 그의 낮까지도 궁금해졌다.

평온하게 감은 눈도, 고르게 퍼지는 숨소리도 근사하지만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금빛 눈동자와 손짓만큼 생생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멜루시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남자는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정원을 떠났다. 날갯짓 몇 번에 금세 사라져 버렸던 노란 나비처럼.

***

“인어님! 또 여기 계셨어요? 그것도 모르고 정원 안을 몇 바퀴나 돌았잖아요!”

“쉬, 쉿!”

나무 뒤에 몰래 서 있던 멜루시네가 잽싸게 앤의 팔을 잡아당겨 제 옆쪽으로 붙였다.

“아니, 대체 왜. 여기 뭐 볼 게 있다구요.”

멜루시네가 거듭 검지를 입술 위에 붙이며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앤은 한숨을 푹 쉬며 멀찍이 저 아래 훈련장에서 이는 먼지바람을 바라봤다.

병사 수백 명이 엉겨 붙어 땅을 구르고 여기저기서 고함과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칼날끼리 부딪치는 소음에다가 말들의 투레질 소리까지. 너무 시끄러워서 여자 둘의 목소리 같은 게 저기까지 들릴 리가 없는데도 멜루시네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숨어 있었다.

벌써 이게 며칠째인지.

훈련장에는 매일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훈련하는 사내들로만 득실거릴 수밖에. 하지만 인어님이 꼭 점심 먹은 후, 하필 해가 하늘 높이 떠 가장 뜨겁고 더운 시간에 이 정신없는 곳을 서성이는 이유는 명백했다.

앤은 멜루시네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그 끝엔 윤기 나는 검은색 말 위에서 부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의 힘 있고도 우아한 몸짓이 눈에 띄었다.

“뭘... 하는 걸까?”

멜루시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쁘기 그지없는 병사들의 각 잡힌 움직임에 집중했다.

맨 앞에 선 대공이 구령을 붙이면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던 회색의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훈련장에는 신기한 그림이 그려졌다. 다이아몬드 모양 같았다가도 이내 조개 꼴로 펼쳐지는가 하면 눈 깜짝할 사이 처음의 일렬로 선 형태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와, 우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탄성을 내지르는 멜루시네에게 앤이 나지막이 일러줬다.

“편대 지시하시는 거예요.”

“그게 뭔데?”

“음, 뭐라고 하지. 싸울 때 전형 연습인데, 부대는 지형이나 상황에 따라 한 몸처럼 움직여야 공격도 방어도 잘할 수 있거든요.”

앤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배웠던 걸 떠올렸다. 몇 년 전 명예롭게 전사하기 전까지는 그도 대공의 부하였다.

“전하, 멋지시죠?”

“응?... 응, 너무... 멋져.”

다 안다는 듯 미소 짓는 앤을 향해 멜루시네도 환하게 따라 웃었다. 꽃을 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지만 먼지 위에서도 새카만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홀로 반짝이는 남자의 모습은 매일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어지니까.

“이렇게 매번 훈련에 직접 참가하는 사령관은 제국에서 전하가 유일할 거래요.”

대공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제 주인을 두려워했지만 그건 단순한 공포보다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고용된 하녀나 시중 대부분이 전하를 모시던 병사의 가족들이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키, 키에론.

멜루시네는 조그맣게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바로 옆에 선 앤조차도 들을 수 없게. 혼자서, 아주 비밀스럽게.

정원에서 그와 마주친 이후로 매일같이 연습하고 있지만 아직 부족했다. 빨리 제대로 발음해서 그에게, 자신의 세렌히데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그렇게 간직한 소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물거품처럼 조금씩 더 크게 부풀어 갔다. 멜루시네는 그러고도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대공의 뒷모습을 쫓았다. 중천에 떴던 태양이 멀리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 어둑해질 때까지.

***

별관 1층의 다이닝 홀. 보통은 비어 있는 장소이지만 평소보다 훈련이 늦게 끝난 탓에 대공과 이안 루테른 백작을 위한 만찬이 이곳에 차려졌다.

고요한 가운데 은 식기가 부딪는 소리와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시중들의 발걸음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그래서 이번엔 얼마를 썼다는 거지.”

“육천만 페르 정도 되는 모양입니다.”

고기를 썰던 키에론의 손이 멈칫했다.

막 이안에게서 황제가 또 다른 다이아몬드 광산을 사들였다는 보고를 들은 참이다. 그것도 아직 다이아몬드 광석 하나 채굴되지 않은 고원지대에 매장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만 믿고.

보나 마나 겉으론 황제의 입 속 혀처럼 구는 헤스날 후작의 작품일 터였다.

키에론도 종국엔 뜻을 같이하겠다고 말했지만 성정이 급하고 탐욕적인 후작의 일 처리가 불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공은 붉은색 와인이 채워진 잔을 천천히 돌리면서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이제 겨우 5년. 황제가 된 후 에드바르가 하는 일이라곤 딱 두 가지뿐이다. 재정 낭비와 여자 사들이기. 아니, 하나 더 있지.

“세르타스 궁은 언제 완공된다고?”

“올해 초겨울쯤입니다. 열 번째 정원도 끝마쳤다고 하고, 현재는 실내 장식가와 보석 세공사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더군요.”

어릴 때부터 건축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에드바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멀쩡한 황궁을 두고 황실의 오랜 별장이었던 세르타스에 새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키에론이 그런 조카를 완곡하게 말리려고 애썼으나 선황제의 감시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신난 청년의 치기를 말리지는 못했다.

“건국제에 맞춰 공개하려고 인력을 다 빼가는 통에 황궁이 텅텅 비었다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만만치 않습니다.”

“헤스날 후작만 신이 났겠군. 이래저래 본인에겐 유리할 테니.”

이안이 쓴 미소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중도파였던 가문 몇도 이번에 가담하기로 했다고....”

호전적인 성격의 형님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원성을 산 적은 있지만 내정에서는 실리를 추구했고 통치자로서 카리스마도 뛰어났다.

수십 년간 그런 황제에 익숙해져 있던 신하들이 갓 스물의 나이에 황좌를 이어받은 유약한 에드바르를 존경할 리 만무했다.

“알겠어. 계속 주시해.”

“넵.”

키에론은 식기를 내려놓고 테이블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요즘 좀 뜸해지나 싶었던 두통이 다시 지끈거리며 몰려온다. 반도 비우지 못한 메인 요리 접시는 벽에 붙어 대기하던 하녀가 눈치 빠르게 치웠다.

탁탁. 대공이 테이블 위를 검지 끝으로 두드리자 시종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밖에. 그냥 들어오라고 해.”

정신 사납게 종종거리지 말고.

“예? 밖....”

당황한 시종만큼이나 이안도 의아한 표정으로 제 상관을 쳐다봤다. 누굴 얘기하시는 걸까.

오늘 저녁 이후로 별다른 일정은 없으신 걸로 기억하는데.

“내 물고기.”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이안이 고개를 돌리니 다이닝 홀로 들어서는 문이 조금 열린 채였다.

그 틈으로 늘어졌던 자그마한 그림자가 후다닥 몸을 숨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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