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적은 나의 친구!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에 위드는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은 걷힌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새벽의 빛줄기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위드는 복잡한 소설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복잡한 만큼 머리만 아프고 재미는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단순하고 명쾌한,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들을 주롤 읽었다.
판타지난 무협지! 혹은 만화책들이 그 대상이었다.
'책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만화책에서 몇 번 어설프게 봤던 문장이지만, 조각술과 결합이 되자 머릿소에서 한 가지의 계획이 떠올랐다.
'모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동굴을 나온 위드는 우선 큰 바위를 찾았다.
바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만들고자 하는 크기의 바위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 몸집이 커야 한다.'
위드는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높이만 3미터는 됨직한 크기의 바위를 마침내 발견했다.
그런 다음에는 조각술을 펼쳐야 했다.
슥슥!
자하브의 조각칼이 바위를 가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이 지나자 일반적인 조각상과는 많이 다른 괴상한 형태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드가 장기로 하는 서윤을 닮은 미인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떤 고정된 사물을 조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
호전적이고 욕심 많은 종족.
오크!
그러나 위드는 조각술을 펼치면서 고민에 빠져 들었다.
'오크들은 욕심이 많다고 하지. 그런데 대체 그 욕심을 이해할 수가 없군. 무슨 욕심을 그렇게 갖는 것이지?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에 욕심 많고 이기적으로 활동하는 생명체라니, 그리고 과도한 집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어.'
조각술을 완벽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했다.
위드는 도무지 오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인 이상 오크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녕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조각상은 무난한 오크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충 모범적인 오크의 형상으로 말이다.
각종 몬스터들을 조각하면서 오크 또한 조각해 본 적이 있는 만큼 당시의 기억을 충실하게 되살렸다.
무난하고 평범한 조각상.
어딘가 순하면서도 어눌한 면이 있는 오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코쿤의 방패를 구해 주면서 무려 5골드나 날려 버렸던 대사건! 그때는 그래도 설마 했다.
당시에는 퀘스트에 대한 보상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니 얻은 것은 코쿤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몇 마디와 소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들어간 돈 5골드는 단돈 1쿠퍼도 돌려받지 못했다.
원통해서 쓰러질 것만 같다.
돈!돈!돈!돈!돈!
잃어버린 5골드에 대한 과도한 집착! 욕심! 집념! 갈망! 원한까지!
"으아아아아!"
위드의 조각칼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조각상은 생기를 띄기 시작했다.
오크의 주름진 눈매에 이기심이 어리고, 게걸스럽게 벌리고 있는 입과 돼지 코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기왕이면 조금 더 강인해 보이도록 근육을 크게 하고, 흉터 자국도 확살하게 새기자!'
완전한 전투형 오크 조각상.
특별한 이미지 설정을 위하여 이빨도 크고 두껍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입도 크도 코도 흉측하며, 눈가에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오크 조각상이 탄생되었다.
얼굴은 차마 마귀도 저리 가라 할 정도라서 눈 뜨고 보기가 힘들며, 몸은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데 일반적인 오크보다 최소한 2할 정도 컸다.
띠링!
걸작! 괴물 오크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예술가는 절대로 만들지 못할 조각상!
뛰어난 손재주로 완성이 되었지만, 차마 빛을 보지 않고 사장되는 쪽이 나을 것 같다.
예술적 가치 : 1.
특수 옵션 : 오크 조각상을 바라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 루 동안 5% 증가하나.
이동 속도 15% 상승.
지력 10하락.
매력 200하락.
힘 20증가.
민첩 10증가.
카리스마 60증가.
통솔력 50증가.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 수 있다.
담력이 낮은 이들은 이 오크 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하게 위축된다.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걸작의 숫자 : 6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46올랐습니다.
-투지가 1 상승하셨습니다.
-지구력이 3 상승하셨습니다.
-카리스마가 3 상승하셨습니다.
-인내력이 5 상승하셨습니다.
일단 오크 상은 완성되었다.
예술적 가치가 낮은 것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위드는 그나마 실패작이 나오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사실 그가 만들기 했지만 차마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오크였다. 조각상을 정면에서 보고 있자니 그냥 이유 불문하고 한 대 치고 싶다!
당장이라도 조각 파괴술로 산산조각을 내 버리고 싶다.
