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드워프 왕국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교수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강의실에는 맥이 풀린 학생들만 남았다.
"휴우."
"겨우 끝냈네."
가상현실 기술에 대한 쪽지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시험공부에 시달린 학생들이 책상 위에 엎어졌다.
이현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남들이 알면 경악할 만한 생각을 했다.
'기초적인 내용들이라 참 편하군.'
예전에 독학으로 깨쳤던 내용들을 다시 배우려고 하니 학비가 아까워질 지경이다.
죽기 살기로 가상현실의 원리와 발전 가능성, 현실에서의 운동신경 반영에 대해 공부했다. 그 밑천이 남아있어서 벼락치기를 하지 않고서도 답안을 쉽게 적어 낸 것이다.
이미 베르사 대륙의 수많은 역사와 영웅, 마을의 위치, 아이템, 마법과 기술 등을 외웠는데, 이에 비하면 쪽지 시험은 눈 감고도 쓸수 있을 수준.
"시험도 끝났는데 우리 로열로드나 하러 갈래?"
민소라가 놀고 싶었는지 먼저 제안을 했다.
최상준도 기껍게 받아들였다.
"캡술방에 가자는 생각이면 난 찬성이야. 단골 캡슐방이 있는데, 그곳으로 갈까?"
로열로드를 할수 있는 캡슐방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다. 대학가에도 많이 있으니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자는 이야기.
이유정이 말했다.
"그보다 우리 모험과가상현실 수업 과제도 해야 되잖아."
"윽! 시험이 끝났다고 좋아했더니 과제가 남아 있었구나."
모험과가상현실에서는 로열로드 내에서 실제 던전을 탐험하라는 과제를 내 주었다.
7명 씩 팀을 이루어서 하는 탐험의 기한은 2개월!
중간시험을 대체하는 것으로, 베르사 대륙의 각 지역에 흩어져 있을 테니 모이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감안을 해 준 것이다.
이현은 C조 였다.
"어쨌든 일단 캡슐방부터 가자. 나머지는 나중에 정하도록 하고."
최상준의 의견에 학교 친구들이 가방을 챙겨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난 바쁜 일이 있어서...."
이현은 그 자리를 빠지려고 했지만, 민소라가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오빠도 우리랑 같은 조잖아요. 그리고 한번도 같이 캡슐방에 간 적이 없는데.... 오늘은 꼭 같이 가요."
"맞아요. 같은 조라면 손발도 맞아야 편한데. 오늘은 같이 캡슐방이라도 가요."
이현은 캡슐방이 지옥처럼 가기 싫었다.
비싼 로열로드를 하면서 돈까지 내야하는 장소!
집에서 얼마든 접속할수 있는데 캡슐방에서 로열로드를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었다.
대학교 앞이라 쉬는 시간을 틈타서 놀러 온 학생들로 캡슐방은 북적이고 있었다.
"자리 주세요 7명 이에요."
"오늘도 오셨네요. 로열로드 하실거죠?"
카운터의 아르바이트 생이 묻자, 최상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늘 쓰던 캡슐 자리 있죠?"
"지금 비어 있습니다. 그쪽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예."
수업이 빌 때마다, 때로는 수업마저 땡땡이치고 로열로드에 빠져 있다는 증거였다.
민소라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출석도 나쁘고, 이러니 만날 시험 점수가 엉망이지.'
친구들은 한심하다는 듯이 최상준을 보았지만, 이현의 생각은 달랐다.
'부럽다.'
단골 캡슐방!
캡슐방의 요금은 1시간에 5,000원이나 된다.
캡슐 자체의 가격이 너무나도 비쌌으므로 이 정도는 받아야 수지타산이 맞았다.
그런 캡슐방의 단골이 될수 있다니, 용돈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한단 말인가.
'역시 가진놈들은 달라.'
두둑한 배짱과 포부에 감탄했다.
캡슐방에는 특별한 용도의 캡슐들이 있다. 캡슐방 내에 있는 메인 스크린으로 자신의 플레이 영상을 띄울수 있는 것이다.
흑사자 길드의 최상준은 곧잘 자신의 영상들을 공개했고, 그 덕에 캡슐방에서 모르는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우오오오!"
"새로운 갑옷이다."
