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악룡 케이베른
드워프 마을 아이언핸드.
토르 왕국에서도 명장 드워프들이 많이 살기로 유명한 마을로, 인근 광산에서는 순도 높은 철들이 대량생산된다.
작고 앙증맞은 드워프 주택들, 주택가에도 듬성듬성 있는 대장간은 이곳이 장인들의 마을임을 쉽게 알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드워프들을 위한 상가 지역도 있어서 키 작은 드워프들이 다수 이용하고 있다.
보통 다른 마을은 중앙 광장이나 시장 근처에서 상거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지만, 아이언핸드에서는 마을 입구 근처에서부터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귀한 광경을 볼수 있었다.
인간, 엘프, 묘인족 할것 없이 마차를 끌고 온 상인들이 드워프를 붙잡고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이다.
"로엔 상단의 상인 미트라입니다. 혹시 만들고 계신 무기나 방어구가 있다면 저에게 팔아 주실수 있을까요?"
"세공 물품 대량으로 가져왔습니다. 조금만 손봐 주시면 사례비를....."
"뭐 필요하신 물건 있으면 대량으로 공급해 드립니다. 토르 왕국의 철이나 구리는 비싸지만, 좀더 저렴한 노이드 왕국의 3등급 철은 어떠세요?"
"가격 비싸게 쳐 드립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상인들의 집요한 호객 행위!
지나다니는 드뭐프들을 붙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아이언핸드는 무기와 방어구 생산의 중심지로서, 이곳에서 구한 물품은 베르사 대륙 어디에서도 비싸게 팔아 먹을수 있다.
일부러 이곳 까지 찾아온 상인들로서는 혈안이 되어 드워프들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것.
"좀 놓아주세요."
"저는 드워프 전사인데...."
수염을 곱게 기른 순진한 드워프들이 고생을 겪고 있었다.
사실 이런 면 때문에라도 드워프들은 아이언핸드에 잘 오려고 하지 않는다. 순박하게 대장장이 스킬들을 성장시키면서 살아온 장인들에게는, 상인들의 가격 후려치기 및 사기에 가까운 상행위가 고깝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아이언핸드에 위드도 걸어왔다.
멀리서부터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며 위드는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머리를 끄덕였다.
'제대로 찾아왔군 상인들이 저렇게 많다니, 과연 드워프 마을이야.'
모라타에 오는 상인들이 좀더 큰 돈을 노리고 먼 거리를 오는 행상이라면, 이들은 대량으로 구매해서 대량으로 파는 거상들이다.
물품 중개업으로만 돈을 모으고 왕국이나 마을의 발전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해서 상인 업계에서는 그들을 천시하고 있었다. 호객 행위를 비롯해 가격도 손님을 봐가면서 제멋대로 책정하는 등, 그리 질이 좋다고 할수는 없는 부류다.
그들 상인이 멀리서 다가오는 드워프, 위드를 보았다.
'먹잇감이다.'
'저 드워프는 내 거야.'
굶주린 상인들이 우르르 집단으로 위드를 향해 달려왔다.
"물건 사거나 팝니다."
"뭐든 거래해 드릴게요."
"가지고 있는 물품 저렴하게 팔고 가세요. 멀리서부터 왔습니다. 제발요!"
"다른 사람들보다 무조건 더 높은 가격 제시합니다. 팔거 있으면 파세요."
상인들이 집단으로 뭉쳐서 떼를 쓰기 시작하면 웬만한 드워프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대체로 아이언핸드에 오는 드워프는 장인들이라서 전투 레벨도 낮거니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탓이었다.
위드는 바람처럼 내달렸다.
낮은 키를 최대한 이용하여 상인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고, 절묘한 방향 전환 등으로 상인들의 손을 피했다.
"앗!"
"빠져나갔다."
허탕을 친 상인들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자신들의 포위망을 벗어나다니. 악질 상인들의 경력에 오점을 남길 만한 일이었다.
진정한 거상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채로 마을 입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위드가 마을 입구를 통과할 때에 넌지시 한마디씩을 건넸다.
"나보다 비싸게 사 주는 사람 이 세상에 없을걸."
"가진 건 돈 밖에....."
나름대로 영업 전략에 따라 다른 상인들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위드는 그들마저도 지나서 아이언핸드 마을로 들어갔다.