'어쨋든 내 새끼처럼 공들여서 만든 것이니. . . . . . .'
위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정을 가지려고 해도 이놈의 조각상만큼은 적응이 안된다.
위드는 조각 파괴술을 사용하는 대신에 다른 스킬을 시전했다.
최초로 사용하는 다론의 조각술! 그 비술!
"조각 변신술!"
-조각 변신술을 사용합니다.
조각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그 조각품과 조각사가 서로 닮게 만든다!
위드의 형상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키가 점점 커지고 울퉁불퉁한 근육이 생겨난다. 털이 자라서 몸을 덮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는 완전한 오크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손등과 발등까지도 완벽한 오크였다.
키가 부쩍 자라서 눈높이가 달라졌다. 팔다리의 굵기도 다르고 뱃살도 두둑하게 나왔다.
"성공한 건가? 취이익!"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발음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크들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취이익,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거, 취익! 이상하군. 취치치치이익!"
위드는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이빨이 너무 커서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몸의 형태가 바뀌면서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을 상당수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신 철갑옷이나 중갑옷을 입으실 수 있습니다.
종족이나 형태에 따라 필요한 장비를 새로 구하십시오.
-조각 변신술의 영향으로 힘과 민첩이 약간 증가합니다.
지력과 지혜가 최저 수준으로 하락합니다.
예술 스탯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카리스마가 대폭 상승합니다.
조각 변신술이 풀릴 때까지 유효합니다.
캐릭터 정보창을 확인해 보니 힘과 민첩, 생명력들이 늘어난 반면에 다른 스탯들은 조금씩 줄어 있었다. 특히 예술이나 지혜쪽의 타격이 컸다.
그 외에도 망토와 검을 제외한 갑옷 및 장갑은 전부 착용 할수 없게 되었다.
"변신 상태에서는, 최익! 쓸 수 없게 된 것인가? 취이이!"
종족 자체가 달라진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터벅터벅.
위드는 익숙하지 않은 걸음으로 오크들로 가득한 유로키나 산맥을 올랐다.
뒤뚱뒤뚱 오리처럼 걷는 걸음이었지만, 워낙에 키가 커서 금세 산을 오를 수 있었다.
단순 무식 오크 카리취!
산에는 엄청나게 많은 오크들이 잇었다.
오크 정찰병들.
오크 투사들.
오크 워리어들.
과거에 여러 종류의 오크들을 잡아 본 위드였지만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체가 발각되면 끝장이다.'
산을 오르는 위드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전투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도 오크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답이 없다.
보통의 평범한 오크들.
로자임 왕국에 많이 있는 레벨 80에서 130 정도의 약한 오크들이라면 어떻게 도주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절마의 평원에 있는 오크들은 강했다.
약체로 분류되는 몬스터들인 고블린이나 코볼트라고 해도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전투력에 차이가 있다.
이곳의 오크들은 태어나자마자 생존경쟁을 시작하고, 강한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인다. 그때문에 평범한 오크들보다 훨씬 강하다.
무엇보다도 그 어마어만한 개체 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혹 도망친다고 해도 수만의 오크들이 추격해 올 것이다.
평원에서 오크 떼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험만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산을 올라가는 위드.
"취익!"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오크 투사 1마리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레벨 210의 오크투사!
웬만한 기사들도 눈 아래로 보면서, 다수의 오크를 부리는 일종의 대장 몬스터.
"췩!"
위드를 발견한 오크 투사는 그렇지 않아도 우락부락한 눈을 부릅떳다.
'큰일이다.'
오크 투사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걸 본 위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들키면 안 되는데. . . . . . .'
위드는 우선 웃기로 했다.
미소야말로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씨익!
위드는 특제 썩은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런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얼굴 때문에 양 미간이 움츠러들고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흉측하게 튀어나온 이빨들이 더욱 돌출되어 보였다.
그 순간!
오크 투사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췩!췩!췩!췩!췩!"
공포에 질려 버린 오크 투사!
외모만으로도 오크 투사를 압도해 버린 위드였다.
"앞으로 조심해라. 취이익!"
"알겠다. 췩. 췩. 췩!"
그런 일은 산을 올라가며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위드의 가공할 만한 덩치와 외모에 오크들은 모두 움츠러 들었다.
그러면 차에 오크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다, 다, 죽여. 취췻"
"췩! 여긴 우리의 땅."