최상준이 접속하고, 그 영상이 화면에 나오자 감탄사들이 줄을 이었다.
"물의 정령 갑옷. 레벨 제한 280에 시세만 140만 원이 넘는 물건이라니...."
일반적으로 상위 유저들이 많이 착용하는 갑옷이라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유정과 민소라도 잠시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상준이가 있으니 던전 탐험 과제는 쉽게 해결할수 있겠지.'
'다행이다. 우리는 느긋하게 준비해도 될 것 같아.'
이유정은 레벨 200대의 검사였지만, 민소라는 전투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인챈터인 탓에 불안했다. 그러나 든든한 최상준을 보면서 안도하는 것이다.
이현에게도 아르바이트 생이 다가왔다.
"로열로드 하실 거죠?"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캡슐로 안내해 주세요."
돈이 나가는 것은 아깝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도 미련한 짓.
돈이야 쓰는 이상으로 벌면 되니 로열로드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유정과 민소라도 바로 옆의 캡슐이었다.
"그럼 오빠, 나중에 봐요."
"즐거운 로열로드 하세요."
캡슐방에 온 이상 시간이 돈!
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에 캡슐로 들어갔다.
위드가 접속했을 때에 모라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초보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무리가 사냥 파티를 구하고 퀘스트를 하기 위해 뭉치는 중이었다.
"레벨 1. 무직들 모입시다."
누군가 손을 들면, 그곳으로 십수명이 우르를 쏠린다.
"토끼 잡으실 분!"
이번엔 초보자들이 100도 넘게 모였다.
남녀노소 가릴것이 없었다.
향후 상인을 꿈꾸는 듯, 전사의 복장을 하고 있지 않은 이들도 뭉쳐서 당당히 성문을 넘었다.
"야영을 하기 위해서는 모닥불을 피워야 될 텐데... 부싯돌 있는 분?"
"우리의 전력이라면 늑대도 잡을수 있을 것입니다."
초보자들이라고 해도 모이니 무시무시하다.
100명이 넘는 초보자 패거리!
하나도 아니고 10개가 넘는 파티를 구성한 초보자들이 신바람을 내며 마을 앞에서 사냥을 한다.
위드가 영주로서 내정을 시작한 지도 현실의 시간으로 어느덧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바로 드워프 왕국을 향해 떠날 작정이었지만, 그동안 병사들을 훈련시키느라 조금 늦었던 것이다.
"벤, 스탐, 유프레."
"넷, 영주님!"
병사들이 절도 있게 위드를 향해 경례를 올린다.
"너희가 다른 병사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영주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병사들의 눈빛은 굳건했고, 신뢰감을 줄수 있을 정도였다.
위드는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4주일간, 이 병사들과 함께 사냥을 다녔다.
사냥이라고 해도 변변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앞에서 여우나 토끼들을 잡다가 늑대를 잡고, 나중에는 쉬운 던전들을 함께 다닌 정도에 불과했다.
코볼트, 로그, 사자, 스켈레톤, 구울 들이 있는 기본적인 던전.
그곳에서 위드는 절대적인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선량한 주민들을 위하여 검을 뽑고 난 후에는 망설이지 마라."
"넷!"
"달려라. 육체를 쉬게 만들지 마! 몬스터들으 많이 사냥해야 마을이 안전해 질수 있음을 명심해야 된다."
위드는 쉬지 않는 사냥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다녔다.
과거처럼 붕대를 감아 주고 요리를 해다 바치면서 병사들의 신뢰를 얻는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
"코볼트는 이렇게 베어버리는 것이다."
위드가 조각 검술을 사용해 날카롭게 허리를 베어 버렸을 때, 코볼트는 그대로 회색빛으로 변했다.
레벨 300이 넘으면서 하는 힘자랑!
"우와!"
"과연 영주님이시다!"
"저만하면 기사중의 기사라고 할 만하지."
현실적으로 막 징집된 기사들의 레벨은 10 밖에 안 되었다.
병사들의 성향 자체가 영주에게 충성하고 강한 무력을 존경하였으니, 신뢰를 얻는 데에는 충분하다고 할수 있다.
"무기가 상한 것 같군. 검 관리를 그렇게 밖에 못하나?"