드워프 대장장이는 타고난 손재주 덕에 무기나 방어구를 잘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전사라고 할 지라도 간단한 물품, 횃불이나 화살 등은 어렵지 않게 만들어쓴다.
전투에서 죽을때까지 싸우는 고집불통 드워프 전사들의 수도 적지 않지만, 아무래도 드워프들은 거의 모두가 장인의 길을 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재주와 예술성, 생산 스킬 등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는 드워프의 특성 때문이다.
트워프 종족을 택할 때부터 이런 장점들을 고려했기에 장인의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
불과 철을 다루는 데 가장 능숙한 종족.
초반부터 내구력 높은 물품들을 만들어 내고, 생산 스킬들을 섭렵하며 존중받는 장인이 된다.
인간 대장장이는 거의 모든 무기를 만들수 있다. 하지만 전문성은 그만큼 떨어진다.
활은 엘프 대장장이가 만든 것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엘프들은 정령술과 마법, 궁술에 능통한 종족이다.
엘프 대장장이들은 많지 않고, 그들이 만드는 활은 특수한 재질의 나무를 쓰기에 거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질 정도는 아니다.
드워프들이야말로 대장장이를 위한 꿈의 종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삶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휴우, 이번달에 밀린 철광석 값을 겨우 갚았어."
"자네도 그런가? 난 요즘 철광석 값이 올라서 죽겠네."
"대장장이 스킬은 마음대로 늘어나지 않고, 중간 상인들은 가격 후려치기에 바쁘고... 이것 참 힘들군."
주점에는 푸념하는 드워프들이 많았다.
위드는 낮은 탁자와 의자에 앉아 우유를 시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세상의 누구나 다 자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예술가보다 평안한 삶을 사는 드워프들도 신세 한탄을 한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밖에 없는 사연도 있었다.
"이번에 악룡 케이베른이 세금을 더 올린다는군."
"석 달 전에 올렸는데 또?"
"레어를 금으로 장식하고 싶다는 이유야."
"어휴! 그놈의 요구는 끝도 없군. 그래, 이번에는 어떤 몬스터들이 요구를 하러 왔나?"
"무슨 상관이야. 그놈 휘하의 몬스터 군단이 어디 한둘 인가?"
"그래도 어떤 놈이든 오긴 왔을 것 아닌가."
"듣기로는 미노타우로수 가드들이 왔다더군."
악룡 케이베른.
토르 왕국을 비롯해 인근 산맥들으 자신의 영역으로 가지고 있는 드래곤이다.
보석에 대한 탐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드워프들은 생존을 위하여 끊임없이 공물들을 바쳐야 한다.
인간 마을들은 몬스터의 침입을 받거나 다른 왕국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모라타만 하더라도 몬스터들의 침입으로부터 그리 안전한 편은 아니다.
반면 드워프 마을들은 드래곤에 의해 지배되는 몬스터들로 인해 이러한 침입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지만, 생산물들 특시 보석이나 금을 바쳐야 되었다.
다만 무조건 나쁘다고만 몰수 없는 것이, 가끔은 드래곤이 휘하 몬스터들을 부려서 새로운 광산들을 개발할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광산에서 나온 미스릴이나 철광석 등은 절반 이상을 상납해야만 했다.
또한 드워프 전사들은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을 사냥할수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도 드래곤은 드워프들에게 징벌을 내리지 않았다.
드래곤이 보기에 드워프들은 귀찮은 일을 도맡아하며 어떤 일이든 시킬수 있는 일꾼일 뿐이고, 몬스터들은 자기 영역에서 사는 벌레일 뿐이다. 구태여 간섭할 까닭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토르 왕국에는 5마리의 드래곤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케이베른이 가장 보물을 밝히는 놈이었다.
드래곤이라는 상전들만 아니었더라도 토르 왕국은 진작 발전을 거듭해서 최고의 국가가 되었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토르 왕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용병들을 모아 드래곤 퇴치에 열을 올리나 전혀 소득도 없고, 현재로써는 글너 용병일에 참여하는 이도 드물었다.
위드는 우유와 빵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주점을 나섰다.
'그래도아직 드워프들은 살 만하군.'
드워프들의 앓는 소리는 엄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기와 맥주를 시켜놓고 시간을 보내는 주제에 무슨 빈곤 타령인가!
드워프 마을들의 세금이 높은 편이기는 해도, 그런대로 버틸 만은 했다.
