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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 멜루시네-25화 (25/117)

#25.

멜루시네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벽 한쪽에 작게 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별궁의 가장 안쪽인 그녀의 방에서는 훈련장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훈련이 한창인 낮에는 으레 사내들의 함성 같은 게 들려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간간이 새가 날갯짓하며 뾰로롱대는 소리만 들려올 뿐.

아... 보고 싶다.

잠든 내내 그 남자의 꿈을 꾼 것 같은데 오히려 깨고 나니 키에론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잘 걸 그랬지. 자면서라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시무룩해진 멜루시네가 제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기가 생겼을까.

그의 씨가 분명 셀 수도 없이 제 안에 심어졌을 텐데....

물론 남자와 밤을 보낸다고 무조건 새끼를 배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그녀의 세렌히데는 보통 인간 남자와는 다르다.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수컷. 물고기로 치면 최상위 포식자인 백상아리. 하늘로 비교하자면 흐르는 구름이나 바람 따위가 아니라 빛이 되는 태양 그 자체일 테다.

멜루시네는 빨리 자매들을 만나 그에 대해 자랑하고 싶어졌다. 이제야 그 달밤 아래 모여 다들 제 세렌히데 얘기만 늘어놓았던 이유를 알겠어.

하지만 키에론을 떠올리며 날아오를 것 같았던 기분이 금세 심해까지 곤두박질쳤다. 아기 갖는 걸 이번에 바로 성공하게 된다면... 그녀도 다른 자매들처럼 제 세렌히데를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어떤 자매는 육지로 나갔다가 며칠 만에 베르세즈 섬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한 달을 꽉 채우고 오는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도 수정에 실패한 자매 중에는 다음 해에 다시 육지로 나가는 경우도 간혹 있던 걸 기억한다.

보통은 인어라는 정체를 들키는 게 두려워서 인간 옆에 오래 남기를 꺼린다. 키에론의 성으로 오기 전 멜루시네를 때리고 괴롭혔던 그 나이 든 남자처럼.

결국 많은 인간이 인어의 눈물에서 나온다는 전설 속 보석을 노린다. 인간 세상에 떠도는 여러 전설의 주인공인 만큼 쉽게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하지만 키에론은 그런 보통의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인어인 그녀를 보고도 두려워하지도 탐내지도 않았으니까.

“아야....”

산산조각이 났던 온몸을 겨우 붙여 놓은 것처럼 얼얼하고 찌뿌둥했다. 특히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싫었냐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아직 판판할 수밖에 없는 배를 만지작거리며 멜루시네는 자신을 향하던 남자의 눈을 되새겨봤다.

차갑기만 한 금빛 눈동자 안에 설핏 파도가 들어찬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그녀 아래로 퍼붓는 움직임이 빨라지곤 했다.

멜루시네가 제 팔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 남자, 키에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한가득 찼다.

깊숙이 결합했던 아래도, 자신을 단단히 붙들던 손도, 기댔던 품도 모두 너무 뜨거웠다. 그런 그를 떠올릴 때마다 몸이 다시 저릿해진다.

“인어님! 여기 따뜻한 물이랑 날생선이요! 혹시 오징어도 드실 수 있으려나 싶어서 가져와 보긴 했는데.... 아이고, 일어나셔도 되어요? 그냥 앉아계시지!”

그때 다가온 앤과 군침 도는 냄새가 그나마 끊이지 않는 멜루시네의 감상을 끊어냈다.

앤이 차려준 맛있는 음식을 꼭꼭 씹어 먹으며 그녀가 문득 물었다.

“그... 오늘 훈련은? 소리가, 안 들려.”

“아, 전하의 군대요? 아마 다음 주까지 훈련은 없을 거예요. 추수 감사제 기간이라서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린내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던 앤이 얼른 표정을 풀며 답했다.

막 생선 한 마리를 다 끝낸 멜루시네가 이번엔 오징어를 들어 다리 하나를 입에 쏙 물었다. 쫀득쫀득한 식감이 너무 맛있어서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동그랗게 떠진다.

“추수... 감사제?”

“네, 매년 이맘쯤 있는 제국의 가장 큰 축제예요. 트리톤이야 남부라 일 년 내내 거의 날씨가 온화하지만, 제국 전체가 그렇지는 않거든요. 곡식 농사를 짓는 곳에서는 이때 가장 많은 수확물을 거둬들여요. 그걸 각 성과 공국마다 제각각의 방법으로 축하한답니다.”

“우와... 정말?”

이제 멜루시네도 이 정도 이야기는 대충 다 알아들을 수 있다. 지금은 음식이 많이 나오는 때, 사람들은 그게 좋아서 서로 고마워하고 기뻐한다.

“이번 주 내내 그 준비 때문에 저는 물론이고 모두 엄청 바빠요. 게다가 이번 축제 때는 특별히 헤스날 후작 영애께서... 아.”

신나서 설명을 늘어놓던 앤이 말을 멈추고 입을 합 다물었다.

“응? 헤스... 후, 작? 왜?”

빨판이 오독오독 씹히는 오징어 다리를 열심히 먹으면서 멜루시네가 답을 독촉했다. 언제나 무슨 얘기든 즐거워하며 재잘거리던 앤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자꾸 망설이며 입을 달싹인다.

“그게 누구야?”

앤은 며칠 만에 깨어난 인어님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멋대로 떠들다 실언을 했구나 싶었다. 호기심이 많은 그녀가 주춤하는 기색을 놓칠 리도 없었다. 그래, 뭐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인데.

“대공 전하의 약혼녀요. 이번 축제 때, 그분도 오실 거예요.”

앤의 목소리가 전에 더없이 진지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는 게 평소와 달랐다.