십수 마리의 오크들이 말을 타고 있는 파이어 자이언트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네를 닮은 초대형 몬스터!
입으로는 연방 불을 내뿜으며 오크들을 핍박한다.
오크들도 열심히 글레이브를 휘둘러 보지만 파이어 자이언트의 단단하 외피를 뚫지 못하고 있었다.
파이어 자이언트는 레벨 280이 넘는 강한 몬스터였다. 이런 몬스터들이 절망의 평원에는 널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직역 중에서도 극도로 위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위드는 잠시 오크들의 전투를 구경했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오크들이 다 죽으면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겠군.'
마침 기존의 방어구나 무기를 쓰지 못해서 거의 빈 몸통이나 다름없는 상태이기에 싸움이 끝나기만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파이어 자이언트의 끈질긴 공격, 몸 전체를 휘두르며 불을 내뿜자 오크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나 둘 오크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오크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위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지. 오크라면 절대 동족들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지 않아.'
위드는 곧 전투에 뛰어들었다.
우선 땅바닥에 떨어진 녹슨 글레이브를 주워 들었다.
"이야합!"
위드는 파이어 자이언트를 향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막 오크 1마리를 통째로 입 안에 넣으려던 놈은 그 공격을 맞고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쿠당탕!
집채만 한 놈이 먼지를 일으키며 나가떨어지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오크로 변하면서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파이어 자이언트는 위드를 명백한 적으로 인식했다.
쿠워어어어!
버둥거리며 일어난 파이어 자이언트는 대번에 위드를 향해 돌격했다. 땅을 박차고 단숨에 뛰어오르는 공격이 아니라, 지네처럼 많은 발을 빨빨 움직이면서 뛰어왔다.
시뻘건 화염을 내뿜으면서 다가오는 적!
위드는 본능적으로 높이 뛰었다. 그리고 착지한 곳은 파이어 자이언트의 머리 위였다.
"조각, 취이익! 검술, 취이익!"
위드는 놈의 머리에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조각 검술은 오크 상태에서도 펼칠 수는 있었지만, 금세 마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지혜나 지식이 턱없이 줄어들면서 마나의 최대치가 감소한 까닭이었다.
대신에 힘이 대폭 상승했다.
위드는 넘쳐 나는 힘으로 글레이브를 내리쳤다.
날이 무딘 글레이브지만, 내려칠 때마다 파이어 자이언트의 몸에 상처를 냈다.
"그워어어어!"
파이어 자이언트는 위드를 떨어뜨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심지어는 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떨어지면 물론 곤란했다. 놈의 몸뚱이 위에서 양발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아래를 공격했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글레이브를 휘두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듯이 보였다.
격력한 움직임 속에서 위드는 한쪽 손으로 놈의 더듬이를 움켜쥐었다.
"죽어, 취이익!"
흔들거리는 만원 버스에서 아무것도 붙잡니 않은 상태로 버티는 것보다 백배는 힘든 일이었지만, 위드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도를 익힌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몸 전체를 다스리는 법!
어떤 상황에서라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굳건한 중심이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힘을 쓸 수 있다.
위드는 파이어 자이언트의 몸에 빈대처럼 붙어서 공격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다른 오크들도 놀고만 있진 않았다.
"우리 편이, 취잇! 도우러 왔다."
"취이익! 어서 싸우자!"
오크들이 글레이브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파이어 자이언트는 화염을 내쏘며 저항했지만, 위드와 오크들의 합공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육중한 거체를 땅에 누이고 말았다.
그 순간 위드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유로키나 산맥의 자이언트를 사냥함으로써 명성이 1올랐습니다.
경험치 획득!
위드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오랜만에 한 사냥에 내지르는 기쁨의 함성.
완전히 전투에 전념하였을 때마다 터트리고 마는 버릇 중의 하나였다.
"취이이이이이아악!"
"취취취!"
오크들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파이어 자이언트의 거체 위에 발을 올리고 있는 위드와 다른 오크들!
겉보기에는 특별히 흉악하고 몸집 큰 오크 1마리와 고만고만한 오크들 여러 마리가 힘을 합쳐 사냥을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사냥을 마쳤을 때에는 잊지 않는 절차가 있었다.
위드는 전리품을 주웠다.