대륙 최고의 양질의 철광석들을 바탕으로 무기등을 만들고 스킬들을 점점 성장시키니, 유명한 드워프 장인들에게는 주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토르 왕국을 떠나서 다른 왕국에 간 드워프들은 떼돈을 벌고 있고, 심지어는 무기와 방어구 판 돈으로 영주도 하고 있었다.
물품을 공급해서 고레벨 유저들과 인맥을 쌓고, 길드들을 만듦으로 인해 세력을 확대한다.
베르사 대륙에는 야망을 가진 대장장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위드는 조각사 길드로 들어갔다.
토르 왕국의 조각사 길드는 일반 드워프들도 많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조각술이 손재주를 가장 빠르게 성장시켜 주었으니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익히는 편이었다.
주각사 길드 안에도 드워프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위드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조각 변신술로 완벽하게 드워프로 모습을 바꿔서 위장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쯧쯧, 자네는 아직 멀었군. 더 배우고 오게."
드워프 교관은 까칠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드워프들을 다루고 있었다.
"자네는 무기를 만들 시간에 조금이라도 예술에 대해 고민을 해 보는게 어떤가? 강한 무기라고 하더라도 예술이 없으면 명품이 되지 못하는 법이야."
"혼을 불어넣는 무기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조각사 길드에 왔다고? 대장장이 길드에서 제대로 가르쳐 준 모양이군. 하지만 너무 일러. 적어도 제대로 무기부터 만들고 나서 오도록 해. 결점 투성이의 물건에 어떻게 혼을 불어넣을수 있단 말인가."
"무능한 드워프들 같으니."
교관의 말에 드워프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더 노가다를 하란 말이야.'
'지겹다, 지겨워. 이놈의 생산의 길.'
한탄을 하면서도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더 좋은 물품을 만들고, 대장장이 스킬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주변에서 인정을 받는다.
드워프는 불만이 있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무기를 만들든 대장장이 스킬의 빠른 향상을 위해서는 손재주가 꼭 필요하다. 그런 손재주를 위해서는 조각술을 익히는 게 가장 좋고, 또 조각술이 조금쯤은 다른 물품을 만드는데 도움도 되니 참을수 밖에 없었다.
위드는 차례를 기다려서 드워프 교관에게 말했다.
"손으로 빚어내고 표현하는 예술의 길. 그 예술의 길에 새로운 기르침을 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뭐라고?"
드워프 교관은 믿을수 없는 말을 듣은 듯한 표정이었다. 주름 투성이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고, 수염을 만지작 거리는 것도 잊은 태도였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새로운 가르침의 길을 청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웅성웅성.
"방금 저 드워프가 뭐라고 말한거야?"
"새로운 가르침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조각술의 레벨이 얼마인데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드워프들조차도 믿을수 없어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유저를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각술 스킬이 발전함에 따라서 당연히 익힐수 있는 상위 스킬들!
지금까지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서 굳이 배우지 않았지만, 드워프 마을의 조각사 길드에 온 이상 배우기로 작정했다. 드워프들의 길드에서는 스킬을 익히는 비용이 다른 곳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혜택 때문이었다.
드워프 교관은 전시되어 있던 조각용 엘프목이 있는 쪽으로 위드를 안내했다.
"자질이 충분한 조각사임을 증명할 기회를 주지. 그럼... 솜씨나 발휘해 보게."
"주제가 무엇입니까?"
"뭐든 괜찭지만,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조각품이면 좋겠군."
위드에게 이미 엘프목은 익숙했다.
'조각 상점에서 파는 고가의 조각 재료. 나무 중에서는 최상급이지.'
나무로는 정말 지겹도록 조각품을 만들었다.
보존성에 있어서는 좋지 않지만 빠르게 만들수 있고, 표현에 있어서도 나쁘지 않다.
나뭇결이나 나이테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통으로 된 나무들. 조각품을 만들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무늬들이 대단히 아름답다.
이런 명품 나무들은 조각 재료로서도 굉장히 고가라서 수십골드를 넘기도 한다.
드워프 교관이 제시한 시험에 나온 엘프목은 그러한 최상급 나무인 것이다.
"저 엘프목 잘 깎이지도 않잖아. 저런 나무로 즉석에서 조각품을 만들라니, 정말 어려운 시험인데...."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조각사 길드의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일도 중단하고 위드의 행동만을 주시했다.
