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청명한 초겨울의 햇살이 황제의 응접실을 은은하게 비쳤다.
금빛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꼬아 올린 여인이 긴 속눈썹을 최대한 느리게 깜빡이며 나긋하게 물었다.
“혹시 선물로 받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글쎄....”
에드바르가 손에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오래된 친우로서 제가 매년 챙겨드리지 않았어요? 올해도 빼놓을 수는 없지요.”
에스텔이 케이크 위에 놓인 새빨간 라즈베리를 포크를 써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콕, 콕 건드리며 덧붙였다. 일부러 맞은편이 아닌 제 옆에 앉은 황제의 팔에 제 팔꿈치가 슬쩍, 슬쩍 닿게끔 움직이면서.
오찬 후 함께 다과를 나누는 자리.
그녀는 아까 밥을 먹을 때부터 어딘가 넋이 나가 있는 황제가 내심 못마땅했다.
에스텔은 에드바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제법 좋아했다. 그는 그녀를 사기 인형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어린 시절 꼭 갖고 싶었지만 아무도 허락하지 않아 결국 갖고 싶었던 마음만 남은 소중한 무엇처럼.
제멋대로 구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 그녀와 있을 때는 꽤나 다정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둘 사이에 흐르는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갖고 노는 걸 좋아했다. 황제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받아주니 서로 흡족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안을 수 있는 황제에게 유일하게 불가능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게 일종의 권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걸 바라고 칭송하기 마련이니까.
“선물로 뭘 달라고 할까...?”
그가 딴생각을 하는지 자꾸 대화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자꾸 되묻는 남자가 불만이었지만 에스텔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작게 떼어낸 무스 케이크 조각을 입 속에 쏙 넣으며 에드바르의 옆모습을 슬쩍 훑었다.
어렸을 땐 꽤나 귀여웠는데....
워낙 빼어난 핏줄이라 황제의 외모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높은 콧대며 날렵한 턱선에 그린 듯한 눈썹까지. 선이 날카롭고 굵은 대공에 비해 전체적으로 연하고 부드러운 미색이라 황녀로 태어났으면 세상을 홀렸을 거란 얘기도 많이들 수군거리곤 했다.
아버지의 바람처럼 저 남자랑 결혼했으면 지금쯤 황후로 이 황궁을 누비며 살았겠지. 그랬다면 어떤 삶이었을까. 그녀는 아주 가끔 그런 상상에 빠져들고는 했다.
아무래도 제 취향은 곧 진짜 남편이 될 대공 쪽이지만.
“그 여자는 어때.”
“네?”
“내 생일 선물로 말이야.”
그 여자...?
황제가 누구를 일컫는 건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던 에스텔이 뒤늦게야 깨닫고 티 나지 않게 미간을 구겼다.
그날 황제와 그 멍청한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심 없었다.
다만 에드바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또다시 튀어나왔다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됐으면 곧 흥미가 떨어졌을 텐데 실패했던 걸까. 아니면 한 번으로는 만족 못 할 정도로 그 동물이 그렇게 대단....
휴우. 대체 무슨 유치한 생각을. 그 여자가 제 앞에 나타난 후로는 자신이 이상해지는 것만 같다.
에스텔이 며칠 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멜루시네가 목에 걸고 있던 대공의 이니셜이 박힌 목걸이. 물론 애완견에게 쓰는 목걸이처럼 생겼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몹시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대공이 그 여자를 황궁까지 데려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이곳에서 마주쳤을 땐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올겨울부터는 차근차근 결혼식 준비를 진행할 계획이라서 더욱 그랬고.
며칠 동안 시녀를 통해 전하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추진하려 했으나 매켈란 사절단을 모셔온 뒤로는 침실에서 두문불출이란 답과 함께 거절당했다.
에스텔은 생각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멜루시네, 그 여자가 제국에서 보기 힘들게 예쁜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 말고 하나도 볼 것이 없지 않은가. 예의나 기품은 찾아볼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무식해서 대화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아, 그... 베르세즈에서 왔다는 여자 말씀이신가요?”
그래서였다. 에스텔이 일부러 말꼬리를 흘리며 넌지시 비꼬았다.
아침부터 과음한 황제가 아무렇게나 의자에 기대있다가 그녀의 말에 상체를 곧추세웠다.
“뭐? 베르, 세즈?”
“네. 그 여자가 폐하께는 말씀 안 하던가요? 저번에 저한테는 그러길래. 자기 입으로 베르세즈에서 왔다고 말이에요.”
뭔가 말하면 안 될 비밀을 누설하는 기분이 살짝 들었지만 넘어갔다.
에스텔은 여전히 그 여자가 인어라고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다.