하지만 약혼녀가 뭘 뜻하는지 알 리 없는 멜루시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저 마지막 남은 오징어 다리를 입 속에 쏙 집어넣을 뿐이었다.

***

대공 전하와 결혼할 사람.

결혼이 뭔지를 모르는 인어님에게 약혼녀의 의미를 설명하느라 앤은 한참 동안 애를 먹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물고기 세상은 일처다부제랬나. 아니, 일부다처제인가? 어느 쪽이든 멜루시네는 짝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어 보였다.

외양은 보통 사람보다도 더 사람 같은, 누구보다 아리따운 여인이지만, 식사할 때나 이런 차이를 느낄 때면 정말 낯선 세상의 처음 보는 존재라는 걸 실감한다.

“그러니까 남자랑 여자랑, 계속 한 명만?”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욕조에 몸을 담근 멜루시네는 발끝으로 물장구를 치며 앤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네! 맞아요, 그런 거예요!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랑만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죠.”

이제야 이해를 한 모양이라고 앤이 좋아하는데 멜루시네의 표정이 다시 모호해졌다.

“하지만 키에론... 음. 그때 그 복도... 예쁜 여자랑 또... 나랑....”

아무래도 인어님은 한 사람과만 평생 함께한다는 뜻에 잠자리까지 포함시키는 듯 보였다. 아니면 아예 그것 하나만 떠올리고 있거나.

앤이 멜루시네의 머리에 향유를 끼얹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건 좀 달라요. 그게 결혼을 한다고 꼭. 으음, 물론 그냥 보통 남자들은 못 그러겠지만 전하는 그냥 귀족도 아니고 황가 직계 혈통이신 데다 원래 높은 귀족이실수록 원하는 대로....”

앤은 설명을 하면 할수록 말이 꼬이고 멜루시네는 점점 더 알아듣기 어려워했다.

하긴 대외적으로 결혼은 한 사람과만 하고 이혼이나 재혼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반면, 부부 둘 다 정부 여럿 두는 건 일도 아닌 제국 귀족들 특유의 풍속을 인어에게 이해시키는 건 무리였다.

“혹시 그거랑 같아? 물고긴데, 암컷 수컷 한 명씩만 같이 짝짓기해. 죽기까지.”

“어? 물고기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응! 몸이 이렇게 생겼는데 막... 납작해. 아, 그리고 눈이 뒤에 있어!”

멜루시네가 욕조 물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던 앤이 깨달음을 얻고 답을 외쳤다.

“가오리! 가오린가 봐요.”

가오...리. 멜루시네는 앤이 가르쳐준 말을 여러 번 반복해 발음해 보았다.

골똘히 집중해 입 모양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며칠 밤을 대공의 품에서 시달린 여자라기보다는 이제 막 세상을 깨우쳐 가는 소녀에 가까워 보였다.

후, 어렵다 어려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은은한 장미 향이 배어나는 멜루시네의 머리카락을 빗던 앤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인어님! 이게 뭐예요? 머, 머리가 왜 이래요?”

허리까지 탐스럽게 굽실대며 묘하게 반짝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은 앤의 눈에 멜루시네가 그저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뒷부분은 그대로인데 얼굴선을 감싸고 떨어지는 앞부분 머리카락만 빗장뼈 정도까지 댕강 잘린 모양새가 너무 우스꽝스럽다.

아니 누가 어쩌다 인어님의 머리카락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지.

“응? 이건 키에론이, 전에....”

멜루시네는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망설였을 뿐이지만 앤의 머릿속엔 점점 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상상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어, 괜찮아요! 인어님. 구, 굳이 설명해 주지 않으셔도 되어요. 이러나저러나 예쁘시니까 상관없죠! 뭐 전하만 좋으시다면야....”

“나, 예뻐?”

다만 멜루시네가 신경 쓴 건 다른 부분이었던 것 같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을 꺼내자 앤이 당황했다.

“그럼...요?”

멜루시네는 불현듯 궁금해졌다. 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해 주었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눈도. 참 아름답다고.

하지만 정작 그녀가 궁금한 건 오직 한 사람의 생각뿐이었다.

“키에론도 그럴까?”

앤은 잠시 하던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멜루시네를 바라봤다.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선홍색으로 물든 인어님의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면서 그녀는 누구를 생각하는지 입가에 자꾸만 미소를 머금었다.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리 이 세상 원하는 여자를 다 침대로 부를 수 있는 대공 전하이셔도 앤의 인어님은 조금 많이 특별하니까.

자신감에 넘쳐 답하는 앤을 향해 멜루시네도 다시금 얼굴 가득 해사한 웃음을 띠었다.

그래. 저 모습을 보고도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내가 있다면 정상이 아닐 거다.

점점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멜루시네를 마저 닦아 주던 앤이 내일의 특별 업무를 떠올랐다.

“참, 인어님. 저 내일 하루 종일 성을 비울 것 같아요. 하녀장님이 막내 하녀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셔서요.”

“어디로 가는데?”

“시내로요.”

사실 대공성 일이니 어떤 상인에게든 직접 들어오라고 시키면 된다. 하지만 이건 매번 큰 연회가 있을 때마다 막내 하녀들이 거치는 일종의 테스트 같은 거였다.

“시... 내?”

“네, 장도 서고 대공령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에요. 복잡하고 시끄럽죠.”

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프기 전까지 앤의 엄마는 시내에서 빵을 만들어 팔았다. 어린 시절 천방지축 남동생들을 잡으러 다니느라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시장 바닥을 헤치고 다녔던 얘기를 해 주니 멜루시네는 오히려 깔깔 웃더니 눈을 반짝인다.

“나도, 나도 갈래! 같이 갈래!”

많은 인간이 모인 걸 볼 수 있는 데다가 물건을 사고판다는 시장 구경까지. 멜루시네는 벌써부터 설레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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