위드는 묵묵히 엘프목을 보다가 의자를 밑에 깔았다. 드워프가 되고 나서 키가 작아진 탓에 원활한 조각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키높이 의자가 필수 였다.
위드는 자하브의 조각칼을 꺼내어 과감하게 엘프목에 꽂았다.
푸욱!
조각술 시험을 보고있음을 감안하면, 드워프들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과감한 행동!
조각칼이 엘프목에 깊게 박혔다.
그런 상태에서 위드는 대각선으로 쭈욱 그어 버렸다. 자하브의 조각칼은 마치 두부자르듯이 엘프목을 갈랐다.
위드가 조각칼을 움직일 때마다 여지없이 엘프목이 통째로 그어지고 베어진다.
"이게 조각술?"
"조각칼을 검처럼 다루다니 어떻게 이런일이...."
"보통 조각칼이 아닐거야."
도구에도 놀랐지만 과단성있는 솜씨에 더 크게 놀랐다.
무슨 조각칼을 찌르고, 베고, 휘두르면서 나무를 사정 없이 토막 내어 버리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점점 어떠한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게 놀라웠다.
마구잡이로 베어내는것 같지만 실수가 없다. 여러번 손을 거쳐서 만들어질 것들이, 한번에 뚝딱 이루어진다.
조각칼의 사용에 있어서 달인이 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경지.
본인의 힘과 검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난이도의 조각술.
구경하는 드워프들이 많음에도 당황이나 긴장 따위가 전혀 없다는 점 또한 놀라웠다.
이 순간 시험에 임하는 위드의 마음은 간단했다.
'어차피 돈도 안 되는 거, 대충 하자!'
시험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것 같은 사람에게나 초초한 법이었다.
'저주를 받기 전에 빨리 끝내 버려야지.'
미지의 존재들이 자신부터 만들어 달라고 귓가에 떠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놔두면 어떤 저주에 걸리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속도가 생명이었다.
'성공 못하면 돈 날린다. 이거 하나 만들어 봐야 몇 쿠퍼 일텐데, 밥값이라도 하려면....'
절박하게 조각하던 초보 시절.
상황이 나아진 지금도, 여신상 정도의 거창한 것들을 만들면서 담력을 길렀다.
드워프 마을에서 조각술 시험을 보는 정도 따위는 위드에게 어떤 감흥도 줄수 없었다.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조각품.'
위드는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몇 초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곳은 드워프 마을이다.
드워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조각품은 시작부터 정해져 있다.
"드래곤이다."
"저 넓적한 날개와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굵은 다리는.... 악룡 케이베른 이잖아!"
나무의 크기 한계로 인해 실물보다야 훨씩 작게 조각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정해진 다음에는 위드의 조각칵이 빠르게 세밀하게 움직이면서 나무들을 깎아 냈다.
탐욕스럽게 벌린 주둥이.
인간의 성대 구조라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그처럼 동그랗게 말고 말할수 있는 단어는 하나였다.
돈!
짧은 팔에는 보석들을 가득 쥐고 있고, 눈썹과 수염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뻗었다.
막 땅을 박차고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고 하는 악룡 케이베른.
"저 드래곤을 여기서 또 보다니."
"저놈의 드래곤만 없었더라도 제법 먹고 살만 했을텐데 말이야."
드워프들은 악룡 케이베른을 보면서 화도 나고 짜증도 일어났다.
조각품이란 입체적인 표현의 예술.
이름만 들어도 분노가 솟구치는 대상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 기분이 훨씬 배가되었다.
드워프 교관이 말했다.
"시험은 합격했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조각품을 완성할 줄은 정말 몰랐군. 본인의 조각술 실력을 너무 과신하는게 아니라면 좋겠다."
까칠한 드워프 교관이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은 최고의 극찬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그래도 자만심이 있는 조각사로 보는 것은 않 좋은 현상.
위드는 슬그머니 변명을 늘어놓았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성의 있게 조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해한다. 나보다도 뛰어난 조각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세공의 정밀함에 있어서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우리 드워프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어있는 악룡 케이베른을 이런 식으로 조각할 줄은 몰랐다.
"저는 도마뱀 1마리를 조각핼쓸 뿐입니다."
드워프 교관이 흡족한 듯이 웃었다.