-파이어 자이언트의 등껍데기를 획득하셨습니다.
등껍데기는 가공을 할 경우 다양한 용도의 방어구를 제작 할 수 있는 재료 아이템이었다.
일정한 확률로 속성이 부여되기도 하고, 가볍고 단단해서 제련을 마친 일반 강철보다 훨씬 좋지만 상당히 구하기 힘든 재료에 속했다.
"고맙다, 취익!"
"취치치치칫, 우리들을 구해 줬다."
위드를 향해 오크들이 감사의 인사를 하러 몰려들었다.
위기에서 구해 준 오크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정작위드를 보는 순간 오크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되는 얼굴!
위드의 얼굴은 은인이라고 해도 도저히 그냥 봐줄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오크들이 떠난 것을 보며 위드는 자신감이 생겼다.
"취이익, 너희들끼 이런 놈을 사냥하고 있었나? 취잇, 그러면 날 불러야지. 나는 전투를 좋아한다. 취취취익! 보석과 아이템은 더 좋아하지."
"취이이. 인정한다. 너는 전사. 자랑스러운 오크 전사."
자고로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라고 했다.
싸움을 즐기고 욕심이 많은 오크들은 위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어디서 왔나. 취이익!"
"나도 모른다. 취!"
위드는 슬픈 눈빛으로 저 멀리 평원을 바라보았다.
딴에는 실감 나는 눈빛 연기지만, 겉보기에는 흉악범이 방화나 살인을 추억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1살에 어미와 함께 이 산맥을 떠났다. 췻! 그리고 평원에서 지내다가 이제 돌아왔다. 취이익!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 묻지 마라."
"알겠다, 취익!"
"사냥이나 더 하자. 취이익!"
"나도 좋다. 취!"
위드는 순식간에 오크 무리에 동화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 곳, 어느 세력에 속하더라도 금세 빈대 붙을 수 있다!
눈치 보기와 줄 서기의 달인.
밥 한 끼 얻어먹기, 혹은 지하철 무임승차.
친구들과 지낼 때에는 한 푼도 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여러모로 고생을 하며 살아온 경험들이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 주었다.
"우오오오오!"
"취익, 취익!"
유로키나 산맥 곳곳에는 오크들의 마을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오크들은 위드를 자신들의 마을로 초대했다.
"취이잇! 같이 가자."
"그래도 되는가? 췩! 취익!"
"괜찮다. 우리 가족 많다. 취치칫. 위대한 전사. 취이이익! 좋아한다."
"췩. 고맙다, 친구."
위드는 오크들과 함께 산맥의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인간들의 도시처럼 넓고 거대했다.
성벽이나 성체는 없어도, 크게 지어진 집들에 오크들이 산다. 한 집마다 최소한 10마리씩의 오크들이 사는데, 이러한 집들이 1,000채가 넘는다.
그야말로 오크들의 번식력은 가공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위드가 막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오크 가드들이 저지했다.
"아, 아무나 못들어간다. 취익!"
위드는 조용히 그를 노려봐 주었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취이익."
오크를 닮은 마귀!
지상에서 가장 두려운 얼굴.
완전히 얼굴로 먹고 들어가는 위드였다.
동료 오크들이 금세 위드를 변호해 주었다.
"우리들의 친구다. 취익! 함께 싸웠다. 췩!"
"그, 그래도 안 된다. 췩!"
"취이익. 이름을 밝혀야만. 췩! 들어갈 수 있다."
오크 가드들은 공포에 질려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저지하는 손에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위드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크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한데 정해 놓은 이름이 없었다.
"나는 카리. . . . . 취!"
카리라는 이름을 급조해 낸 위드. 그런데 오크들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카리취! 카리취! 취익. 어서 들어가라."
카리취로 인해한 것이 아닌가.
오크들의 이름에는 취가 붙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것이었군.'
카리나 카리취나 상관할 게 없는 위드로선 전혀 개의치 않고 오크들의 마을로 들어갔다.
"취이익! 싸게 판다."
"췩! 난 더 싸게 판다."
"취잇! 나도 싸게 판다."
오크들의 마을에서는 인간들의 성에서처럼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아이템들을 판매했다.
다양한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물론 잡화점도 존재한다.
대다수는 손재주가 부족한 오크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조약한 수준이었다.