위드가 한마디씩 던지자, 병사들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리 줘 봐라."
그렇게 가끔 검을 한 번씩 수리해 주고, 죽기 직전의 병사들에게만 붕대를 넉넉하게 감아 주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초롱초롱!
'우리의 영주님은 못하는 게 없으시다.'
'마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병사가 된 것은 훌륭한 판단 이었어.'
충성심이 금세 100까지 오른 것이다.
벤, 스탐, 유프레는 성장이 빠른 편으로, 첫 주에 레벨이 30대가 되어 십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위드의 쾌속 사냥 방법.
이동하는 경로도 단축시키고, 휴식시간도 줄였다.
창병, 검병, 방패병, 궁수 들의 조합을 이용해 사냥 속도까지 단축시킴으로써 이룬 결과였다.
두 번째 주.
위드는 병사들을 이끌고 던전의 더욱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밤에 야영을 할 때에도 몰려드는 몬스터들.
그래 봐야 위드에게는 식후의 간식거리도 되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막앗!"
"스켈레톤이 너무 세다."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 본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야!"
병사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위드는 유유자적 재봉을 했다. 마판이 가져다 준 천을 이어 옷을 만드는 부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경은 병사들로 부터 완전히 거두지 않아, 위험한 순간에는 즉각 개입했다.
필요할 때는 검을 들고 뛰어들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휘만 했다.
"검병, 창병, 후방으로. 휴식을 취하라. 방패병, 진형을 형성하고 적을 밀어낸다. 궁병, 은을 도금한 화살을 쏘아라!"
위드는 병사들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죽지 않게 애썼다. 싸우기 전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승부였지만 간신히 이겨내도록 만들었다.
빛의 탑의 효과와 프레야 교단의 사제들의 축복까지 받아 평상시보다 훨씬 강해진 후의 사냥이라 성장이 더빠르다.
"돌진! 쉴 틈이 없다. 싸워라. 적들을 다 죽인 이후에 1분간 쉰다."
위드는 사자후까지 써 가면서 병사들을 다그쳤다.
병사들이 강해질수록 훈련의 강도도 덩달아서 더욱 높아진다.
그런 식으로 4주가 지났을 때에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어엿한 병사들이 되었다.
벤과 스탐, 유프레는 레벨 60이 넘어, 전투에 대해서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수 있게 되었다.
백부장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모라타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사들이 필요하다. 앞으로 너희가 병사들의 모범이 되어주길 바란다."
"넷!"
4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나서 위드는 일장 연설을 했다.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 혹독한 지옥 훈련을 거치고 나니 전투를 조금쯤은 할 줄 알게 된 병사들이다.
덤으로 얻은 효과도 있었다.
- 숙련된 교관의 권위.
모라타 영주 위드로부터 직접 훈련받은 병사들은 그의 위엄과 지도력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게 됩니다.
통솔의 효과가 영구적으로 3% 오르게 됩니다.
"동료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라. 동료들이 있기에 너희가 그리고 마을이 안전한 것이다."
"넷! 영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위드는 그 후로 1,000명의 병사들을 추가로 뽑도록 지새했다. 모라타의 면적이 워낙 넓으니 더 많은 병사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상업에만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빠르게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이제 군사력에도 투자할 때가 되었다.
모라타의 영토가 로자임 왕국의 절반 정도는 되었으니 병사들이 많아야 했다.
치안을 유지시키는 것도 영주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기술을 개발시키고 주택을 늘리고, 농작물과 산업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과감한 투자들이 조금 줄어들게 된다.
그래도 세금은 날로 늘어날 테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 세율을 조정해서 한꺼번에 착취를 하는 악덕 영주의 꿈이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위드는 지난 4주간 모라타에서 있었던 추억을 뒤로 한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으로 이동했다.
"와일아, 와둘아, 와삼아!"
그가 조각해서 생명을 불어넣은 와이번들을 부르는 것이었다.
저 멀리 모라타의 산들너머로 6개의 점들이 생겨났다. 그 점들은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와일이의 등에는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금인이도 타고 있었다.
위드는 그들의 위풍당당한 자태를 보며 감격했다.
"모두 무사했구나!"
금고에 넣어 둔 돈이 멀쩡한 것을 보며 안도하는 모습!