"내 마음에 아주 쏙 드는 녀석이군."
그러자 구경하고 있던 드워프들의 안면 근육이 경직되었다.
만날 욕설이나 퍼붓고, 무능하다고 조롱하던 교관과 몇마디의 말로 친해질수 있다니!
"조각술 교관과 친해진 유저가 등장했다!"
"저런 아첨 신공은 어디서 배운 것이지?"
위드의 함께 욕하며 친해지기 기술을 처음 본 드워프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만한 일이었다.
'우리가 세상을 너무 어렵게 살았구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더니, 저 간교한 혓바닥으로 인생을 거저먹지 않는가.'
아무튼 교관은 친밀도의 영향으로 인해 20%나 더 할인된 가격으로 조각술을 전수해 주었다.
"조각품은 마음을 움직일수 있다네.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이나 대화를 원하지 않는 이들도, 조각품을 보고 진심을 알수 있을 거야."
띠링!
- 조각 언어술을 습득하셨습니다.
"조각품들은 불멸이 아니라네. 세월이 흐를수록 손상되기 마련이지. 손상되 작품들을 복원하면 후인들에게 더 많은 행복이 될거야. 조각 복원술을 배우고 나면 의뢰 등을 받으면서 조각품의 심오한 세계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을 걸세. 아쉽게도 이미 그 수준은 넘어버린것 같지만."
- 조각 복원술을 습득하셨습니다.
위드는 새로 얻은 스킬들의 정보를 바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스킬 정보창. 조각 언어술, 조각 복원술!
- 조각 언어술 1(0%) :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이나 인간, 이종족들에게 조각품으로 말을 걸수 있다.
훌륭한 작품이라면 그들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고 호의를 이끌어 낼수 있을 것이다.
스킬의 레벨이 오를수록 명성이나 종족의 제한을 벗어나 대화를 걸수 있음.
조각 언어술이 중급에 이르면 모험가의 특수 감정스킬을 습득하게 됨.
조각 복원술1(0%) : 스킬 레벨에 따라 파손된 조각품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할수 있다.
이미 커다란 명성과 아부 신공을 가니 위드에게 그리 필요한 스킬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배워 두었다.
여기까지가 위드가 원래 배우려고 하던 부분이었다.
미지의 존재들이 스스로를 조각해 달라고 아우성을 쳐 대서, 프레야 여신의 신탁까지 받아 드워프 왕국 까지 왔다.
그들을 조각하는 방법, 조각술의 비기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의 냄새가 풍긴다.
이것은 그리 쉽게 찾을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교관은 뜻밖의 말을 했다.
"자네는 조각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꿈을 가지고 조각사가 되었는가?"
위드는 이순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갈등했다.
'돈, 명예, 권력, 힘. 뭘 말해야 되지?'
순간적으로 갈등이 스쳐 지나가는데,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지 교관이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조각사의 꿈은 역시 조각품에 대한 열망이겠지. 더 좋은 조각품을 만들어서 세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 그것이야 말로 조각사들의 낭만이 아니겠는가?"
"...."
"아무튼 자네 정도라면... 조각사로서 스스로의 길을 선택 해야 할 때가 되었네."
"스스로의 길?"
"조각술이란 다른 분야에 비해서 고상하고 난해한 예술의 분야야."
위드도 인정하는 바였다.
돈이라고는 지지리도 나올 구석이 없는 예술. 조각술.
"조각술에 평생을 바치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네. 자네가 이룩한 경지가 대단하기는 하나 조각술의 정점을 바라보기에는 아직도 한없이 미약한 수준."
조각술이 고급에 이른 이후로 스킬 숙련도가 매우 더디게 늘기는 했다. 갈수록 스킬숙련도는 줄어들 뿐더러, 연관 스킬인 조각 검술, 조각품에 생명부여, 조각 변신술은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각술에 모든 것을 바치기란 어려운 일이지. 이제 그만 그 뜻을 꺽는다면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을 얻을수 있을 것이야."
"보람요?'
"그렇네. 조각술을 익힌 공로로 예술 분야의 명사가 되어 귀족으로 성장할수도 있는 것이지. 원한다면 인간 왕국의 귀족이 될수도 있을게야."
