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승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둥둥, 하늘을 울리다 못해 신축된 세르타스 궁 안까지 파고드는 소리에 황좌에 앉아 있던 에드바르가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저 소리를 들어왔다.
페르트하크의 승리를 알리는 웅장한 울림을 느낄 때마다 에드바르는 누군가 제 심장을 가격하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처음엔 아버지와 숙부가 함께 돌아왔지만, 언젠가부터는 숙부 홀로 출정했다가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승리한 건 제국인데도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숙부의 공을 치하하고 격려하면서도 굳어 있던 표정과 미세하게 떨리던 손가락 끝 같은 걸 기억한다.
에드바르, 그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뱉는 말과는 달리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불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버지가.
하지만 이제는 그의 심경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숙부가 또 한 번 큰 공을 세우는 걸 경계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을.
당시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전공(戰功)을 세우고 귀환한 숙부를 맞이한 후의 아버지는 유난히 날카롭고 예민했기 때문이다. 그는 에드바르에게 매질을 하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아들의 정신을 옥죄곤 했다.
오찬 자리에서 말 한마디 실수했다가 해가 질 때까지 옷장 안에 갇히거나 검술 훈련 결과가 미진하다고 이틀 내내 굶어야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모든 것 중에서도 에드바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눈빛이었다. 자신을 경멸하는 듯 깔아보는 금색 눈동자.
숙부와 놀라우리만치 닮은 눈이 에드바르를 향할 때마다 그 속엔 서늘한 한숨 같은 게 섞여 있었다.
후.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고 제 앞으로 걸어올 숙부를 기다리며 에드바르는 아버지에게서 옮겨 온 그 긴 한숨을 똑같이 내쉬었다.
이윽고 정성껏 금으로 세공한 문이 열리고 커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거침없이 전진해 왔다.
그는 긴 다리가 직선으로 뻗어 오는 기품 있는 모양새를, 제국의 황제를 향하면서도 결코 움츠리거나 망설이지 않는 단단한 몸짓을 집중해서 보았다.
그의 발걸음이, 마치 나팔 소리처럼 제 심장을 가격하는 듯했다.
어린 시절 숙부의 걷는 모습을 보며 에드바르는 저 걸음걸이를 닮고 싶다고 남몰래 생각했었다.
혹여나 이 길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해도 키에론은 끝까지 그 걸음을 멈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 그의 맞은편이 아니라 바로 옆에 서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폐하.”
키에론이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에드바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 순간만은 에드바르의 입가에서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 대단한 숙부가 제 아래서 조아릴 수밖에 없는 때. 아무리 공을 세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귀환하여도 그는 결국 제 아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반역자는.”
“끌고 왔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뭘 그런 것까지 내가. 그냥 대공이 알아서 처리해.”
에드바르가 키에론의 말을 끊으며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단호한 목소리에 황제도 느슨하게 풀었던 표정을 날카롭게 바꿨다.
“아니, 그럼 짐이 직접 칼로 베기라도 해야 해?”
황제더러 직접 반역자의 목을 치라는 황당한 소리에 농담처럼 한 말이었는데, 마주한 키에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네. 그렇게 하시는 게 옳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지면을 묵직하게 두드리는 저음에 에드바르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나처럼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에 그가 떨리는 무릎을 손으로 꽉 쥐었다.
처음 키에론에게서 황위 찬탈에 대한 보고를 들었던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즉위하던 순간부터 줄곧 궁금한 게 있었다.
“차라리 후작 손을 진짜로 잡고 같이 밀고 들어와 이 자리에 앉지 그랬어? 숙부라면 못 할 것도 없었을 텐데.”
황제가 관조적인 말투로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키에론은 다분히 신하의 태도와 말투로 말하는데도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결국 뿌리 깊이 새겨진 자격지심 때문일까.
“솔직히 꽤나 좋은 기회지 않았는가? 짐에게 반역하겠다고 수도까지 모인 세력이 그렇게 많았다던데.”
대공의 짙은 눈썹이 조금 움찔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각진 턱에서 키에론이 느낀 불쾌감이 에드바르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숙부도 좀 솔직해져 봐.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가? 어느 줄에 설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건 아니고?”
대공은 페르트하크에 반기를 들 제국 내 귀족이 누군지 끝까지 파악하고자 했다.
언젠가는 제국에 칼을 꽂을 사람.
그들을 뿌리까지 제대로 색출해내려면 신중하고 교묘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후작의 계략에 동참하는 사람 중 페르트하크에 계속 충성할 자와 아닌 자를 오랜 시간에 걸쳐 가려냈다.
키에론이 몇 년이나 지속된 황위 찬탈 계획을 실행 직전에서야 황제에게 고한 것도 마지막까지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봐. 그러니까 우리 숙부께서는 후작의 목이 아니라 이 조카의 목을 치셨어야....”
픽. 그런 반응쯤이야 예상했다는 듯, 대공의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휘어 올랐다.
“폐하.”
똑바로 고개를 들고 황제를 마주한 키에론의 금안이 서늘했다. 높은 단상 위 황좌에 앉아서도 에드바르와 몸을 완전히 세운 대공의 눈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제가 그 자리가 탐이 났다면.”
키에론이 한 발자국 성큼 다가오자 에드바르가 몸을 굳히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애초에 거기 앉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뭐, 뭐라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에드바르가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5년입니다.”