와이번들은 지상에 내려서자 마자 뒤뚱거리며 다가와친근하게 몸을 비볐다.
"주인, 반갑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토둠에 있는 동안 위드의 통솔력과 카리스마는 큰 성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번들에게는 부모와도 같은 존재!
생명을 부여한 부모와 다름이 없다 보니 친근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 살이 좀 찐것 같다."
"꺄룩?"
외이번들이 두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알수 없다는 태도.
실제로 한떄는 날기도 힘들정도로 살이 찌고 게을러졌었다. 지상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먹잇감을 사냥했다.
그러다 북부의 추위가 물러가면서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활동하게 되자, 와이번들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먹잇감들이 만만치 않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해.'
와이번들은 본래의 성향태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본연의 특기인 공중전을 펼치고, 금인이는 화살을 쏘았다.
북부의 몬스터들이 강해지면서부터, 그들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위하여 싸웠다.
모라타 일대의 영역!
매일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최초로 생명을 부여받을 때는 323정도의 레벨을 갖고 태어났다.
불사의 군단과의 전투, 북부 원정, 본 드래곤과의 전투!
위드가 경험한 대부분의 전투를 함께하면서 레벨도 360대가 되도록 성장했다.
날개에는 윤기가 흐르고, 등은 넙적하게 벌어졌다. 몸은 상처투성이 였지만 늠름하기 짝이 없었다.
"뭐 그래도 심하게 살이 찐 편은 아니로군. 내가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위드는 와이번들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에 오래된 중고 붕대를 정성스럽게 감아 주었다.
"꺅꺅꺅!"
와이번들이 경망스럽게 고맙다고 몸을 비벼댔다.
북부의 추위를 참아내기 위해 늑대 가죽으로 만들어 주었던 옷들은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다른 비행 몬스터들이 아무런 방어구를 걸치지 않은 것에 비해서, 늑대 가죽 옷이라도 걸친 효과는 상당했다. 규모가 다른 공중 몬스터들과의 영역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쥘수 있도록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위드는 늑대 가죽들을 수거하면서 유통기한이 상당히 지난 말고기도 던져 줬다.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많이 먹어라."
위드의 귀환을 반가워하던 와이번들로서는 환희의 극치!
돌아오자마자 구박하고 때릴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잘해 주는 것이다.
'주인도 이제는 인간 됐구나.'
'알고보니 그렇게 막돼먹은 주인은 아니었어.'
와이번들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했음이 느껴졌다.
와삼이는 뒤돌아 서서 등을 내밀었다.
"주인, 혹시 타고 싶다면 내 등에 타라. 어기 가 보고 싶은 곳은 없나?"
"갈 곳 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군."
위드가 냉큼 와삼이의 등에 올라탔다.
"목표는 남쪽. 이제 즐거운 여행 시간이다!"
와이번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위드는 하늘로 높이 올라 갔다.
해가 저물고 난 뒤의 하늘, 별들이 빛을 뿌리는 밤하늘을 난다.
쿠르릉- 콰과광! 쾅쾅!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지역에서는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떨어지기도 했다.
차가운 빗방울들이 위드와 와이번들의 몸을 흠뻑 적셨다.
그 빗방울들은 하염없이 아래로 향해서, 불을 밝히고 있는 이름모를 마을과 성으로 떨어진다.
무성한 잡초들이 바람에 몸을누이고, 빗물이 강물 위로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불어난 강물이 이리저리 범람하는 장소에는 낚시꾼들이 있었다.
전사나 사냥꾼 파티, 모험가들이 넓은 평원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도 보였다.
한 땀. 한 땀.
위드는 와이번의 등에 앉아 바느질을 했다.
찢어진 늑대 가죽을 재활용 하여 와이번들의 누더기 옷을 새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대자연의 장관 속에서, 멋진 풍경에서 노가다를 할 때의 낭만!
위드만이 이해할수 있는 감정이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노가타를 하며 개수를 채워 나갈때의 기쁨! 10대에 인형 눈알을 붙이면서 깨달은 즐거움이지. 이렇게 높은 하늘에서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지는군. 이럴 때의 노가다란, 정말 시간가는줄을 모르겠다니까.'
천부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후천적으로 완성되어, 이제는 노가다를 만끽하고 즐기는 단계!