대신에 가격은 끔찍할 정도로 비쌌다.
"췩. 이 금 가고 녹슨 글레이브가, 취이익! 갖고 싶나? 아주 탐나는 물건이지. 6만 골드만 내라. 취익!"
공격력 20에 내구력 10이 남은 글레이브를 6만 골드에 사라니!
이건 완전히 사기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단순 무식한 오크들은 가격만 비싸게 부르면 부자가 되는 줄로 알고, 무조건 비싼 가격만 받으려고 했다.
흔해 빠진 약초가 2만 골드였고, 방어구는 5만 골드.
글레이브 중에 쓸만한 것은 15만 골드가 넘는 경우가 많았다.
위드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취익. 저런 게 진짜 팔리기도 하나?"
"취취취.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취이이. 무식한 놈들."
"취익. 역시 넌 뭔가 다른 오크 같다."
위드의 칭찬을 받은 오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다. 취익! 잘 안 팔리니까 최소한 2백만 골드는 받아야지."
". . . . . . ."
위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더 끔찍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에 있는 암컷 오크들!
인간 기준으로 최악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위드가 이상형이라며 달려든 것이었다.
"억센 팔뚤. 취치취."
"건장한 가슴. 취치치익."
"토끼보다 굵고 단단한 이빨."
"비 오면 목이, 취익! 취익!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코."
"두꺼운 어깨와 근육 덩어리 몸."
"이상형이다. 췩!"
암컷 오크들이 마구 달라붙어서 위드에게 애정 표시를 했다. 얼굴을 부비는 암컷들도 있었고, 팔고 가슴을 어루만지는 암컷들도 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떨리 않을 수 없기 마련!
암컷 오크들의 지나친 애정 공세에 위드는 이 자리를 벗어 나고 싶었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암컷이라지만 오크들이 떼거지로 덤벼들다니.
"이, 이들이 왜 이러나. 취익!"
"여자들은 강한 수컷을 좋아한다.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취익!"
수컷 오크들은 암컷들의 사랑을 받는 위드를 부러워했다.
위드는 오크들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두 가지 고생을 했다.
첫 번째는 암컷 오크들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구애를 하는 오크들.
미성년자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위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 20살이 넘어서 공식적인 성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인에게는 성인만의 서비스가 제공된다.
그것은 바로 밤일이었다.
성인들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그것!
그렇지만 오크와 동침을 하고 싶은 남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위드는 특히 그랬다.
'동정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어!'
암컷 오크들을 피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
두 번째 고생은 음식이었다.
오크들은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음식을 마구 퍼먹었다.
다양한 요리 스킬을 익히면서 어느새 미식가가 된 위드로선 오크들이 먹는 요리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맛없는 보리빵이라도 원 없이 먹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한 고생을 끝내고 사냥을 나갈 때에는 위드가 가정 먼저 앞장을 섰다.
글레이브를 높이 들고 행군을 한다.
"취익! 여기서 적의 냄새가 난다."
그리고 조우하게 된 미노타우로스 로드!
미노타우로스 로드가 오크들을 향해 흉험한 핏핓 도끼를 휘두른다.
그렇지만 위드는 그 기세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크워워워워!"
글레이브를 휘드르며 돌진하는 위드.
단순 무식하고, 과격하고, 무자비했다.
"다, 다, 다, 다 덤벼. 취이이이이이잇!"
윤정희는 매일 밤마다 로열 로드에 접속하고 있었다.
소환사인 그녀의 게임 속 이름은 세이링.
하프 요정으로, 드워프만큼이나 키가 작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대와의 약속에 따라 이곳에 나타나서 저를 도와주세요. 소환, 바실리스크!"
소환 주문을 외우자, 마나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바실리스크가 3마리나 나타났다.
도마뱀을 닮은 몬스터.
독을 품고 있고 방어력이 좋은 편이라서 사냥할 때 주로 소환하는 몬스터였다.
바실리스크가 나타나자 흑기사 둘과 싸우고 있던 파티는 훨씬 유리하게 전부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마지막은 여자 도둑이 흑기사의 뒤에서 칼질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휴! 겨우 이겼다."
여자 도둑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세이링에게 다가왔다.
"언니, 수고했어."
"너도 수고했어, 라미야."
세이링과 라미.
그녀들은 3살 터울의 자매였다.
