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의 품에서 잠든 여자는 숨소리마저도 미약했다.
키에론이 삐쩍 마른 어깨와 팔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언제나처럼 물기 어린 감촉을 제 피부에 새길 것처럼 느릿하게 감싸 쥐었다.
이제는 베르세즈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이 여자 곁에서라면 언제라도 잠이 든다.
지긋지긋한 불면증과 악몽의 끝자락에도 멜루시네의 체향이 코끝을 감돌면 곧바로 벗어났다.
우습게도 출정을 준비하며 진심으로 고민했다.
아무래도 그녀를 데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면서. 그동안 무시했던 전설에 그도 모르는 새에 이미 홀리기라도 한 건지도 몰랐다.
키에론이 여전히 그녀의 목에 채워져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남자의 이니셜이 새겨진 무거운 초커는 애완동물에게 채워주는 목줄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빼곡히 박아넣었다는 것이 다를 뿐.
그가 목걸이의 잠금 부분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했다. 풀어줄까. 어차피 이런 것 따위 없어도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그녀가 대공성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방 앞과 복도, 본성 입구와 각 성문에도 겹겹이 사람을 배치해두었다.
달그락. 키에론이 손에 쥐고 있던 진주 구슬들끼리 맞부딪쳐보았다. 다른 때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었다. 밤새 그녀에게서 흐른 눈물이.
하지만 족쇄든 감시든 아직은 더. 한번 제 것이 된 이상 오롯이 제 것으로 남아야 한다.
그때 무슨 꿈을 꾸는지 멜루시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키에론의 입술이 그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그녀의 떨림을 잠시 머금었다가 다독이듯 몇 번 더, 미간뿐 아니라 눈썹과 눈꺼풀 위에까지 입을 맞췄다.
“으응....”
고양이처럼 갸르릉대는 소리에 남자의 입가가 조금 휘어 오른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창백한 뺨과 입술에도 계속 수 놓였다.
이번에도 같이 데려가달라고 조를 줄 알았더니 여자는 웬일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달리 끝까지 매달리지 않는 멜루시네가 어딘가 어색했다.
이제 저에게, 이곳에 그만큼 익숙해져서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입 안이 칼칼해진다. 혀끝에 까슬한 모래라도 걸리적대는 것 같다.
“멜루시네.”
깊이 잠들어 들릴 리 없을 텐데도 그녀가 몸을 조금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녀... 오지.”
키에론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제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그 인사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한 번 더 멜루시네의 입술 위에 키스한 남자가 이불과 블랭킷을 여자의 목에까지 폭 덮었다.
오래 준비했던 거사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만큼 어느 때보다 예민한 시국이다.
하지만 정작 출정을 앞둔 지금 이 순간의 그는 황위 찬탈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녀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남자는 잠든 멜루시네 곁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결국 새벽이 밝아오고 창밖에서 찌르르하고 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는 이유 없이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느릿하게 제 여자의 침실을 나섰다.
묵직한 걸음 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백상아리처럼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도, 그 와중에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빛도 전신으로 뜨겁게 와 닿았다.
그의 인기척이 아주 많이 멀어진 뒤에야 멜루시네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일어난 지 제법 됐으나 그녀는 일부러 잠들어 있는 척했다.
이제 떠날 남자를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라면 실은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속아주었고 그걸로 되었다.
아니, 정말일까.
괜히 모른 척했나.
멜루시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골반과 허리를 치고 오르는 둔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너무도 싱겁게 키에론을 보내버렸다.
한 번 더 그를 안고 입 맞출 수 있었는데.
절대로 잊지 않도록 남자의 눈동자와 얼굴 구석구석을 머릿속에 아로새길 수도 있었는데.
바보같이 겁을 내다가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멜루시네가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침실을 지키고 서 있던 호위들이 네글리제 바람으로 나온 여자를 보고 놀라며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가실 수 없습니다.”
“자, 잠깐만, 하아. 키에, 키에론이. 저기 내가, 꼭.”
“예? 아, 전하는 이미 떠나셨습니다. 훈련장 쪽으로 가신 것 같은데 말씀 전할까요?”
“응! 제발... 불러, 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키에론을 쫓아가려고 병사가 몸을 돌린 순간 다시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아니야. 아니, 야.... 하지 마.”