"저곳이 무바인 성이로군."
위드가 와이번의 등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상에, 뾰족한 첨탑 아래에 엄청난 성벽을 가진 성이 나타난 것이다.
영주 크레센드가 이끄는 블랙 서펜트 길드가 차지하고 있는 성!
한 왕국의 수도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많은 유저들이 모여 있는 대도시였다. 유저들의 숫자로는 로자임 왕국의 세라보그 성과도 비할 정도가 아니며, 소므렌 자유도시만이 무바인 성과 비견되리라.
"주인, 저곳이 목적지인가?"
와삼이가 힘들게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물었다.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우리의 목적지는 조금더 가야돼."
"알았다, 주인."
와삼이는 날갯짓을 계속했다.
무바인 성도 지나치고, 그 다음에도 마을과 성들이 여러개가 나타났다. 하지만 위드는 목적지이니 내려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각술의 비밀이야. 프레야 여신의 신탁을 따라서 가 보려면, 인간들의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지 말고 바로 그곳으로 가는 편이 맞겠지.'
공연히 헛수고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곳을 가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3시간 정도를 더 날았다.
무바인 성을 지나치고 5시간 쯤 흐른 뒤였다.
"히, 힘들다, 주인. 대체 언제 도착하는가."
"조금만 참아."
"어, 얼마나 남았는지라도....."
"거의 다 왔어."
와삼이는 죽을 힘을 다해 날갯짓을 했다.
날개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탈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최초로 날개에 힘이 빠져 추락사한 와이번이 될 수도 있으리라.
2시간이 더 흐르고 나자 결국 와삼이가 애원했다.
"주인, 쉬었다 가자!"
"앞으로 금방이야."
1시간 정도가 더 지났다.
"내, 내가 정말 지쳐서... 다른 형제에게 갈아타면 안 될까, 주인?"
다른 와이번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날고 있었다. 와삼이가 지쳐 갈 무렵부터, 이런 상황을 미리 염두에 두고 거리를 둔 것이다.
와이번들의 지능도 이런 쪽에서는 상당히 뛰어났다.
말이나 와이번이나, 순간 가속력이 대단히 빠른 편에 속하지만 지구력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런데 전력에 가까이 날면서 위드를 계속 태우고 있으니 매우 힘겨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드가 와이번의 사정을 알아 줄리 만무했다.
"귀찮아.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하는데 왜 번거롭게 그런 짓을 해?"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나가는 말투!
위드가 부모와 같은 존재만 아니었더라면 진작 배신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긋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그럼에도 와삼이는 조금 더 참기로 하고 얌전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주인, 얼마나 남았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
위드의 무관심한 말은 잔인했다.
조금 만 더 가면 된다는 것은 무바인 성의 상공에 있을 무렵부터 했던 말이 아닌가.
그로부터 4시간을 더 날았다.
지상에는 산과 산맥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울창한 숲과 나무들도 많고, 산 중턱에는 갱도들이 뚫려 있고 드워프들이 오가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푸른 산의 경치도 절경이라고 할수 있었지만, 와삼이의 눈알은 노랗게 변한 뒤였다.
"음, 이제 2시간만 더 가면 되곘군."
"......."
다른 왕국이 큰 강이나 평야를 끼고 있는 것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토르 왕국은 3개의 산맥에 걸쳐 있다.
노른 산맥, 울타 산맥, 사이고른 산맥.
600년간 드워프들에 의해 성장한 왕국이었다.
그들이 지배하는 왕국의 특산품은 대단했다.
금, 은, 백금, 호박, 사파이어, 비취, 다이아몬드, 공작석, 장미수정, 자수정, 루비, 오팔 등 셀수 없이 많은 보석들. 철, 구리, 청동을 비롯하여 미스릴 등의 광물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드워프들이 제련하고 세공하여 만드는 물품들이 토르의 특산품이다.
드워프들의 손재주는 타고난 바가 있고, 풍부한 금속류들로 인하여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많다.
그렇게 드워프들이 만들어 낸 물품들은 어디에서도 비싼 가격에 팔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추가적인 교역 경험까지 준다.
그런 이유로 상인들은 토르 왕국에 끊이지 않고 방문 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르 왕국의 드워프들은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