키에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선황제가 승하하신 지 5년. 이제 어리광은... 그만 피울 때라는 얘깁니다.”
멀찍이 선 근위병들에게 소리가 잘 들리지 않도록, 대공이 말한 어리광이라는 단어는 다른 말보다 작게, 마치 속삭이듯 지나갔다.
키에론의 그런 태도에서 에드바르는 오히려 더 큰 모욕감을 느꼈다.
“아무리 숙부라도 이런 무례는 도저히 참을 수 없....”
스스슥.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공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단숨에 단상 위로 뛰어올랐다.
칼날이 검집을 날카롭게 부딪는 굉음에 도열해 있던 황실 근위대 모두가 키에론을 향해 칼을 겨눴다.
놀란 에드바르의 눈이 새카맸다.
키에론이 밤바다에 잔물결이 일듯 흔들리는 조카의 눈동자를 느릿하게 내려다봤다.
거칠어진 에드바르의 호흡이 그에게까지 와닿았다.
하지만 키에론은 제 칼을 순순히 황제의 손에 다시 들려 줬다.
“그러니 직접 하셔야 합니다.”
에드바르는 손아귀에 들어온 대공의 검을 긴장한 눈빛으로 훑었다. 입 안이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누구도 감히, 폐하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왜....”
에드바르의 입에서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크흠. 그가 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근위대장에게 눈짓했다. 근위대가 나가고 큰 홀이 조용해지자 에드바르는 그제야 다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탐내지 않는 거지?”
적을 산 채로 잡아 올렸는데도 불안감이 가득 찬 목소리에 키에론이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비집어 나오려는 실소를 잠시 누른다. 에드바르의 이런 반응까지도 모두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저 모습이야말로 선황제를 가장 닮았다는 걸 본인은 알려나.
왜 그는 저 부자에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운 아군의 가면을 쓴 적군인 걸까.
“애초에 제 것이 아닌 걸 굳이 탐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만큼의 간절함이 없다는 게... 더 맞겠지만.”
“뭐야?”
에드바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이거다. 숙부의 이런 태도가, 하늘을 꿰뚫을 권력도, 아니 이 세상을 다 주어도 관심 없다는 듯한 저 오만함이 평생 거슬리고 또 부러웠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은 그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빼앗아 갖지 않아도 이미, 제 나라입니다.”
키에론은 선대 황제들로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온 황좌의 포효하는 사자 조각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 번도 저 자리에 앉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선황제는 황좌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와 친아들, 그리고 유일한 동생인 저까지도 괴롭히고 학대했다.
그는 키에론이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인 동시에 처절할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정신 차리고, 먼저 자신을 돌보십시오. 그리고 폐하의 제국을 제대로 지켜내야 합니다.”
형님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기다리지도 않고 에드바르의 알을 성급하게 깨 버렸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에드바르는 피나는 노력으로 깨진 알껍데기에서 스스로 빠져나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조카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보는 것. 그게 키에론으로서도 형님이 새겨놓은 흉터에서 자유롭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키에론을 증오하고 두려워했던 만큼이나 비틀린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유일한 혈육에 대한 마지막 남은 예의.
***
코끝이 간질간질. 재채기가 나오려다가 말고, 또 나오려다가 말았다.
불그스름한 보름달이 뜬 밤바다를 돌고래와 어울려 마음껏 헤엄치는 달콤한 꿈이었는데....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져 버린 장면이 너무 아쉬워서 멜루시네가 아직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어어, 그런데 또, 간질간질. 이번엔 손등인가.
“벤! 하지 마앗! 언니 잔단 말이야!”
귓가를 날카롭게 찌르는 꼬마 아가씨의 음성에 잠이 채 깨지 않았는데도 멜루시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린...?”
“어어? 깼다. 난 몰라아, 일어났잖아! 언니 밤에 안 자서 더 자야 하는데! 너어, 거기 서!”
시끌시끌하던 머리맡이 곧 조용해졌다.
다다다다닥, 하고 잽싸게 멀어지는 두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이젠 너무도 익숙하다.
쌍둥이 남매는 이 집에서 늘 제일 먼저 일어나 종종거리며 온 집 안을 돌아다녔다.
장난꾸러기 벤과 자기 엄마보다 더 잔소리쟁이인 린은 한순간도 쉴 틈이 없이 티격태격했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신은 조금 없었지만.
“에구, 깼어요? 더 자야 할 텐데.... 저 천방지축 막내들 때문에 어떻게 하나.”
부스스한 채로 겨우 상체를 일으킨 멜루시네가 아직 잠이 가득한 눈을 비비는데 다정하고 푸근한 목소리가 다독이듯 들려왔다.
“아니야, 헬렌. 이제 일어나려고 했어.”
“안 돼요, 히비스 아가씨. 더 누워 있어요. 임산부는 잘 자는 게 가장 중요하다구요.”
아팠던 몸이 다 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구만.
걱정하며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멜루시네가 풋,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이런 게 가족일까.
헬렌의 목소리와 말투는 들을수록 놀라울 정도로 앤과 똑같았다.
트리톤 본성에서 도망쳐 나온 지도 어느덧 한 달 남짓.
멜루시네는 그녀를 감싸는 정오의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