"휴우, 이제 한동안은 쉬겠네."
"아마도, 마나부터 가득 채워야 하니까."
그녀들이 사냥을 하는 장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던전. 그들이 최초 발견자였다.
두 자매 모두 상당히 레벨이 높았고, 파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를 채우는 휴식 시간.
두 자매는 수다를 떨었다.
"참! 그때 우리 학교 축제에 나타났던 사람 말이야. 이른은 이현. 내 친구 혜연이의 오빠래. 그 사람 언니와 같은 동기였지?"
세이링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맞아."
"혹시 알고 있었어?"
"응. 알고 있었지. 여동생을 만나 보기도 했는걸."
"그랬구나. 어라? 언니 평소에는 남자에 대해서 별로 반응이 없었잖아. 유명한 남자 연예인에도 시큰둥하고, 연예도 안 해 보고 말이야."
"관심이 없으니까."
"그 남자한테는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이야."
세이링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자 더욱 집요해진 라미였다.
"혹시. . . . . . 언니가 좋안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
"그래."
"어라. 언니의 이상형이 그런 쪽이라니 의외네. 운동 잘 하는 사람이 그렇게 좋았어?"
라미는 공주 세트에서 3개의 관문을 돌파하던 이현을 잊지 못했다.
누구라도 직접 그런 광경을 본다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빠르고 정확하게 관문을 돌파하던 모습, 발 차기로 풍선들을 나리는 마술과도 같은 장면들.
"운동을 잘하거난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어. 난 현이가 그렇게 운동을 잘하는지 몰랐어."
"그러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이류가 뭐야?"
라미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운동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을까? 얼굴이나 키도 평범하고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고등학교도 중퇴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아주 가정적이거든. 가족을 최수선으로 생각하고 아껴줘.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직업이 뭐에요?"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백수입니다."
"에게. 대학도 안 가셨어요?"
"대학이야 입학했지만 별로 재미도 없고. . . . . 때려치울 작정입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 . . 그런 우울한 얘기는 숨기지 그랬어요. 그러면 됐을 텐데."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다른 방에 가서 다른 남자와 부킹을 이어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진 남자의 말이 그녀를 붙들었다.
"대학은 나와서 뭐 하겠습니까. 어차피 아버지 회사에 취직할 텐데요."
"아, 아버지 회사요?"
여자는 갑자기 남자에 대한 호감도가 증가함을 느꼈다.
그녀는 오늘 나이트에 온 여성들 가운데에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예. 뭐, 그냥 조그만 회사입니다."
"회사가 얼마나 작은데요."
"직원수는 뭐 조그만 소도시 정도밖에 안 되고요."
" . . . . . . ."
"매출액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것도 뭐 작은 도시 정도?"
". . . . . . !"
여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의 복장을 살펴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걸치고 있는 건 죄다 명품이잖아. 국내에 수입도 잘 안 되는 저 구두는 손님을 가려서 예약제로 판매한다는 제품.'
그때 남자가 핸드폰을 내민다.
"연라처 좀 찍어 주세요."
"저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알아요. 그러니까 더 자주 연락하고 보고 싶고 그래요."
남자는 어렵지 않게 연락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가고 난 뒤에, 룸 안에 있던 남자들은 조그만 탄성을 질렀다.
"역시 지훈이야."
"이번에도 5분을 넘기지 않았네."
이번에 룸에 들어왔던 여자는 미모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근래에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웨이터의 소개가 없더라도, 룸 안에 있던 남자들을 전부 늑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최지훈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여자인걸.'
주변에서는 대단하게 여기고 있지만, 실상 그 주인공 최지훈은 무료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돈이 많다는 것은, 그 돈을 관리할 능력을 필요로 하는 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계획대로 움직이는 삶을 살아왔다.
후계자 수업으로 마음대로 친구도 사귀지 못했으며, 취미나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로봇처럼 움직이고 배울 뿐.
학교에 다니면서 한참 친구들과 친해질 시기에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삶이 없다. 그저 계획대로 맞춰 나가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니 삶으 지루하고 따분할 수 밖에 없었다. 해서 안 되는 일만 너무도 많은 인생이었다.
그러던 차에 조금 시간이 생겨서 로열 로드를 시작했다.
이 현실이 아닌 곳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저 먼 곳으로 흐르는 강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느 게 좋아서 낚시꾼이 되었다.
