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에 멜루시네-84화 (84/117)

#84화.

잠든 앤의 옆모습은 어딘가 아이 같아 보였다.

베르세즈에서 멜루시네와 함께 지내던 어린 자매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래도 이제 그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허전했던 마음에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사실 멜루시네조차도 앤이 잠들 줄은 몰랐다.

최근에 그녀는 대공성을 도망칠 방법을 찾기 위해서 꽤 여러 번 베르세즈를 불러봤다. 침실 앞을 지키는 호위나 방을 치우던 하녀들에게.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아마 그녀의 베르세즈를 들을 수 있는 건 특별한 몇 명 에게만 가능한 모양이었다.

멜루시네는 자꾸 앤을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나. 어차피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중한 사람과의 마지막을 너무 흐지부지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괴로워졌다.

아니, 어쩌면 모든 헤어짐은 이런 걸까.

함께했던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복기하고, 좀 더 잘해줄 걸 후회하고.

자매들이 인간 남자와 밤을 보내더라도 최대한 빨리 베르세즈로 돌아왔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기억이 쌓일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건 그걸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뿐이니까.

똑똑.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지금 제 방에 들어올 사람은 한 명뿐이다.

멜루시네가 문을 열어주자, 에스텔이 하녀 둘과 함께 들어왔다. 한 명은 붉은 기가 짙게 감도는 갈색 머리였고, 다른 한 명은 어두운 금발이었다.

에스텔은 침대에 엎드린 채 자고 있는 앤 쪽을 스윽 봤다가 멜루시네에게로 다가왔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멜루시네. 욕실은 어느 쪽이죠?”

에스텔의 물음에 멜루시네가 방향을 가리키자 하녀 두 명이 유리병 여러 개를 꺼내 들었다.

“원래의 머리색 보다는 꽤 밝아졌으니, 색을 바꾸기 더 쉬울 거예요. 둘 다 믿을 수 있는 내 사람이야. 시키는 대로 따라요.”

“고마...워.”

그녀가 제 눈을 곧게 마주하며 미소 짓는 멜루시네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왜 지금, 아니 이제 와서 떠나는 건지.”

얼마 전의 멜루시네를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절대로 대공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막무가내로 굴던 여자가 아닌가.

멜루시네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애초에 말을 모르지도 않는데 진실과 다른 얘기를 하는 게 그녀에게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솔직하게 대답하면 안 된다는 걸 이젠 본능적으로 알았다.

“말하기 어려워.”

“그래... 뭐, 중요하지 않죠.”

에스텔이 사뭇 의심스러워하던 눈초리를 일단 거뒀다.

“계획은 이래요. 멜루시네의 머리를 붉게 염색하고, 내 하녀인 척 변장시킬 거예요. 그리고 저 금발 머리 하녀, 마가렛과 준비해둔 마차를 타고 떠나면 돼요. 내가 준 편지와 서명을 보초들에게 보이고 급한 심부름을 간다고 설명하면 될 거야.”

멜루시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은 차후에 별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당 하녀들의 뒤처리와 입막음도 제대로 끝내놓았다. 나중에 혹시 대공이 추궁하더라도 멜루시네가 도망가려고 혼자 수를 쓴 것으로 알 수 있도록.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멜루시네는 시녀와 옷을 바꿔 입고, 염색한 머리를 똑같은 장식으로 꾸몄다. 그녀의 체구가 조금 더 작고 말랐으나 일부러 풍성한 드레스를 입혀 놓으니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 어서 출발해요.”

시각은 이미 한밤중, 어디선가 희미한 호각 소리가 울렸다.

대공의 부대가 어스름을 타고 이제 출정한다는 의미였다.

서두르는 에스텔과 마가렛이라고 불린 하녀를 따라 멜루시네가 방을 나섰다.

나가기 직전에 그녀는 뒤를 한 번 더 돌았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앤의 모습을 눈에 가만히 담았다.

안녕, 앤.

절대로 잊지 못할 하나뿐인 제 친구에게 멜루시네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홀로 속삭였다.

***

출정을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멜루시네와 마가렛이 대공성을 빠져나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키에론이 트리톤 곳곳에, 그리고 문과 성곽 주변으로 보초와 부하들을 꽤 많이 배치하고 단단히 훈련시켰기 때문이었다.

“대공성의 출입은 당분간 일부 인원에 한정해 나머지는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문마다 멈춰 세워졌다.

“우리는 곧 대공비가 되실 헤스날 후작 영애님의 하녀입니다. 중요한 서신을 대신 전달하러 급히 가는 것이온데 이렇게 지체하게 되면 후에 큰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면 책임지실 겁니까?”

보초들은 성을 빠져나가려는 여자 둘의 면면을 깐깐하게 살폈지만, 후작 영애의 친필 서신과 서명이 워낙 확실했기 때문에 맘대로 막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부하들이 멜루시네의 평소 인상착의에 대해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역으로 도움이 됐다.

남쪽으로 난 마지막 본성 문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상당히 깊었을 때였다. 멜루시네로서는 동쪽 문으로 나가 바로 바다로 가는 게 빨랐을 테지만 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돌아가기로 정했다.

이제 본성 외곽을 둘러싼 작은 숲만 통과하면 시내.

하지만 마차가 숲에 진입하자마자 마가렛이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하다, 마차 멀미를 하는 것 같다, 아주 조금만 쉬었다 가면 좋겠다....

멜루시네는 초조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내 도와준 사람이 힘들다는 데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하녀의 부탁에 따라 결국 둘은 마차를 숲 어귀에 잠시 세웠다.

마가렛은 이제야 좀 살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허리춤에서 작은 실크 주머니를 꺼냈다.