위드는 이미 백작이고 영주였으므로 그리 가치있는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면 지금까지 얻은 조각술을 다른 분야로 활용하는 수도 있어. 혹은 좀더 쉬운 방법을 택할수도 있지. 일종의 편법이 되겠고, 정작 조각술의 끝을 볼수는 없게 될 테지만 그동안의 고생을 쉽게 할수 있을 것이야."
"...."
"조각술이란 어렵지 않은, 누구나 즐길수 있는 예술이지. 편히 즐긴다고 해서 누가 자네를 욕하겠는가?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덜어줄 수도 있을 거라네."
띠링!
- 조각사의 선택
드워프 교관은 당신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 속성 조각술 : 열흘 이상 매일 5개 이상의 조각품을 만들면 그후로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더 빨리 늘어난다. 단, 조각술 외의 다른 스킬들의 성장은 크게 줄어든다.
* 미안의 조각술 : 예술 스탯과 매력의 성장이 빨라진다.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드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 다재다능한 예술가 : 손재주를 기반으로 다른 스킬들을 익힐 때 도움이 된다. 조각술은 더 이상 익힐수 없지만 생산스킬을 비롯하여 손을 이용한 스킬들의 성장 25% 빨라진다. 단, 다른 어떠한 생산, 예술 스킬도 마스터 할 수는 없다.
* 영원한 조각사 : 조각의 세계에 영혼을 바친 조각사. 걸작, 명작, 대작의 구분 외에도 다른 특징적인 조각품들을 만들어 낼수 있다.
조각품들의 특색이 강화된다.
역사적인 작품, 불가해의 작품, 대륙의 보물 등을 만들어 낼수 있다.
조각술과 연관 스킬들의 효과가 20% 증가하며,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으로 높은 등급의 조각품까지 만들수 있음으로 인해 특별한 효과와 많은 보상을 얻을수 있으나, 실패작을 만들었을 때의 감소폭도 커진다.
위드는 오랫동안 갈등하지 않았다.
'매번 이런 식이군.'
조각사를 택하고 나서 직업을 바꿀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나 그럴 때 마다 위드의 선택은 그대로 조각사의 길을 가는 것.
근본적으로 조각술이 점점 좋아졌다는 사실을 부인할수 없었다.
세공 솜씨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항상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세세한 곳까지 표현된 조각품이라고 해도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실력은 모자라도 좋다.
어린아이가 동심으로 만든 조각품. 서툴고 조악한 솜씨라도 정성껏 만든 것들은 느낌이 다르다.
신기하게도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든 조각품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미소를 짓게하고 기쁨을 전해 준다.
유쾌함, 보람으로 만든 조각품들. 애정이 담긴 조각품을 깎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되었다.
'여동생의 웃는 얼굴, 할머니의 자애로운 눈빛을 조각하면서... 그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위드 본인이 즐김으로써 그리고 정성을 기울이면서 얻게 되는 순수한 희열!
서윤이 웃는 모습을 조각했다.
살인자로서 그녀가 무섭게 느껴졌을 때, 그녀가 웃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만든 것이 진정한 조각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빙설의 폭풍으로 추위에 얼어 죽을 것만 같을 때,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자 빙룡 조각상을 완성했다.
조각술은 위드의 모험을 함께해 온 동반자였다.
고통 속에서 꿈을 꾸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조각술을 통해 현실이 되어 버린다.
조각 검술을 펼치고, 생명을 부여하고, 다른 이로 변신을 한다.
조각술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조각사의 감정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비춰질리가 없건만, 그럼에도 조각품에 묻어나는 모양이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주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대 조각사 위주로 하고 있었지만, 조각술이 좋다는 것만은 부인할수 없었다.
마음을 다해서 만드는 조각품들.
위드가 어려웠던 시적을 추억으로 되새기면서, 미래를 위해 펼치는 꿈의 조각술이다.
'뭐, 치사하고 더러워서, 지금까지 저질러 놓은 것도 아깝고.... 뭘 하더라도 더 잘할수 있겠지만 귀찮으니까 그냥 선택해 준다.'
위드가 말했다.
"영원한 조각사의 길을 가겠습니다."
- 오빠,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 그게.....
제피는 혼자 토둠에 남은 유린이 귓속말로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것들을 대답해 주다보니, 어느새 접속하면 인사도 나누고 귓속말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검치 형님들이 아는 날에는 나는 최소한 사망이다.'