다시 불러서 그를 본다고 해도 이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멜루시네가 혼자 중얼거리며 침실 문을 열었다.
당황한 호위들이 뭘 더 물을 새도 없이 그녀가 등 뒤로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그 문에 기대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오래전 베르세즈에서 자매들에게 했던 제 물음이 떠오른다.
[꼭 그래야... 해?]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면... 그러기 싫을 것 같은데.]
소중한 세렌히데라면서, 운명의 상대라면서 왜 다들 인간 남자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오는지 이상했다.
[네가 아직 너무 어려서 그래. 때가 되면... 다 알게 돼.]
아직 철없는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충고도 모른 척했다.
[난, 절대 사라지게 두지 않을래.]
멜루시네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진정한 세렌히데를 만나면 굳이 기억을 지우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그녀는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인간 남자를 만나고야 말 거라고.
결국 자매들이 맞았다.
그건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어가 함께 밤을 보낸 남자의 기억을 지우는 건 종족을 보호하고 생긴 아기를 무사히 낳고 기르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제 멜루시네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대로, 잠시 스치고 말 게 아니라, 정말로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인간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처음 인간에게 잡혀 왔을 때, 빛 한 방울 들어오지 않는 심해보다도 사방이 막힌 유리 수조가 더 두려웠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와 구해 준 남자는 새카만 밤하늘에 뜬 달 같았다.
칠흑 같은 머리를 한 그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헤엄을 쳐 가까이로 다가갔다.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손끝이 맞닿는데, 벌써 온몸이 저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키에론은 한결같이 그녀에게 하나뿐인 세렌히데가 되었다.
다만 멜루시네는 안다.
남자는 그녀에게 감정이 없다.
그를 향해 한없이 부풀어 오르고 커져 버린 마음은 오직 그녀 자신의 책임이다.
키에론에게 그녀는 사랑이 아니다.
그저 소유일 뿐.
그는 실컷 멜루시네를 가져도 그녀는 키에론의 머리카락 한 올도 가질 수 없는 거다.
애초에 제 것도 아닐뿐더러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키에론의 기억은 놓아주는 게... 맞다.
그때 그녀의 뺨을 타고 따뜻한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이게 뭐지.
멜루시네가 손등으로 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뚝, 뚝. 아무리 닦아내도 어디선가 차오른 물이 자꾸만 흘렀다.
아니, 솔직히 싫다.
그녀가 평생 간직할 나날을 키에론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품에 안겨 보았던 라피로산의 노을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눈을 맞으며 만났던 회색 하늘도, 둘만의 작은 바다에서 함께 헤엄쳤던 달빛 부시던 어느 밤도.
하지만 많이 좋아한 만큼 이젠 그 추억까지도 오로지 그녀 혼자만 견뎌내야 하는 모양이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파도가 그녀를 파헤치고 간 것만 같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이토록 텅 비어버린 마음과 멈추지 않는 눈물뿐이라서.
멜루시네는 소리를 죽인 채 웅크린 몸을 끌어안고 한참을 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
***
“우선 이걸 내일까지 생각날 때마다 발라요. 특히 낮에 듬뿍 바르고 최대한 햇살을 오래 쬐는 게 좋아.”
멜루시네만 자신의 침실로 부른 에스텔이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옅은 노란색을 띤 물에서는 아주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뭔데?”
“레몬과 오일을 섞은 물에 계피랑 식초를 넣은 거예요.”
예전에 그녀에게서 피임 차를 건네받은 기억 때문에, 멜루시네는 저도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리병 안에 든 약을 흔들어 봤다.
“이걸 꼭 발라야 해?”
“당신, 모르겠어요? 이 제국에 그런 분홍색 머리는 없어. 그 상태 그대로는 대공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거라구요.”
아. 화장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멜루시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에는...?”
“더 자세한 건 내일 밤, 당신이 떠나기 직전에 알려줄게. 전하의 원정대가 출정한 직후라 대공성이 무척 어수선할 테니, 그때를 노릴 생각이에요.”
멜루시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에스텔은 그녀의 예상대로 많은 것을 빈틈없이 준비해주었다.
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니 모든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유일하게 그녀를 도와줄 에스텔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발코니 창문으로 가느다란 초승달이 비쳐 보였다. 마치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을 지켜보듯이.
드디어 내일, 멜루시네는 대공성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