순간 오렌지 향이 마차 실내에 확 감돌았다.

마차 옆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던 멜루시네의 고개가 절로 돌려졌다.

“그거....”

“아, 오렌지에요. 갈 길이 제법 되니까 혹시 몰라 싸 온 건데, 같이 드실래요?”

“아니, 난 괜찮아.”

멜루시네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의식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든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럼 저 혼자, 실례할게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마가렛이 오렌지의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얇은 껍질 속 숨겨진 주홍색 과육이 드러날 때마다 새콤달콤한 냄새도 따라서 강해졌다.

멜루시네가 맞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배 속에서 작은 심장이 제 것과 함께 쿵, 쿵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긴장해서 하루 종일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다. 단숨에 혀끝으로 침이 고였다. 정작 배가 고픈 건 그녀였다.

파란 눈동자가 물끄러미 오렌지를 향하자 마가렛이 수더분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안 드시겠어요? 아니면... 딱 하나만 드려요?”

조심스럽게 권하는 모습에 멜루시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가렛이 얼른 껍질을 벗겨 건넨 오렌지 한 알을 입에 쏙 넣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과즙이 상쾌했다.

맞은 편에 앉은 하녀는 멜루시네가 손에 든 오렌지를 잘 먹는지 유심히 살피는 눈치였다.

그녀가 두 번째 알맹이를 막 입에 넣었을 때쯤이었다. 두드드드, 멀리서 말발굽 소리 같은 게 울리면서 마차가 덜컹거릴 정도로 바닥이 흔들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부대가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공 전하의 부대가 이제 막 서쪽 성문을 나가는 모양이네요.”

마가렛이 입 안의 오렌지를 마저 씹어 먹으며 무심코 말했다.

“아.”

그 말에 멜루시네가 벌컥 마차 문을 열었다.

“어? 지금 뭐 하시는....”

“마가렛? 고마워.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갈게.”

당황한 하녀가 채 말리지도 못하는 사이 멜루시네가 마차 밖으로 혼자 뛰쳐나갔다.

“자, 잠깐만요! 저기, 아가씨?”

멜루시네는 소리가 울리는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를 따라갈까 고민하던 마가렛은 다시 마차 안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 의자에 멜루시네가 먹다 놓고 간 오렌지 알맹이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멜루시네는 제법 걷다가 나무가 동그랗게 뺑 둘러싼 숲속 공터에 다다랐다.

윤기가 도는 잎이 풍성하게 달린 커다란 녹나무 아래, 자그마한 연못에는 달이 스며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하늘거리는 들꽃이 가득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그녀가 지나쳐온 성문이 아직 저 멀리 보이고, 땅을 두드리는 진동도 여전했다. 워낙 긴 행렬이라 성을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쯤이라면. 이곳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멜루시네가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가느다란 꽃송이들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할 수 있을까.

그녀가 눈을 사르륵 감았다.

하고 싶지 않아.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이곳, 트리톤에서 멜루시네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웃고, 또 많이 기뻤다.

처음엔 경계했지만 나중엔 무심한 듯 챙겨줬던 하녀들, 지켜주던 호위들,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안.

누구보다 그리울 앤과 그리고.

키에론, 사랑하는 그녀의 세렌히데.

몸은 떠날지라도 마음속에는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계절들에, 멜루시네가 그들과 함께였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욕심이다.

멜루시네도 알고 있다.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그들 곁에 닿았던 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게 옳다.

멜루시네가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연못 주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가만가만 노래를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시작된 노래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었다.

공기 중에 부드럽게 퍼져가는 울림은 마치 바람처럼 숲속을 가득 채우고 하늘을 날아 대공성 사람들에게로 흘러갔다.

[바다가 어디로 흐르는지 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달빛을 따라오라 말해 주면.... 그대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바람은 하늘의 속삭임... 파도는 바다의 숨결... 그리고 나의 노래는....]

멜루시네가 호흡을 고르기 위해 잠시 노래를 멈췄다.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차올라서 힘겨웠지만 소리가 끊기지 않도록 전신에 힘을 줬다.

그렇게 그녀의 온몸에서 다시 노래가 스며 나왔다.

[바람은 하늘의 속삭임... 파도는 바다의 숨결... 그리고 나의 노래는... 나의 노래는, 당신의 심장을... 건너요.... 돌아오지 않아도, 돌아올 수 없어도 눈물이 흐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기다려요.... 언젠가 파도가 영원히 머무는 날... 그날엔 꼭 내가 먼저 그대를 알아볼게요....]

처연하게 흐르는 멜루시네의 노래가 트리톤의 하늘을 은은하게 덮었다.

누구도 듣지 못했지만 분명 모두의 귓가를 스쳤다.

마치 대공성 어디에서도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나의 노래는 당신의 심장을 건너요.... 그러니 기다리지 말아요.... 언젠가 파도가 영원히 스러지는 날... 그날엔 꼭 내가 먼저 그대를 알아볼게요....]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뻐근했던 가슴이 점점 더 조여들었다.

노래를 마쳐야 하는데, 전부 불러내야 하는데 자꾸만 호흡이 가빠왔다.

마지막 남은 마음을 모으고 또 끌어모아 멜루시네는 겨우 노래를 끝마쳤다.

누구의 기억도 지우고 싶지 않은 진심만큼, 꼭 그만큼 그녀의 노래는 더욱 강력하게 퍼져나가 대공성 곳곳에 울렸다.

[나의 노래는... 당신의 심장을 건너요.... 당신의 심장을 건너 바다로 가요.... 그러니 기다리지 말아요.... 기다리지 말아...요....]

아슬아슬한 노래의 끝에 멜루시네는 잠에 빠져들 듯이 그렇게, 풀숲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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