그래서 유린이 오빠라고 말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
하지만 거절할수도 없어서, 친절하게 대답은 해 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유린이 불쑥 물었다.
- 오빠는 집이 어디예요?
- 강북이야. 평창동.
- 평창동이 어딘데요?
- 북한산 아래인데.... 설명하자니 좀 어려워.
- 아, 오빠도 어렵게 사는구나. 수도꼭지에서 물은 잘 나와요? 거긴 마을버스도 안 다니죠?
- ......
- 나중에 제가 김밥에 떡볶이라도 사 드릴 테니 기운 내세요.
웬만한 졸부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동네 평창동이 산동네 취급을 받았다.
- 오빠는 학교 졸업하면 무슨일을 하고 싶어요?
- 무슨 일이라니?
- 하고 싶은 일이 있을거 아니에요.
- 하고 싶은 일이라... 별로 생각 안 해봤어. 그냥 부모님 가업을 이어가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쪽으로 공부도 많이 해 왔고.
- 그렇구나. 가업이 뭔데요?
- 오성인데......
제피는 사실대로 말해야 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로열로드를 하면서 누구에게도 그의 집안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 탓이다.
- 혹시 오성 전자예요?
- 응? 으응.
오성 전자는 연간 매출액이나 순이익에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는 전자 회사로, 오성 그룹의 중심 계열사였다.
'오성 전자도 우리 계열사 중의 하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 오성 전자에서는 컴퓨터, 휴대폰, 생활 주방 가전 등등 취급하죠?
- 그, 그럴걸.
- 훗! 잘됐네요.
수많은 여성들을 섭렵한 제피의 눈치는 비상한 편이었다.
'반응이 좀 이상하긴 한데.'
놀람과 감탄이 아니라, 제대로 잘 걸렸다는 태도.
유린의 귓속말이 들려왔다.
- 오늘 밤에 우리 집에 좀 올래요? 우리 오빠한테는 말하지 말고.... 오빠는 오늘 도장에서 좀 늦어요.
유린이 갑자기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최지훈은 무수한 심마를 겪고, 초췌해진 얼굴로 이혜연이 사는 동네까지 차를 운전해서 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
여자가 집으로 초대했으니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이혜연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화를 하며 친해지는 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판국에, 밤에 집에 초대받은 것을 걸리기라도 한다면......
"죽음이지, 죽음. 변명의 여지도 없을 거야."
최지훈은 무수한 망상에 사로잡히며 억지로 발걸음을 떼었다.
이혜연이 상세하게 위치를 알려준 덕에 어렵지 않게 찾아 갈수 있었다.
도로나 상가와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조그만 단독 주택.
마당에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고, 구석에는 장독들이 보였다.
"과연."
최지훈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단아한 가풍의 집에서 성장한 여자라면 살림은 정말 잘할 거야."
하지만 그는 조금도 몰랐다.
이현은 이혜연이 부엌에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결사적으로 말렸다.
"부엌일은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해도 돼. 그때에도 김치나 밑반찬은 계속 가져다 줄 테니, 넌 손에 물도 묻히지 마."
그렇다고 설거지나 빨래도 완전히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살림은 이현의 몫이었다.
집도 이현이 구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단련된 다년간의 지리 감각. 터가 좋고 햇빛이 오래도록 드는, 양지바르고 조용한 동네를 택해서 매입한 것이다.
딩동.
최지훈이 벨을 누르자, 이윽고 정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여자 집을 처음 방문해 보는 것도 아닌데 슬며시 가슴이 떨렸다. 두 팔에는 과일 상자와 꽃을들고 있었는데, 선물이라고 뭐든 사 온 것이었다.
멍멍!
마당에 들어가자마자 개가 짖으며 달려왔다.
"헉!"
최지훈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슨 개가 송아지만 하잖아."
얼마나 잘 먹었는지 토실토실 살이 오른 큰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간절하게 몸을 비벼 대었다.
과도한 친근감의 표시.
손님이라는걸 깨닫고 하는 행동이었다.
"어서 와요."
이혜연은 흰 티에 추리닝 바지의 수수한 차림으로 현관에 나왔다. 그때 까지도 몸보신은 최지훈에게 친근한 척을 하고 있었다.
"보신아, 가서 쉬어."
하지만 이혜연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꼬리를 한차례 흔들더니 구석의 개집으로 재빨리 물러가는 것이 아닌가!