물고기를 잡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휴시을 취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었다.
남들은 죽어라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장만할 때 그는 낚시만 연마했다.
어느새 그의 낚시 스킬은 고급 3레벨이 되었다.
로열 로드 최고의 낚시꾼.
그렇지만 최지훈은 그저 낚시가 좋아서 낚시를 할 뿐이었다.
주변과의 교류도 없었으니 다들 그를 그저 과묵하고 우수에 젖은 낚시꾼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낚시는 그래서 좋았다.
흐르는 강물에 모든 것을 떠내려 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낚시 스킬을 익히기 위해서 그의 명당자리를 탐내는 이였다.
모든 것을 돈과 관련시키는 사람.
삶 자체가 치열한 투쟁의 연속인 사람.
그의 이름은 위드였다.
최지훈은 그가 낚시를 하던 도중에 환하게 웃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드문 확률로, 물고기의 배속에서 1쿠퍼짜리 동전이 나올 때였다.
푼돈에도 집착하는 위드.
위드와의 낚시 대결은 재미있었다.
어느새 최지훈도 몰입해서 대결을 하고 있었다.
물고기 1마리를 건져 올리 때마다 긴장과 흥분으로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이 정도의 쾌감을 맛보았던 것이 언제이던가.
최지훈은 이드가 좋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 은근히 위드의 주변을 맴돌았다.
오데인 요새에서는 함께 공성전을 치렀고, 바스라 마굴에서는 같이 사냥을 했다.
위드가 마굴로 향한 것을 알자 먼저 사냥을 하던 파티에 뇌물을 바치고 급하게 합류했던 것이다.
"나 먼저 간다. 그리고 당분간은 찾지 마."
최추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이트를 나왔다.
밤공기는 시원했다.
하지만 그는 더 즐거운 장소를 알고 있었다.
로열 로드.
모험이 살아 숨 쉬는 곳ㅇ.
그의 닉네임은 제피였다.
이 세상에 언어는 없어요.
단지 우리는 의미 없는 웅얼 거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죠.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저는 듣지 못하고 있으니.
흐느끼는 듯한 음성.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감미롭게.
그녀는 피아노를 치며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어떤 몸짓도 허용되 않아요.
대화는 존재하지도 않아요.
오로지 할 수 잇는 것은 눈빛뿐.
당신의 눈빛을 내게 보여주세요.
간절함. 안타까움. 애절함. 분노. 실망 염원. 친근함. 사랑.
이 모든 감정을 눈빛으로 표현해 주세요.
밥을 먹을 때에는 무엇을 고를지.
맛있게 먹었는지.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두 눈빛으로 말해주세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마음을 읽어 나가죠.
어떤 오해와 왜곡도 없는 세상.
그대의 눈빛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볼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해요.
그래도 우린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죠.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디어다로 저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저 또한 그럴지도 모르니까요.
눈빛을 본다는 건 정확하지 않은 모호함.
감동 없는 말이 아니라. 행복을 비춰주세요.
그대의 눈동자에 내가 보이도록.
잠시라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말아요.
눈빛 한 번에, 마음 한 번.
그렇게 마음을 비춰주세요.
당신의 빛나는 눈동자가 가깝다면 더욱 좋겠네요.
딱딱한 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 못한다면,
그때 저는 눈빛으로 말하고 싶어요.
눈빛이야말로, 고막을 통해 들리는 음성보다도
훨씬 당신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갈 테니까요.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무엇을 전할 수 있을 거예요.
눈빛으로 말하기.
저는 당신의 눈빛을 보고 싶네요.
정효린은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그녀의 데뷔곡인 <눈빛 대화>를 부르고 있었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노래를 들었다.
다정하면서 촉촉한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노래에 한없이 빠져 들게 만들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마치 천국에 온 것만 같다. 첫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순수한 마음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정효린의 노래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처음 데뷔했을 때에는 노래를 아주 잘하는 가수로 알려졌지만, 그다음부터는 팔색조처럼 자신의 다양한 매력을 발산했다.
춤과 노래, 그리고 화려한 무대 매너.
좌중을 휘어 감으며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의 폭발적인 에너지.
무대를 압도하는 환희!