다만 황제가 그녀에게 어느 정도 흥미를 보이는 건 확실하고, 그 흥미에 시즈닝을 조금 가미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황제의 관심이 어떤 식으로든 제게는 유리할 것이란 계산도 있었다.
에드바르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탄식 같은 게 새어 나왔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아... 그래서, 멜루시네?”
뭐가 재밌는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웃는 에드바르를 에스텔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는 이름이신...거에요?”
“잘 알지. 헤스날 후작 영애는 몰라?”
에스텔이 고개만 갸우뚱했다.
“유명한 전설 속 인어 이름이야. 아버님께서 어린 시절 자주 들려주셨지.”
“아.”
그러고 보니 에스텔도 얼핏 떠오르는 듯도 했다. 제국에야 인어와 관련된 전설이나 동화가 수십 가지에 이르니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을 뿐.
“숙부가 그래서 그렇게 미쳐 있었구만?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전설 속의 인어라.
비아냥대는 황제의 말에 이번엔 에스텔이 예민해졌다.
“안 하던 짓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에스텔.”
궁금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후작 영애의 이름을 에드바르가 나긋하게 불렀다. 꼭 친우로 지내던 어린 시절처럼.
턱에 손을 괸 황제가 에스텔의 눈앞까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 같은 남자는 말이야... 여자한테 적어도 둘 중 하나를 찾아.”
먹구름으로 덮인 새카만 눈동자가 꿰뚫듯 응시하니 귀하게만 자란 여자의 속이 울렁거렸다.
“권력에 보탬이 되거나, 사내로 충족시켜 주거나. 나 같은 경우는 전자를 찾은 거고.”
“...네?”
아무리 에드바르라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천박한 언행이었다. 표정을 꾸미는 데 능한 에스텔조차도 감정을 차마 숨기지 못해 두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헤스날 후작 영애는 자신이 둘 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지....”
에드바르가 제 것이 아닌 에스텔의 접시에 놓여있던 산딸기 하나를 집어 얄밉게 제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전자거든. 아니면 숙부에게는... 둘 다 아니거나.”
“그, 그게 무슨.... 에드.... 폐하!”
“뭐,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냥 내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리든가.”
명백한 성희롱이고 지나치게 모욕적인 언사였다. 제국의 지존만 아니었다면 에스텔 같은 여인이 참고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보이지 않게 꼭 말아 쥐고 또박또박,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대공을 그렇게 다 아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만.”
“아, 물론 나도 그대 의견에 동의해... 왔어. 지금까지는.”
에드바르가 다시 혀로 제 입술을 할짝거렸다. 뭘 생각하는지 눈가가 붉어지는 게 음험해 보여서 에스텔이 시선을 돌렸다.
“그런, 데요?”
카랑한 목소리가 귀엽기는. 에드바르가 제 것에 올려진 산딸기를 집어 다시 에스텔의 케이크에 슬쩍 올려놓으며 답했다.
“지난밤에... 멜루시넨가. 그 여자한테 장난 좀 쳤다고 우리 숙부께서 사내의 눈을 하고 나를 보더라고. 한입에 잡아먹히는 줄 알았지 뭐야?”
아이고, 무서워라.
에드바르가 과장되게 제 몸을 끌어안으며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일부러 에스텔 앞에서는 가볍게 말했지만 대공과의 일은 실제로 그에게 치욕스럽게 남았다. 계속 그날의 일을 되새김질하느라 에스텔과의 식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황궁에 절대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건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런 황제의 말을 들은 에스텔은 최대한 입매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보려 했지만 참담한 기분에 속이 너덜너덜해졌다.
그 자신도 말했듯이 황제야 매일매일 술과 약물에 취한 인간이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사실은 에스텔도 에드바르와 같은 걸 봤다는 사실이었다.
시내에서도, 무도회장에서도 그 동물을 향하던 제 남자의 금빛 눈동자를.
정작 약혼녀인 자신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진득한 무언가가 담긴.
“상관없습니다, 전.”
에스텔이 힘주어 말했다. 비틀린 미소와 억지로 접힌 반달의 눈매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아서 에드바르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 품고는 했던 음심의 끄트머리를 떠올렸다.
“어차피 저와 대공 전하는 곧 부부가 될 테고, 그건 누구도 쉽게 끊을 수 없는 거니까요.”
“아아, 그런가.”
에드바르가 사뭇 절실함이 담긴 에스텔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생각했다.
보통 이럴 때 유혹하면 넘어올 텐데. 황제가 숙부의 약혼녀쯤 취한다고 뭐, 황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에드바르로서도 이해할 수 없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분홍빛 요정이 베르세즈에서 온 인어라.... 이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군.
황제는 자신을 향해 반짝대던 파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입맛을 다셨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까 궁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