최지훈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꽃과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사왔어."
"네, 고마워요."
이혜연은 과일 바구니를 받더니 최지훈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꽃은?"
"대충 우산꽂이에....."
"....."
이혜연은 갈치조림에 밑반찬들로 식사를 대접했다.
"많이 드세요."
급하게 오느라 저녁도 걸렸는데 한 상 차려지니, 최지훈은 숟가락 부터 들었다.
"염치 불구하고 잘먹을게."
집에서 먹던것과는 달랐다. 소채들을 비롯해서, 위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담백하게 버무려진 밑반찬들.
정갈한 요리는 최지훈의 입맛에 꼭 맞았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
빈말이 아니라 최지훈은 밥 한공기를 다 비웠다. 레스토랑에서먹는 풀코스 요리보다도 훨씬 맛있었다.
최지훈은 밥을 먹자마자 빈 공기를 들고 일어났다.
"얻어 먹었으니 내가 치울게."
"아니에요. 손님이시잖아요. 그릇은 제가 치울테니 제 방에 가 계세요. 금방 갈게요."
"바, 방에?"
"네. 쉬고 계세요."
"......"
최지훈은 끌리듯이 이혜연이 가리키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갓 스무살이 된 풋풋한 아가씨의 방.
핑크색의 벽지에, 연예인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에는 과학 관련 원서들과 의학 책들이 많은 와중에, 추리 소설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세계를 멸명시킬 10대 기술적 진보》.
《인체 해부학》.
《연쇄 살인마의 초대》.
"좋은 책들을 읽는구나."
제목 조차도 원어로 쓰인 탓에, 최지훈은 읽지 못하고 무심코 넘길수 있었다.
"곧 그녀가 올텐데... 오며 뭘하고 놀지?"
이혜연과 한 방에, 그것도 그녀의 방에 있다 보니 야릇한 분위기로 흘러가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하지만.... 이애라면 내가 정착할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다른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혜연의 방에서는 상쾌한 향기가 났다.
바로 조금 전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던 듯, 책상에는 책과 노트가 펴져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드라이버와 망치 등이 들어있는 공구함을 들고 왔다.
"많이 기다렸죠? 텔레비전이 잘 안나와요. 고쳐 주세요."
"응?"
"텔레비전좀 수리해 주세요. 집이 오성 전자라면서요."
"집이 오성... 전자라고해서 꼭 텔레비전을 수리할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럼 한국 자동차면 자동차를 만들줄 알게?"
최지훈은 난감 했지만, 일단은 공구들을 이용해 텔레비전을 분해해 보았다. 그리고 다행히 회로의 이상 부위를 찾아내 납땜하는 것으로 고칠수 있었다.
"아! 이제 화면이 나온다."
최지훈은 긴장으로 이마에 흥건한 식은 땀을 닦았다.
오래된 구형 텔레비전이었지만 어릴 때 취미 삼아 분해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최지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겠구나.'
스스로가 미덥게 느껴지고 있을 찰나, 이혜연이 천진하기 이를데 없는 밝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쳐졌네. 신기해요."
최지훈은 조금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이런 것쯤이야 금방이지.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언제든 나만 불러."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실은 고장 난게 더 있는데."
"...."
"가져와도 돼요? 아니면 피곤하센데 다음에....."
"아냐. 가져와."
이혜연은 정말로 가져왔다.
가스레인지, 오븐, 공기청정기, 가습기, 진공청소기, 휴대폰, 노트북, 프린터, 컴퓨터, 모니터, 카세트, 전화기, 선풍기, 밥솥, 비데까지!
"이, 이게 전부야?"
"아니요. 더 있는데요. 주방에 냉장고가 잘 안돼요."
"......"
"못 고치시겠어요? 다시 창고로 가져다 놓을 까요?"
최지훈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해 볼게."
먼저 쉬운 전화기부터 손을 대었다.
오래된 부품들이 낡아서 사용할수 없게 된 경우도 있지만, 간단한 고장들도 많앗다. 수리기간이 끝나면 작은 고장이라도 알아보지 못하고 새로 장만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 물건들은 다 어디서 났어?"
"원래 집에서 쓰던 물건들도 있고요, 오빠가 가져온 물건도 많아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주워 온거예요."
"그렇구나."
수리하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최지훈은 옆에 있는 이혜연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To Be Continued