전율을 일으키는 그녀의 손짓이냐 표정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매혹적인 그녀의 춤동작은 브라운관을 통해서 수천수만명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음악을 위해 태어난 요정.
매스컴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절대적인 무대의 요정인 그녀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다시 로열 로드에 접속을 했다.
'이제부터는 광렙이다. 무조건 새로운 댄스를 익히고 말거야.'
로열 로드에서 그녀의 직업은 댄서였다.
타고난 노래 실력으로 바드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춤을 추길 원했다.
'모험을 하고 싶어. 앉아서 노래만 부를 수는 없어. 몬스터를 때리는 손맛을 무시할 순 없잖아!'
사람들은 그녀를 우아하고 순수한 요정으로 본다.
그렇지만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왈가닥 기질도 상당했다.
바드라고 물론 공격을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직접몸을 움직이는 댄서에 비해서는 조금 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춤은 다양하게 출 수 있기에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노래는 그럴 수 없다.
언제나 혼신을 다한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바드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로열 로드!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가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외모와 몸매도 조금씩 나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모험을 해 보죠!"
"맞아요. 그동안 사냥만 하느라 너무 지겨웠어요."
"피라미드 만드는 것도 그랬고요."
피라미드 건축을 위해 혹사당한 이들.
제피와 화령, 마판, 페일, 수르카, 이리엔, 로뮤나 그리고 메이런까지.
그들은 피라미드가 완공된 이후로 함께 몰려다니면서 사냥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의 직업은 다양했지만, 생산직과 같은 잘 선택받지 않은 직업들이 많아 전투에 적합하진 않았다. 당장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줄 만한 직업인 워리어나 팔라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직업들은 곧 임기응변식으로 그때그때 대응했다.
생명력이 남달리 높은 제피와 몽크인 수르카가 몬스터와의 직접 전투를 전담했다.
때론 위험한 경우가 없지도 않지만, 너무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오면 화령이 이들을 잠재웠다. 아군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춤을 춰 준 것도 물론이었다.
궁수와 레인저인 페일과 메이런이 활을 쏘고, 로뮤나는 마법 공격을 했다. 성직자인 이리엔은 신성 마법을 펼쳐서 체력이 줄어든 이들을 보조해 주고, 축복해 주었다.
상인인 마판조차도 할 일이 있었다.
그가 2차 전직을 하면서 습득한 행운의 손길이라는 스킬은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돈과 아이템의 비율을 일정 부분 늘려 준다.
또한 사냥 즉시 바로바로 잡템을 처분해 주었으니 쓸모가 없는 인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이번엔 어디로 갈까요?"
페일이 운을 띄우자, 평소에 그리 말이 없던 이리엔이 바로 나섰다.
"저번에 찾아낸 정령의 호수로 가 봐요!"
"거긴 아직 조금 무리가 아닐까요?"
정령의 호수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발견하게 된 장소였다.
그것도 페일의 아버지가 직접 발견한 장소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호수에 도착한 페일의 아버지.
"어허, 경치 참 좋다! 물도 맑네."
아버지는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어졌다.
자고로 한국인이라면 어느 계곡에 가든지 발 담그고 목욕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수영을 하며 놀던 도중에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 걸 찾아냈다.
그것을 페일이나 이리엔 등에게 얘기해 준 건데, 당시 그들은 레벨 130도 못 된 수준.
시체만 남기고 처절하게 퇴각을 해야 했다.
정령의 호수에 어떤 퀘스트,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대체로 숨겨진 던전에는 사연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괜찮은 걸에요. 우리들도 많이 강해졌잖아요."
"음. 그렇긴 한데. . . . . ."
"한번 가 보죠!"
모험을 원하는 일행은 정령의 호수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움직였다.
위드를 보고 배워서 철저한 준비, 식량에서부터 약초까지 모든 걸 장만한 이후였다.
이혜연은 믿을 수 없었다.
한국 대학교에서 1찰 서류 합격 통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비록 1차 서류 합격이니 아직 면접의 관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합격할 가능성이 절반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잘됐다, 정말!"
이혜연은 합격 통지서를 보며 기뻐했다.
그녀가 대학에 갈 돈은 과외나 장학금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이현만 대학에 보내면 된다.
그런데 정작 이현에게 면접을 보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야기를 한다 해도, 이현은 대번에 돈이 아깝다고 면접도 보지 않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